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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인터뷰-회고록 '모로 누운 돌부처' 1부 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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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지하 인터뷰-회고록 '모로 누운 돌부처' 1부 연재를 마치며

"내 회고록은 '실패한 꿈'에 대한 기록"

"우선 나는 나 자신이 쓴 10년 전의 회고록 위에 가해진 내 자신의 검열을 해제할 것이다. 마치 어두컴컴한 정신병동에서 어느 날 아침 문득 일어서 터덜터덜 걸어나와 바깥 오뉴월의 눈부신 신록과 비온 뒤의 광풍(光風)을 흠뻑 들이마시듯이 그렇게."

본지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난해 단오(端午), 자신의 회고록 '모로 누운 돌부처'의 머릿글을 빌어 던진 김지하 시인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렇게 시작해 지난 5개월, 기자의 책꽂이에서, 혹은 서랍에서 적지 않은 부피를 차지하며 쌓여가던 원고뭉치가 어느새 지난 8일로 마지막장을 넘겼다.

총 3부로 구성된 회고록에서 단지 1부가 마감됐을 뿐이지만 무언가 한 시대가 마감된 듯한 여운이 남는 것은 왜일까.

1부를 집필하던 과정의 얘기나 2, 3부에 대한 구상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김 시인의 일산 자택을 찾았다. 기자의 소심한 기대가 무색하게 김 시인은 이미 쓰여진 글과 아직 쓰여지지 않은 글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대'에 관한 또 하나의 회고를 피력했다.

***1부를 마치고**

"내 회고록은 단지 '실패한 꿈'에 대한 기록일 뿐이야. 내면적 묵상과 사회적 변혁이 결합된 인간혁명, 사회혁명에 대한 꿈, 현실적으로 실패한 그 꿈에 대한 기록이야."

96회를 마지막으로 회고록 1부를 마감한 김 시인이 돌아본 감회는 무거웠다. 어쩌면 더 무거울 수 있는 2, 3부 집필을 위해 '심상'을 달래는 시간이 요즈음이다. 계속해서 2, 3부를 이어가자는 요구는 그래서 어려웠다.(2부 연재는 4월부터 이어가기로 했다.)

지난해 11월에 열린 난초 전시회가 끝난 이후 좀 피곤해 바깥출입은 뜸하다고 했다. 한달에 한번, 아내(김영주씨)와 여행하기로 한 약속도 좀처럼 지키지 못해 내심 미안하다 했다.

그렇다고 칩거는 아니다. 거실 바닥에는 지난 1일 개최된 '동아시아 문화공동체포럼' 관련 자료가 놓여있었다. 환경운동의 진로를 모색하는 '생명문화 네트워크'라는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회갑을 지낸 노시인의 정중동(靜中動)이다.

김 시인은 회고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사용했다. 글 전체를 관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가 단순히 역접의 용도로 사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서, '붙박이 삶'에 대한 뿌리깊은 동경에서, 그리고 나와 사회의 내적 모순에서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거지. 부처가 모로 누워있던 꿈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싶어. 그것도 돌부처가."

1부에는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비롯해 문학과 그림에 대한 열정이 형성되는 데 모티브를 제공한 많은 선생님들과 동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받은 정신적 세례를 바탕으로 사회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전개되는 청, 장년기의 '김지하 현상'이 2, 3부의 내용이다.

***"내 꿈은 현실적으로 실패했어"**

억지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지만 회고록 각 권은 우연찮게 20년 단위로 나뉘어진다.

출생에서부터 유년과 청소년기를 거쳐 김 시인이 스무살 되던 해인 1960년 4.19의 발발까지가 제1부의 기록이다. 2부는 오적(五賊)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옥고를 겪으면서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3부는 그 이후 현재까지의 기록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 시인은 그러나 이 같은 시간적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 듯했다. 사건의 순서는 따르되 시간적 흐름이 글의 기준이 되지는 않을 것임은 회고록 첫머리에서도 이미 밝혔다.

기승전결 구조에 입각한 회고록이 아니기 때문에 각 권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의미와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고 김 시인은 소개했다. 일종의 '해체'적인 글쓰기라는 것.

"내 내면의 세계가 형성되던 시기가 1부라면 2부는 사회와 나의 관계가 초점이야. 3부는 정신적 뿌리에 대한 추적이고."

김 시인은 4.19의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사회와 나에 대한 실천적 자각'이 시작되는 2부는 '공적인 테마'가 중심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플랜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시기에 우리가 한 행동이 세계사적 조류와 근대화에 어떻게 관련이 있었는가가 중요한 문제야.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념적 문제에 대해 '나는 어떤 대응을 했는가'를 짚어보게 될 거야. 현실적으로 무얼 했냐는 문제에 대해서."

2부는 김 시인의 개인사적으로는 20~30대에 해당하는 시기이자 역사적으로는 박정희 집권 시절에 해당한다. 역사와 사회라는 '공적인 테마'는 물론이고 독자들은 그 앞에서 갈등하던 김 시인의 내면적 모습에 대해서도 추적이 가능할 듯하다.

"나는 무슨무슨 이스트(주의자)이면서도 결코 이스트가 될 수 없었어. 저항을 하고 감옥엘 가고 한 것들이 대단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 내 꿈이 현실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거야."

인터뷰 도중 김 시인은 '실패'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했다. 그동안 김 시인의 피력한 사상과 글에 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나 김 시인이 걸어온 삶의 치열함에 비판의 날이 미치지는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실패'라는 말이 쉽게 납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김 시인은 스스로를 '실패한 예언자'라고 표현했다. '실패한 예언자'라는 칼 융의 표현은 곧 '정신병자'를 일컫는다는 부연설명까지 덧붙이면서.

***잃어버린 영성(靈性)을 찾아**

80년대 초반, 김 시인은 극도의 분열증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은 일이 있다. '요기사르' 즉 '내면적 묵상(요기)'과 '사회적 변혁(사르)'의 결합을 향한 꿈의 좌절 때문이라는 것이 김 시인의 설명이었다.

"사회가 정신병 내지는 유사정신병을 가중시키고 있단 말이야. 이 정신병은 개인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 문제로 바라봐야 되는데, 이걸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야."

이처럼 중년의 김 시인을 담아낼 3부의 테마는 우리 사회와 김 시인 개인의 정신적 방황을 '영성(靈性)'으로 모아내는 데 있다. 김 시인은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영성'이라며 자신의 개인적 정신병력을 들춰내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의무라고 설명했다.

"우리 민족에게 독특한 것은 감성, 지성과 더불어 신성(神性), 말하자면 영성이 있다는 거야. 내 개인적으로는 정신병이라는 회로를 거치면서 발화된 것이고."

또한 '요기사르'에 대한 꿈을 추스르면서 '생명'이라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지는 과정, 상고사에 대한 열정이 체득되는 과정이 회고록 3부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1991년 분신정국 중에 김 시인이 던진 '죽음의 굿판' 사건도 기록에서 빼지 않을 것이라 했다. 김 시인은 "호사가들에게는 여전히 흥미있는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정신병에 갇힌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짤막하게 당시를 회고했다.

김 시인은 "우리가 결국 가야 할 길은 '요기사르'가 아니냐"며 "그걸 볼 줄 아는 내적, 외적 안목이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자신의 회고록은 바로 그것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자신은 '실패한 예언자'라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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