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글을 읽고 음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을 통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른바 활동적이고 주체적인 사유의 비판적 철학함을 지향하는, 그리하여 사고의 열려있는 철학함을 의미한다. 철학은 고정된 닫힌 체계를 수동적인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며 언제나 비판으로부터 열려있는 살아 움직이는 활동이다. 영원한 이데아를 동경하는 천상의 철학은 땅으로 내려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물질적 기반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포착하는 철학이 굳어진 채로 있다면, 그 사유의 힘은 현실의 운동을 파악하는 데 무력할 것이다.
▲ <어린 왕자>(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민지 옮김, 인디고 펴냄). ⓒ인디고 |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중요한 것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 친구 목소리는 어떠니?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그 친구도 나비를 수집하니?"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 애는 몇 살이지? 형제는 몇 명이니? 몸무게는? 아버지의 수입은 얼마지?"라고 묻는다. 그리고는 그걸로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앉아 있는 아주 멋진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을 떠올리지 못한다. "저는 오늘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 "와! 정말 멋지겠네!"라고 외친다.
이렇듯 어른들은 양화시키는 사유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양적인 것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것, 즉 질적인 것들을 사유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위 글에 나오듯이 어른들은 중요한 것인 아이의 목소리, 놀이, 취미를 묻지 않으며, 단지 양화시킬 수 있는 것, 즉 '몇 살, 몇 명, 몸무게, 아버지의 수입'만을 묻는다. 그리고 집의 아름다움까지도 '10만 프랑'으로 환원시켜야만 이해하고 있다. 이 책은 질적인 것을 배제시키는 어른들의 사유 형식을 비판한다.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른들이란 다 그렇다. 하지만 어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 물론 인생을 이해할 줄 아는 우리들은 숫자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어른들은 이 문장이 얼마나 정확히 자신의 모습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양화시켜서 사유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양화가 배제시킨 질적인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린 왕자가 만난 사업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어린 왕자는 별을 보고 있는 사업가를 만난다. 그리고 말한다. "그 별을 가지고 뭘 하는 건데요?" 사업가는 말한다. "뭘 하긴 소유하는 거지"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은 어린 왕자는 별을 소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묻는다. 그 사업가는 역시나 "부자가 되는 거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별을 "세어보고 또 계산하고" 하는 것이라고 사업가는 대답한다. 사업가의 말을 들은 어린 왕자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군"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양적인 사유만을 삶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어른들은 사물에 대하여 그것을 계산의 대상으로, 소유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결국 어른들에게 소유는 계산 가능성으로 환원된다.
"나는 내 꽃과 화산들을 소유함으로써 그것들에게 유익함을 주죠"
어린 왕자는 사업가가 말하는 소유의 의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린 왕자는 사업가가 별을 대하는 방식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있으며 매일 물을 주고 화산도 청소를 해 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꽃과 화산들을 소유함으로써 그것들에게 유익함을 주죠. 그런데 아저씨는 별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 것 같네요."
고전을 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사유의 의미, 그 원리를 좀 더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어린 왕자와 사업가의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 간극이 매우 크다. 사업가는 대상을 양화시키고 그것을 소유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에 어린 왕자는 자연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자연에 유익함을 주는 것으로 소유의 의미를 찾고 있다. 여기서 어른들의 사고의 핵심은 모든 것을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포섭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계산 가능성으로서의 정신적 형식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원리는 사물을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만들며,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맞춰 측정할 수 있도록 단순한 지배의 '객체'로 그 지위를 낮춘다.
이러한 사유의 원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사유양식으로 굳어진다. 계산 가능한 것만을 중요한 가치로 간주하는 어른들은 대상을 질(質)을 상실한 자연으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어른들은 단순히 양(量)에 의해 분할된 '소재'로 자연을 격하시킨다. 그리고는 자연에 대해 전능한 자아로 군림하면서 자연을 단순한 '가짐'으로 간주한다. 나아가 어른들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소유 가능성/불가능성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 소유는 계산 가능성에 그 척도가 있기 때문에, 화폐가 절대적인 매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어린 왕자의 소유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린 왕자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 유익함이라는 '관계'를 통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자연을 단순히 인간의 활동을 위한 매개로 전락시키지 않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자기 '매개로서'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과 자연 간 관계의 붕괴는 인간의 감각에 소유라는 감각만이 들어있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즉 인간의 감각은 자신을 대상화하여 풍부해지는 범위만큼 감각의 대상이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과 인간의 화해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선 모든 감각을 소유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사회에 대한 지양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감각과 대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고, 인간과 자연의 존재론적 관계 맺음에서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적 몸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제에서 인간의 감각은 대상을 통해 풍부해지며, 동시에 인간의 감각이 풍부해지는 만큼 자연 또한 억압에서 풀려나 서로가 통일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은 단순한 인간의 지배 대상이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에서 부활하면 자연은 인간에게 병을 치유하는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 미학적 측면에서 인간의 감각이 발전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길들인다'는 게 뭐야?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강조는 필자) 여우와 어린 왕자의 대화에서 잘 드러나듯이 길들인다는 것은 어떤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나라는 개념은 너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길들이는 관계는 변증법적 관계이다.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결여된 존재이므로 나르키소스로 살아갈 수 없으며 나는 너를, 너는 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이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 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또한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만 더 발전되고 풍요로워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기존의 나를 부정하고 상대방도 기존의 자신을 부정하면서 자신에게 결여된 것, 즉 필요한 것을 채워간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이 바로 사랑(eros)의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교환가치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배울 시간조차 없어. 그들은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거야." 이렇듯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의 지난한 인내심을 통하여 서로의 결여된 부분을 채워주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소중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여우가 말하듯이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사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편리하게 화폐로 교환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사고가 어른들의 양화적인 사고이며, 이러한 사고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까지도 양화시키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친구이든, 자연이든 말이다.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는 모든 것을 사물화시키고 그것을 양적인 가치, 즉 교환가치로 현상되는 화폐로만 매개하려는 사고와 행동 양식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제공하고 있다. 사물화 시킨다는 것은 그 대상의 유기체적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사물화는 먼저 그 대상의 존재를 파괴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가 사물화될 수 있다는 것은 나라는 유기체는 파괴되고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물건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이보다는 어른들이 이러한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때문에 <어린 왕자>는 정작 그들은 보고 있지 않은 어른들을 위한 책이다.
오늘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금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어린 왕자가 얘기하듯이 '수량화'가 지배적인 사고의 척도이며, 이러한 사고는 도구적 이성으로 세상을 재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양식 속에서 우리는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 즉 길들이는 관계를 놓치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수량적이고 추상화된 관계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때문에 지배적인 사고의 반성은 더욱 긴급하다. 재미있게도 '책을 탐독하다'라는 독일어 'verschlingen'은 원래 '집어삼키다', '먹어치우다'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정신과 육체의 용기에 철학은 정신의 음식으로, 음식은 육체의 음식으로 소화되고 채워진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먹을 수 있는 대상을 먹어야 산다. 입으로 삼킬 수 있고 소화시킬 수 있고 몸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고 잘 배설되어야 그것은 음식일 수 있다. 정신의 음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배고픔은 우리가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을 음미하는 과정을 통해, 즉 비판적 사유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어른들은 몸에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강제로 먹으라고 아이들에게 주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어른들의 눈으로 본 세상에 대한 해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정신에 소화되지 않는 것을 먹으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더 긴급한 것은 어린 왕자가 비판하는 어른들의 사고 유형을 전환하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고전을 읽는 인간들에게 그 대상은 영원한 것이나 고정된 해석으로 머물지 않는다. 고전이 고전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되어 고전이 아니라, 오래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점. 여전히 고전이라는 대상은 주체와 결합되어 작용한다. 따라서 대상은 언제나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 관계에 대한 성찰은 어린이보다 어른들에게 먼저 요구된다.
아래의 인용문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상상하지 않는 어른들, 고정된 사고로 세상의 질적인 것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어른들, 모든 것을 양적인 것으로만 환원시키고, 그리하여 보다 풍요로운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문득 가슴에 자신의 삶의 공허함을 채우는 어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리고 생각해 보라. 양이 그 꽃을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그러면 거기에 따라 모든 게 변하는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되리라….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어른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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