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번 보고 딱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겨 먹지를 못했다. 그냥 한두 번 만나 저절로 알아지는 건 없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고, 세상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여러 번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겨우 안면을 익히는 정도이다. 안다는 건 그러고 나서도 여러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얻는 나중하고도 나중의 일일 것이다.
식물의 세계로 입장한 뒤 참 어리둥절했었다. 산으로 가면 파릇한 풀과 푸릇한 나무들이 지척에 가득한데 어디 하나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나무요, 풀이라고만 알 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나무나 풀을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앞만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전문가를 따라 나서고 식물 탐험에 따라 나섰다. 그러기를 여러 번, 그래도 심중의 캄캄함은 여전하다. 이럴 때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 세상의 구조가 그냥 한번 보고 딱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내처 조금만 궁리해 보면 그게 능사는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으로 이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면 그건 또한 얼마나 허접한 세계일 것인가. 제대로 알고 느끼려면 그저 부딪히고 걷고 만지고 깨물고 씹고 비비고 뚫어져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가장 깊은 곳은 피부라고 했던가.
▲ 민박집에서 바라본 한계령 너머 설악산. 캄캄한 내 머릿속처럼 깜깜 어둠 속에 묻혔다. ⓒ이굴기 |
2
두해 전의 일이다. 한계령 아래 식당에서 잘 삶은 닭백숙을 먹고 민박집으로 이동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출발해서 한계령-서북능선-끝청-중청-대청봉-오색을 훑는 꽃산행이 예정되어 있다. 짐정리를 간단히 하고 민박집 마당 대청에 모두 모였다. 동북아식물연구소의 현진오 소장이 식물 기재 용어 해설에 관한 짧은 강의를 해주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갖듯 식물들도 이름이 있다. 이름 없는 꽃은 없다. 각종 다양한 꽃 이름은 물론 식물의 기관을 형용하는 명칭들도 참 다양하고 재미있다. 예전에 그런 것들이 그냥 귓전으로 흘려들었는데 식물을 이해하자면 바로 그런 것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식물의 명칭 중에서 꽃, 잎, 줄기, 뿌리는 누구나 흔히 아는 것들이다. 하지만 자연계에서 살아있는 식물들 설명하자면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숲에 들어가 꽃을 살펴보면 그 꽃들의 개수가 우선 다르고, 그 모양이 다 다르고, 그 꽃이 달려 있는 차례가 서로 다르다.
꽃의 사전적 의미는 속씨식물의 생식 기관이다. 이 생식 기관을 설명하는 명칭도 아주 다양하다. 암꽃, 수꽃은 물론 이판화, 합판화 양성화, 단성화. 그리고 그 세부 명칭으로는 화탁, 화피, 꽃받침, 화관, 화판, 수술, 암술, 자방, 주두, 화주 등등.
줄기는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식물의 뼈대를 이루는 긴 부분. 강의에서 줄기에 대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줄기는 뿌리와 잎을 연결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훨씬 간명하게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한편 줄기는 반드시 마디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마디에서 가지가 뻗어나가고 그 끝에서 잎이 달리는 것이다. 줄기는 또한 지상에만 있는 게 아니다. 땅속에도 있으니 감자는 바로 땅속줄기인 것이다.
처음 식물 공부할 때 도감을 많이 보게 된다. 한 식물의 사진을 놓고 간략히 설명해 놓았는데 전문 용어도 용어였지만 다 비슷해서 그게 그것인 것 같았다. 식물을 잘 구별 못하듯 그 설명도 잘 구별이 되지를 않았다.
식물학은 서양 학문이었다. 그러니 그 학문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서양의 처계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작은 차이지만 주소를 적을 때 서양과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말하자면 두괄식이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통인동, 31-4. 궁리출판"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서양은 다르다. 그 주소가 우리의 역순이다. 그래서 그런가. 식물을 설명하는 순서는 땅속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늘로 뻗어나간다. 그리하여 뿌리>줄기>잎>꽃>열매의 순서로 설명한다. 그런 사정을 알고 책을 보니 한결 정리가 잘되는 것 같았다.
▲ 울릉도로 꽃산행 갔을 때 나의 꽃동무는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지친 아들을 이끌고 있었다. 줄기는 그 무엇을 연결한다는 정의에 기대어 말한다면 아버지는 뿌리요 아들은 잎임을 증명해주는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이굴기 |
3
한번 보고 딱 알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보리수나무가 그 나무인 줄을 미처 몰랐다. 여러 산을 다니며 여러 번 보리수나무, 라고 듣긴 들었다. 그저 부처님이 나무 아래에서 깨우칠 때의 그 나무일까 하는 정도로만 지나쳤다. 하지만 문외한의 눈에도 그 보리수가 그 보리수가 아닌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리산의 유평 계곡에서 치밭목으로 오를 때였다.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붉게 익은 열매를 따먹는 순간, 그게 아주 어릴 적 고향에서 소먹이 하러 다닐 때 자주 따먹었던 뻐리똥 열매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고향에서 다래, 오디, 정금과 더불어 가장 맛있게 따먹었던 열매였다. 옛 추억에 젖어 정신없이 맛있게 먹던 나에게 한 분이 말했다.
"이게 바로 보리수나무이죠. 그 열매는 보리똥이라고 했죠!"
그간 나는 입으로 먹을 줄만 알았다. 또 입으로는 뻐리똥이라고만 했다. 보리수나무를 보리수나무로 제대로 인식한 적도 없었기에 손으로 보리수나무 열매의 이름을 정확히 기록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날 귀로 보리똥이라는 말을 듣고 눈으로 나무의 열매를 보는 순간, 보리똥, 뻐리똥과 보리수나무의 열매가 한 줄로 단박에 꿰어졌다.
보리수나무는 아주 귀한 나무는 아니다. 웬만한 산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당장 나는 오늘 오후 보리수나무를 보기 위해 인왕산에 올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참 뻔질나게 드나들던 사무실의 뒷산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턴 주말이면 먼 산을 다닌다는 핑계로 꾀가 나서 자주 오르지 못했던 터였다.
사직공원으로 해서 오르니 산사나무, 산뽕나무, 층층나무, 산수유, 작살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특히 팥배나무가 빨간 열매를 하늘로 곧추 세우며 활짝 서 있었다. 이윽고 범바위 근처에 도착하니 작은 보리수나무가 반갑게 서 있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잎 뒷면이 은회색의 빛이 반짝거려 멀리서도 구별이 되는 나무이다. 혹 뻐리똥이 있나 싶어 샅샅이 훑어보았다. 야박한 서울 인심을 반영한 결과일까. 겨우 하나가 마지막으로 간신히 달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꼭 나뭇잎만한 크기의 책이다. 현진오 박사가 쓴 <필드가이드 꽃>. 보리수나무가 나오는 161쪽을 펼치고 책에 적힌 대로 읽으며 나무에게 물어보았다. 보리수나무는 바람을 빌어 자신의 인적 사항에 대한 나의 질문에 속 시원히 대답해 주었다.
"산과 들에 흔하게 자란다. 줄기는 가지가 많이 갈라지며, 가시가 난다. 맞나요?"
"……(끄떡끄떡)!"
"잎은 가을에 떨어지며 도피침형 또는 넓은 달걀 모양으로 길이 3~4센티미터, 폭 1.2~2.5센티미터이다. 잎 앞면은 은빛에서 녹색으로 변하고 뒷면은 은빛이 나는 흰색이다. 맞습니까?"
"……(끄떡끄떡)!"
"꽃은 암수딴그루로 피며 잎겨드랑이에서 1~5개씩 달리고 은빛이 난다. 꽃받침통은 꽃잎처럼 보이며 끝이 4갈래로 갈라지고, 길이 5~7밀리미터, 안쪽은 노란색에서 갈색으로 변한다. 수술은 4개이고 암술은 1개다. 맞습니까?"
……(끄떡끄떡)!"
"열매는 장과이며 둥글거나 타원형. 길이 6~8밀리미터, 여름과 가을에 붉게 익고, 맛이 좋다. 맞습니까?"
……(끄떡끄떡)!"
▲ 보리수나무 열매, 제주도 한라산. ⓒ이굴기 |
▲ 인왕산의 보리수나무.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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