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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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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58>

제6강 논어(論語)-17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매우 중요한 담론입니다. 나는 이 화동론이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대와 탈근대를 구획하는 결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寬容)과 공존(共存)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支配)와 흡수합병(吸收合倂)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和)와 동(同)은 철저하게 대(對)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他者)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同化)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和)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同)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同)의 논리 하에서는 단지 양적(量的)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質的)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和)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강의의 서론 부분에서 중국이 추구하는 21세기의 패러다임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止揚)한 새로운 문명을 가장 앞서서 실험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적 자부심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자본주의를 소화하는 대륙적 소화력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 불학(佛學)으로 되고 마르크시즘도 중국에 유입되면 마오이즘으로 되는 강력한 대륙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중국은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지요.

자본주의가 패권적 구조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제국주의적 팽창과정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한마디로 강철의 논리입니다.

스스로를 강철과 같은 강한 존재로 키워가려는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同)의 논리입니다. 종교와 언어까지도 동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식민지 역사를 경험하였지요. 그러므로 동(同)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중국적 의지는 일단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새로운 문명이 그 근본에 있어서 또 하나의 동(同)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는 철저히 문화적인 것이며, 결코 패권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설령 그러한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화주의란 군사적 강제나 정치적, 경제적 강제를 배제한다는 의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다른 문화, 다른 가치,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관용과 공존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근본에 있어서 얼마든지 또 하나의 동(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극좌(極左)와 극우(極右)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 격동기에 도처에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극우의 논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극좌의 논리는 둘 다 강철의 논리이며 존재론적 구조이며 결국 동(同)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그 근본적인 패러다임에 있어서 상통(相通)할 수 있는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 동(同)의 논리를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强化)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타자(他者)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이란 사실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임을 인정합니다.

문명과 문명,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의 모든 차이를 존중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됨으로써 비로소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며 나아가 진정한 문화의 질적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러한 논리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화동담론(和同談論)을 우리의 통일론으로 확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흡수합병이든 적화통일이든 기본적으로 동(同)의 논리에 따른 통일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통일논리를 동(同)의 논리가 아닌 화(和)의 논리로 통일과정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통일과정을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존과 평화정착은 통일과업의 90%를 차지하는 압도적 과제라고 할 만큼 사활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와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공존의 구도를 확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나아가 진정한 상생(相生)의 장(場)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대륙적 소화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 유학,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등 어느 경우든 더욱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적 방식을 원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고유한 역할과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물론 보다 종합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도리어 진정한 패러다임 쉬프트의 선구적 현장으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경주될 때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로부터 세계사적 과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화동담론을 고담준론으로 이끌어 가고 말았습니다만 논어의 이 구절을 일상적 의미로 읽더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자기흉내를 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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