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주제가 뚜렷해 비교적 일관되게 전달되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청준이 '작가노트'에서 밝혔듯 이 책은 사회적 혼란, 빈곤과 고통을 일소하고 모두가 행복한 천국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5.16 군사정변 이후 1970년대까지 이어진 개발독재 하의 경제개발 계획과 새마을 운동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이자, 공동체의 선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협력에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정치의 본질과 역할, 리더와 구성원의 관계, 이상향 건설의 방안 등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제목에서 보듯 아마 가장 큰 메시지는 지도자가 제시하는 이상향의 비전이 구성원들의 자유나 행복을 배반할 수 있다는 역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묻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행복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만 해당되는가?
필자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하면서 진정한 사랑의 본질과 그 힘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두 가지 문제란 먼저 '당신들'로 상징되는 주체 중심 사랑의 배타성이다. 이것은 즉각 상대주의 관점에서 유가의 인(仁)과 서(恕)를 비판한 <장자>의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필자는 차이나 타자에 대한 존중보다는 타자를 품으려 할수록 그를 속박하고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나르시시즘의 본질에 더 초점을 맞추려 한다.
다른 하나의 논점은 '천국'으로 대표되는 이상적 가치의 문제이다. 만약 천국이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낙토가 될 것인가가 질문의 초점이다. 두 문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숭고한 명분을 내건 사랑의 강요가 가져올 폐해에 대해 생각하면서 바람직한 사랑의 본질과 인간관계의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사랑과 자유로, 작가가 강조하듯 자유에 스며드는 사랑이 궁극적인 천국의 길처럼 제시되지만 그것이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2. '당신들'의 사랑: 에로스의 본질
▲ <향연>(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이제이북스 |
하지만 에로스는 나르시시즘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구조상 자기애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칸트가 윤리의 준칙으로 정언적 선의지에 대한 복종만을 내세우면서 정념적인 것을 배제한 것도 그 때문이고, 키에르케고르가 에로스를 자기도취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현기증이라고 비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인간에게 사랑은 아주 중요한 화합의 원천임에는 분명하지만, 나르시시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무조건 사랑은 억압이 될 수 있다.
<장자>의 '지락'편에는 노나라 임금과 바닷새의 우화가 나온다. 어느 날 궁궐에 바닷새 한 마리가 날아들자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새장에 들이고 술과 고기를 주고 음악을 들려주며 극진히 대접하지만 결국 새는 죽고 만다. 장자는 이를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고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이 우화는 주체가 베푸는 선행과 사랑이 타자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자크 라캉은 나르시시즘에 기반을 둔 에로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하는 것은 결국 상상적 수준에서 구현되는 우리 자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에로스는 진정으로 나와 마주한 타자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선과 이상적 가치를 지향하지만 결국 상대를 구속하고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전임 주 원장은 에로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문둥이들의 낙토를 만들려는 거인의 그림자는 그 후의 모든 원장들에게도 짙게 드리워진다. 버림받고 멸시받는 문둥이들을 위해 완벽한 낙토를 만들겠다는 이상이 점점 더 소록도 자체를 아름답게 꾸미고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아집으로 바뀌면서, 시설이 늘어갈 때마다 낙토는 '지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원장의 열정과 헌신에 감동하며 그를 칭송하던 나환자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원장에게 등을 돌리고 결국 원장을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는데, 동상으로 상징되는 '당신의 사랑'은 결국 나환자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억압의 상징이다.
새로 부임한 조 원장은 절대 동상을 세우지 않으며, 철저하게 나환자들의 협조와 동의를 얻어 함께 낙토 건설을 하겠다고 권총에 대고 맹세하지만 원장과 나환자의 반목과 냉소는 운명처럼 되풀이되며 좌절을 안긴다. 이것은 조 원장의 헌신이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에로스의 한계 때문이다. 조 원장이 낙토에 매진하면 할수록 나환자들은 그 속에서 조 원장만의 또 다른 동상을 본다. 사랑이 진정으로 타자와 공존을 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상호주체적 관계 속에서 보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부정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조 원장의 낙토는 여전히 그 자신의 낙토일 뿐이다.
"원장님이 아무리 섬사람들을 생각하고 섬을 위해 노고를 바치고 계셨다 해도 원장님은 결국 그 섬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사실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원장님께서 꾸미고자 하신 섬사람들의 낙토가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공동의 천국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392쪽)
조 원장에게 보낸 상욱의 편지는 왜 조 원장의 헌신과 열정이 여전히 '당신들의 사랑'일 수밖에 없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에로스는 내 욕망을 중심으로 타자의 욕망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3. '천국'은 가능한가?
▲ <당신들의 천국>(이청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배신이라는 단어는 나환자들이 원장으로 대표되는 타지 사람을 배신한다는 것 뿐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를 배신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나환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황 장로의 말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맘 깊은 곳에 각자 자기 나름의 동상을 지을 꿈을 지니고 있으며"(343쪽), 그렇게 하는 한 각자 자신의 자유를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환자들은 이미 육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몸이라 그들이 아무리 물질적 풍요를 달성하더라도 이들을 낙인찍는 천형적인 저주와 결핍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결핍은 어떤 물질적 욕구를 통해서는 해소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말처럼 에로스의 본성은 더 완전하고 더 선한 것에 대한 갈망이기도 한데, 이것은 에로스의 속성으로 이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신이 짊어진 동상이 순수하게 내 존재 실현이 아니라 이상화된 가치에 의해 인도되는 한 그것은 반드시 또 다른 소외된 욕망으로 주체를 인도하는 함정이 된다. 마치 1차 마을 공동체 건설에 성공한 주 원장이 더 나은 낙토를 위해 멈추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욕망만 추구하다 보면 그것이 새로운 미움과 갈등의 불씨가 되고,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결핍을 느끼게 된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에로스는 방책과 풍부함을 대변하는 신 포로스와 궁핍과 가난함을 상징하는 여성 페니아의 자식이기 때문에 늘 아름다운 것을 얻으려고 계책을 꾸미고 결핍과 함께 살기 마련이다. (<향연> 128 쪽 참조)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늘 '~다른 대상에 대한 욕망'이며, 끝없는 순환 속에서 절대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욕망이 계속되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결핍을 완전히 채우려는 헛된 환상 때문이다. 이 환상이 나르시시즘을 끝없는 이상향에 대한 열망으로 승화시키는 원인이다. 자아의 나르시시즘이 투영된 천국은 실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으며, 주체의 이기적 자존심과 탐욕을 위한 미끼 역할만 담당하게 된다. 이상적 낙토는 나르시시즘이 기대는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상화된 가치가 인간의 눈을 멀게 하면서 끝없는 탐욕의 악순환 속에서 결국 파멸로 인도하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에서도 볼 수 있다.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자 악마와 계약을 한 도리언 그레이는, 모든 사람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으며 불사의 삶을 누리지만 점점 공허감이 커져간다. 어느 날 그는 젊고 예쁜 배우 시빌 베인을 보고 한 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도리언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는 여배우 베인의 이미지에 반한 것으로, 실은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정념에 현혹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시빌 베인이 도리언 그레이의 사랑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냉담함과 멸시로 바뀐 데서 알 수 있다. 영원한 불사와 완벽을 꿈꾸는 도리언 그레이는 통제되지 않고 무한을 향해 질주하는 이상적 나르시시즘의 위험성과 공허함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진정한 사랑은 나르시시즘의 맹목성과 상상적 이상의 굴레를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라캉의 표현을 빌면 '주체의 궁핍'을 통해 존재의 진리에 이르는 사랑의 모습이다. 사랑은 결국 텅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 장로가 결국 최종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사랑, 즉 "빼앗음이 아니라 베푸는 길이라서 이긴 자와 진 자가 없이 모두 함께 이기는 길"(349쪽)이 바로 그런 사랑이다.
4. 사랑을 통한 존재 회복과 보편성의 실현
라캉은 '에로스는 상상적 소외에 불과하며 자아와 존재의 틈을 알지 못하는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에로스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타자에게 자신의 이상을 투영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쉽게 공격성이나 적대감으로 변질 될 수 있다. 에로스는 외양상 타인을 향한 무한한 헌신이나 배려처럼 표출되지만, 결국은 자신의 결여를 채우고 나르시시즘이 그려내는 이상적 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달리 진정한 사랑은 언어와 이상화된 이미지를 벗어나는 실존 자체를 겨냥한다. 사랑이 생기는 것은 어떤 결여 때문인데 이 결여는 궁극적으로는 '존재 결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존재 결여를 어떤 대상에 대한 결핍이나 타자의 인정 욕망과 혼동하는 것이 에로스이다. 맥락은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철학자들이 분석하고 강조한 것처럼 존재의 본성은 '무'(nothing)에 가깝다. 존재란 규정할 수 없고, 언어나 이미지로 제한할 수 없는데, 이것이 무한한 실존적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존재의 모순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존재의 결여, 즉 부정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향해 열렬한 구애를 하는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자신 속에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음을 일깨워 준다. 바로 존재에 대한 열정으로서 소외되지 않은 사랑의 참모습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성은 존재를 텅 빈 '무로부터'(ex-nihilo)로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존재를 철저하게 비워내고 자아의 이기심을 부정할 때만 가능하다. 라캉은 이를 분석의 끝에 도달하는 '주체의 궁핍'으로 정의한다. 주체의 궁핍이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 회복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다.
그리고 주체의 궁핍은 내 존재의 회복 뿐 아니라 타자를 향한 열린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타자를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는 도구나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타자로 인정하는 것이 '주체 궁핍'의 선행조건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결여를 인정할 때만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의 궁핍을 실현할 수 있다. 사랑은 타자의 타자성과 욕망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태도로, 차이나 관용의 철학보다 타자에 대한 태도에서 더 근본적이다. 주체의 궁핍을 떠안는 사랑은 타자 자체도 빈 존재로서 사랑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르시시즘에서 출발하는 이타성이나 이상화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이웃사랑의 개념과 상당히 통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에로스적 사랑과 구별되는 이웃사랑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연애는 대상에 의해 규정되고, 우정 역시 대상에 의하여 규정된다. 다만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사랑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의 이웃은 곧 모든 사람이기 때문에 대상에서 모든 차별이 제거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에는 어떤 구체적인 특정 차별 규정도 없다는 것으로 인지될 수 있다. 이것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랑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최고의 완전성이 아닐까." (<사랑의 역사>(임춘갑 옮김, 치우 펴냄), 76 쪽)
중요한 것은 이웃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이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내 정념을 만족시켜 주는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시 주체의 궁핍을 통해 지속될 수 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 원장의 이웃은 나환자들이지만 조 원장이 원장으로 남아 있는 한 나환자들은 영원히 그의 힘과 이타심에 좌우되는 그런 도구적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역시 더 이상 권력이나 지위도 없고 특별한 차이조차 없는 타자의 빈자리를 점할 필요가 있다. 이로부터 진정한 관계가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민간인 조백헌이 섬의 한 주민으로 돌아와 결혼식 주례사를 연습하는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고, 그것을 통해 보편성 실현도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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