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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물이 나타나 아래로 떨어진다!"

[꽃산행 꽃글·78] 울릉도 봉래폭포 앞에서

울릉도 봉래 폭포 앞에서

산에 가서 골짜기로 올라갈 때 폭포 하나 만나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인들 저런 절벽 하나 가지고 있어 아찔한 단절과 후련한 굉음을 만들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그게 또 마냥 쉬운 일은 아니라서 지형과 지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산들도 나름의 특징과 우열이 있는 법일까. 폭포는 반드시 있을 만한 곳에서 있으면서 여름에는 웅장한 소리를 겨울에는 단호한 침묵을 빚어낸다.

어찌 되었든 용이 되어 승천하고픈 꿈을 가지고 이무기가 그 아래에서 웅크리듯 나 같은 조무래기가 세상사에 지쳐 산으로 찾아들 때 아연 절박하고 순결한 물줄기로 등짝을 후려칠 기세로 폭포는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서서 대원사 지나 새재 마을 지나 유평 마을도 지나 치밭목 산장으로 가다보면 돌연 허연 물의 꼬꾸제비를 만난다. 이름하여 무제치기 폭포.

여기에서 무제치기 폭포를 거론하는 것은 사연이 있다. 민음사 시절,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자서전인 <감독의 길>이란 책을 편집하다가 하이쿠 하나를 알게 되었다. '폭포'라는 제목이었다. 구로자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사실 작품으로서 그리 썩 뛰어난 시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읽자마자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물이 나타나 아래로 떨어진다."

이 하이쿠를 보았을 때의 이미지는 물사람이었다. 겨울이면 골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사람. 그 또한 물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잠시 얼음에 갇힌 답답한 눈사람 말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물사람. 자꾸 아래로아래로 떠나가는 물사람. 물몸에 물바지를 입고 물옷을 걸치고 물모자를 쓴 물사람.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사람. 장엄한 일생을 이끌고 바위 끝에 도달하여 물보라를 일으키며 일거에 떨어지는 물사람!

궁리출판의 탄생에 깊숙이 관여한 이 중에 김동광 형이 있다. 과학책을 좀 아는 이라면 이 형이 번역한 책을 한두 권은 읽었으리라. 만난 지 20여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처음 만날 때 그대로이다. 이 형과 1년에 한두 번 지리산에 갔다. 어느 해 대원사 지나 가랑잎초등학교 지나 지리산으로 향했다. 치밭목 산장에서 1박하고 천왕봉에 올랐다가 장터목에서 점심 먹고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일정이었다.

유평 마을에서 본격 산행을 시작해서 한 시간 반 정도 오르자 무제치기 폭포가 나타났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물줄기가 시원했다. 폭포 아래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팩소주를 뜯어 한 잔씩 걸쳤다. 이때 맑은 소주를 곱게 들이킨 형의 입에서 느닷없는 한 마디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캬아, 하늘에서 물이 나타나 아래로 떨어지네! 쥑인다!"

갑자기 나는 형이 방금 지리산 중봉에서 철퍼덕 떨어진 물사람이 아닌가 싶어 땀으로 얼룩진 형의 통통한 볼을 꼬집어보았다. 그리고 읍한 뒤 공손히 형의 빈잔을 채워주었던 적이 있었다.

▲ 울릉도 봉래 폭포. ⓒ이굴기

울릉도에서 대구야생화연구회 회원들과 처음 간 곳은 봉래 폭포였다. 도동항을 가로질러 성인봉으로 가는 중턱쯤에 있는 폭포였다. 이 폭포에서 발원한 물이 울릉도의 주요 항구인 저동, 도동의 식수원이라 했다. 무성한 왕호장근. 나무와 바위를 거침없이 타고 오르는 바위수국, 등수국이 좌우에 빽빽하다. 폭포에 이를 때까지 우산고로쇠, 섬단풍나무, 풍게나무, 섬잣나무, 굴거리나무 등의 나무와 독활, 도둑놈의갈고리, 노랑물봉선, 섬꼬리풀, 공작고사리, 물엉겅퀴, 섬바디나물, 섬쑥부쟁이,일색고사리, 눈개승마 등의 야생화를 관찰했다.

폭포는 우렁찼다. 작은 섬이라지만 3단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외려 울릉도라서 그 소리는 더 대단한 것 같았다. 사진을 찍고, 또 누군가 찍어달라는 사진을 찍어주는 가운데 이곳에서 기념사진 코너를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하루 영업을 걷고 있었다. 크게 뽑은 견본 사진을 걷고 나무의자를 치우고 나무 간판을 가게 안으로 넣고 가게 문을 닫았다. 할아버지는 떠들썩한 우리 일행은 거들떠도 아니 보고 폭포를 한번 우러러 본 뒤 내려갔다. 구부정한 등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물보라가 시원하게 얼굴과 팔뚝을 가리지 않고 피부에 내려앉는 가운데 벤치에 앉았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사위가 고즈넉해지고 이제 곧 밤이 몰려올 태세였다, 그래도 폭포의 물줄기는 그 위세가 조금도 줄어들려고 하질 않았다. 폭포는 하늘에서 나타난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니 하늘에 어디 밤낮이 있으랴. 밤과 낮이란 지상에 붙박힌 가련한 자들한테나 적용되는 현상일 뿐이다. 조금도 변함없는 폭포를 바라보는데 여러 생각이 몰려왔다. 지리산의 무제치기, 볼이 통통한 김동광 형, 구로자와 감독이 아낀다는 하이쿠, 그리고 내일부터 울릉도에서 만날 식물들.

고개를 아래로 돌리니 굴거리나무, 헛개나무, 왕작살나무 등이 보이고 섬단풍나무가 묵묵히 부복하고 있었다. 저녁 바람에 살랑이는 그 뾰족뾰족한 잎들을 보면서 '폭포'에 빗댄 짧은 글 하나를 지어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들이 섬단풍나무 가지에 붙들려 있구나."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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