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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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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누구인가

김지하(金芝河)는 누구인가?

시인. 본명 김영일(金英一), 호는 노겸(勞謙).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8년여 투옥 생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됨.
1969년 ‘황톳길’ 등 시 5편을 ‘시인(詩人)’지에 발표.
1970년 5월 담시 ‘오적(五賊)’ 필화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받음, 7월 무기징역 감형.
1975년 2월 출옥 후 옥중기 ‘고행-1974’ 발표, 재차 투옥됨.
1975년 ‘로터스(Lotus)’ 특별상 수상, 노벨문학상 후보 추대됨.
1981년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1999년 율려학회 창립.

김지하가 말하는 김지하.
- ‘지하’라는 필명에 대하여.

5·16 군사 쿠데타 뒤니까, 아마도 스물두 살 때였나 보다. 그때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 앞에 ‘학림’이라는 음악다방에서 곧 나의 시화전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가 여름이었다.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인데 문단에 이미 같은 이름의 문사들이 여럿 있었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 개인 시화전을 여는 것은 마치 시집을 한 권 내는 것만큼 ‘준문단적’, 혹은 ‘준준문단적’ 사건이었는지라 아무래도 필명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런데 그런 어느 날 동아일보사에서 일하던 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잔뜩 취해가지고 거기서 나와 동숭동 대학가의 아지트였던 바로 그 음악다방으로 가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니 돈도 버스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여름 한낮의 태양은 뜨겁고 술은 오를 대로 올라 비틀거리며 종로 길을 갈지자로 걸어오던 때다. 그 무렵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에도 흔한 것이지만 길가에 자그마한 입간판이 주욱 늘어선 것이다.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술김에도 괴상하게 여긴 것은 그 간판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실에 다방, 이발소, 이용실이 있다는 얘긴데 왜 하필 그 글자만은 유독 똑같은 한글, 똑같은 검은 글씨로 맨 위쪽에 가로로 조그맣게 써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똑같은 것들이 여기도 ‘지하’ 저기도 ‘지하’, 저기만큼 가서도 또 ‘지하’, ‘지하’! 그야말로 도처에 유(有) ‘지하’였다.

‘옳다! 저것이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해서 김지하의 지하 시대(地下時代)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 뒤로 내내 정보부 지하실과 경찰서, 유치장, 감옥, 지하 술집, 뒷골목과 허름한 싸구려 여관, 남의 집 문간방을 전전하거나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기 일쑤인 스산하고 을씨년스런 지하시대 삼십여 년이 펼쳐진다.

작명가(作名家) 김봉수 왈, “이것도 이름이야? 감옥에 서너 번은 족히 가겠구먼!” 그랬다.

심지어 한창 지하시대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한 특파원이 내게 처음 악수하며 던진 말이,
“헬로! 미스터 언더그라운드 킴!” 이었으니까 뒷말은 할 필요가 없다.

‘언더그라운드’라면 혁명가를 뜻하는데, 모자라게도 그걸 은근히 즐길 때까지 있었으니 고생해도 싸다고 하겠다. 이름을 고치라고 충고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고집도 부렸지만 또 고쳐서 신문에 발표까지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것이 그것,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나 그대로 ‘지하’였다. 왜일까?

때가 차지 않아서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과시 나의 필명 지하의 유행과 삶에서의 지하시대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은 ‘위(位)’요 ‘궁(宮)’이라, ‘중(中)’ 즉 ‘마음’이 놓이는 ‘자리’를 말함이다. 일종의 ‘닻’의 뜻이다. 큰 바람이 불기 전에 벌레들이 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 때문이니 내게 큰 변화가 올 것이 틀림없다.

연초에 역(易)에 물으니 왈,
‘견군용(見群龍)’이라 했다.
천지가 요동하는 대개벽이다. 짐작대로다.

처신을 물으니 왈,
‘무수길(無首吉)’이라 했다.

‘목이 없으면 길하다’는 뜻이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목을 숙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잘려나간다는 뜻이니, 그러매 크게 깊이 겸손해야 겨우겨우 길하다는 말로도 된다. 그만큼 내게 다가올 변화는 심각하고 그에 대한 대응은 어렵다는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연초 한낮 내 방에 그냥 홀로 무료하게 앉아 있을 때다. 문득 ‘노겸(勞謙)’이란 두 글자가 뇌리에 떠올라와 그 의미가 깊이 각인된다. ‘근로’와 ‘겸손’이니 언뜻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앞으로 내 호(號)로 삼기로 작정하였다.

‘열심히 일하는 겸손’이요 ‘활동하는 무(無)’요 ‘아상(我相) 없는 노동자’, ‘노예 노동자’의 옛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내가 그 동안 얼마나 게을렀으면 ‘근로’가 나오고 또 얼마나 오만방자했으면 ‘겸손’이 나오랴 싶었으니 앞날이 더욱 걱정되었다. ‘근로’와 ‘겸손’ 아니면 갈가리 찢겨나가 살 수조차 없는 운명이라는 내 맏아들 놈의 연초 카드점괘가 이미 나와 있었으니까.

물론 나도 안다. ‘주역’의 겸괘(謙卦)는 노겸군자(勞謙君子)가 곧 타고난 천자(天子)이면서도 남의 밑에서 고개 숙여 근신하며 온갖 선행을 다 베푸는 그 아름다운 법(法)으로 결국 하늘을 차지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뜻에는 일말의 흥미도 없다. 나 같은 뼛속까지의 쌍놈, 민중에게는 도무지 안 맞는 뜻풀이기 때문이다.

그저 윤리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근로’와 ‘겸손’일 뿐이니 내게 지금 결핍되어 있고 앞으로 그렇게 일관하여 고개 숙이고 살다 가지 않으면 큰 실수를 범할 것이 빈번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굳세게 견지할 따름이고, 미적 패러다임으로서는 곧 ‘활동하는 무(無)’의 뜻이리라!

언어작업에서 훨씬 더 여백(餘白)과 틈과 침묵을 살리고 설명을 없애며 말을 줄이는 대담한 소통성(疏通性)으로 ‘흰 그늘’과 ‘한’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삶의 내면에서 무궁무궁 저절로 살아 생성하게 하는 그런 텅 빈 창조력의 언어구조를 갖추고 닦으라는 가르침으로 일단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 꽃 한 송이 ‘영일’로 돌아가고자 한다. 내 인생과 민족 역사에 작고 소담하고 예쁜 삶의 꽃 한 송이만 피우고 가겠다는 조촐한 서원과 함께…….

그렇게 하여 결정된 것이 바로,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이다.
그런데 여러 친구들이 말한다. 영일은 너무 애 이름 같으니, 그냥 한글로 ‘김노겸’이라 부르면 어떠냐는 것이다. 그 편이 무던하고 친밀감이 있어 좋다는 것이니 원컨대 부디 앞으로는 이 이름을 즐겨 불러주길 바란다.


저서 :
첫 시집 ‘황토’(1970) 이후,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1982), ‘검은 산 하얀 방’(1986), ‘애린’(1986), 장시 ‘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6), ‘별밭을 우러르며’(1989), 담시집 ’오적‘(1993), ’중심의 괴로움‘(1994) 등의 시집이 있다.
이밖에도 대설(大說) ‘南’(전 5권, 1994년 완간)을 비롯해, 산문집 ‘나의 어머니’(1988), ‘밥’(1984),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84), ‘남녘땅 뱃노래’(1985), ‘살림’(1987), 장시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1991), 대담집 ‘생명과 자치’(1994), ‘사상기행’(전 2권,1999), ‘예감에 가득찬 숲그늘’(1999), 강연 모음집 ‘율려란 무엇인가’(1999)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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