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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2013년 서울'로 오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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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2013년 서울'로 오게 하라!

[프레시안 books] 김진호의 <리부팅 바울>

리부팅, 아니 '디폴트 세팅' 바꾸기

주류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의 신학이 예수의 신학과 얼마나 일치했는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지난한 논쟁을 벌여왔다. 물론 결론이 어떻게 나건 그들의 방법론은 한결같이 바울이 남긴 '말/글'(word) 속에서 그가 얼마나 예수의 가르침과 전승들에 의존하고 있는가, 또는 그의 신학적 이해와 강조점이 예수의 그것과 얼마나 비슷한가를 따지는 식으로 일관되었다. 문제는 그 '말/글'이 '컨텍스트'(context)가 제거된, 마치 '순수한 텍스트'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와 바울, 그 서로 다른 텍스트들의 성격을 각기 규정하고 있는 텍스트의 세계성·정치성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실천과 역사적 바울의 실천이 서로 어떻게 연결 혹은 단절되고 있는지를 그리 철저하게 탐구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컨텍스트' 없는 '말/글'에 한정된 바울 연구의 경향은 오늘날 사상계에서 이른바 '바울로의 전회'(turn to Paul)를 이끌고 있는 유럽의 좌파 철학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 철학자들은 애초부터 바울을 역사적 예수와 연결시켜 탐구하지도, 그렇다고 바울을 후대의 기독교 전통 속에 위치시켜 다루지도 않겠다는 것을 이미 밝힌 상태에서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의 '바울'론(論)은 역사적 구체성이 부족해 보인다.

가령 "기본적으로 나는 바울을 결코 실제로 종교와 결부시킨 적이 없다. 내가 오랫동안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종교에 관심이 있어서이거나 아니면 어떤 신앙, 또는 심지어 반-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대신에 자신은 그저 "진리라는 주제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주체의 실존을 다중적 존재의 순수한 우연에 종속시키는 동시에 사건의 우발적 차원에 종속시킬 수 있는 주체 이론을 재-정립하는 것"을 과제로 삼을 뿐이라고 말하는 바디우(Alain Badiou), 그리고 바울의 '그리스도'(christos)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 '메시아'(messiah)에 다름 아니라고 전제하며, 자신의 목표는 "단지 겸허하게, 그리고 보다 문헌학적으로 크리스토스, 즉 '메시아'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에 한정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아감벤(Giorgio Agamben). 우리 시대 그 어떤 신학자들보다 매력적인 바울의 초상을 그려낸 저 유럽의 뛰어난 철학자들에게서조차 바울의 '말/글'이 구체적으로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화(textualization)되었는가의 문제는 예외 없이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의 언어를 현대철학의 언어로 번안하는 데 집중할 뿐, 정작 바울이 자신의 언어를 지속적으로 현실화하기 위해, 자신이 인식한 사건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이 관심 갖는 것은 바울의 '관념'이나 '개념'이지 그의 '현장'과 '실천'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일부 성서학자들이 바울의 텍스트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컨텍스트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려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텍스트 바깥의 배경적인 요소로만 취급되고 있을 뿐, 여전히 텍스트의 구성 과정에서 바울을 둘러싼 다양한 컨텍스트들이 어떻게 텍스트의 내적인 형식과 내용 안으로 새겨지게 되었는가를 치밀하게 묻진 않고 있다. 사이드(Edward Said)가 말했듯이, "텍스트의 세계성이나 상황성, 즉 역사적 우발성과 감각적 특수성을 갖는 사건으로서의 '텍스트'의 지위는, 의미를 전달하고 생산하는 텍스트의 필수불가결한 능력으로 텍스트 안에 통합되어 있다."(The World, the Text and the Critic, 1983) 따라서 바울의 사상을 묻는 방식도 단순히 '말/글'에 담긴 철학적 개념의 참신함을 밝히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구성 과정 전체를 규정하고 있는 바울의 투쟁 현장과 바울이 놓여 있던 역사적 조건들, 요컨대 그의 텍스트 안에 구성되어 있는 텍스트의 '세계성' 및 '정치성'을 보다 철저하게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 <리부팅 바울>(김진호 지음, 삼인 펴냄). ⓒ삼인
민중신학자 김진호의 <리부팅 바울>(삼인 펴냄)은 바로 그렇게 '말/글'에 집착하며 "무시간적이고 무현장적인 바울의 사상과 신학"을 추상화하는 데 몰두해온 기존의 바울 해석 방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예수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고 배척되는 이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의 신앙적 실천의 관점에서" 바울 연구를 전면적으로 '리부팅'(re-booting)하고 있는 대담한 작품이다. 저자는 책의 기획을 '리부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리부팅'은 저자의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다 보여주기엔 다소 약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그동안 바울의 신학담론, 특히 그 핵심에 있는 '의인론'(義認論, discourse of Justification by faith)과 관련하여 연구자들의 사고 일체를 거의 자동적으로 규정해 왔던 바울 연구의 '기본값 설정'(default setting)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로 보는 게 더 적절하겠다. 현재의 디폴트 세팅을 무효화시키거나 새로운 값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아무리 컴퓨터를 자주 리부팅한다 해도 연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기존의 정형화되고 관습화된 연구 방식은 되풀이되고 말테니까.

바울, 2013년의 '서울'로 돌아오다

저자가 글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목표를 갖고 저술되었다. 첫째는 그동안 신학담론 내부에서 제출된 바울 연구의 성과들에 대해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응답하려는 시도이다. 예컨대, 북미의 급진적 성향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출된 일련의 "바울과 로마제국" 연구 성과, 그리고 1세기 유대교와 바울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전면적으로 재고하게 만든 "바울신학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성과를 저자는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덧붙여 고대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의 다양한 종교적·역사적 전통들을 현대의 '유대주의'를 중심으로 모조리 회수해온 '홀로코스트 신학', 그것이 갖는 정치적·학문적 위험성을 줄곧 비판하면서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을 추구해온 이들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둘째는 바디우와 아감벤으로 대표되는 동시대 유럽 철학자들의 바울 연구가 던져준 통찰들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바울과 유대교의 대립구도를 '보편주의 대 특수주의'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바디우의 '바울'론(論)이 신학계의 바울 연구사에서 합리주의적 전통과 깊은 친화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역설적인 긴장을 통해 존재하는 '메시아적 시간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아감벤의 '바울'론은 묵시-종말론 연구로 대표되는 반합리주의 전통과 더 친화적이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분석에 기초하여 바디우와 아감벤이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현상과 오늘날 난민과 유민·이민 현상을 파행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유럽을 유비시키면서 바울을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한 사건적 주체"(바디우) 또는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아감벤)로 재발견한 점만큼은 높이 평가하되, 둘 다 바울의 언술과 실천이 갖는 '현장성'을 놓치고 있는 점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울의 '종말론'과 '의인론'을 서로 연계시키는 통합적인 해석을 지향한다.

셋째로 지구화 시대 주변부의 거대도시 서울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바울의 현장투쟁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컨텍스트화(contextualization)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갈라디아, 로마 등의 1세기 지중해 연안 대도시들에서 활동했던 바울의 행적과 말을 추적하면서 그의 민중신학적 실천 현장을 재현한다. 그리고 그 바울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소환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대도시에서 바울이 벌인 싸움은 지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주변부의 메트로폴리탄인 서울에서 민중신학이 고민하는 문제와 중첩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서울에 귀속된 부속도시들과 촌락들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서울'이라고 명명하는데, '도시국가 서울'이 '21세기적'으로 지구화하고 있는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라면, 바울이 활동했던 도시들은 '1세기적'으로 지구화하던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이었다는 점에서 두 세계는 매우 닮았다고 한다. 특히 시공간의 경계들을 무자비하게 뒤흔들며 무수한 이들의 '귀속성'(attribution)을 심각하게 교란시켜버린 지구화된 세계의 문제를 바울의 텍스트와 민중신학자의 텍스트가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하나만 살펴보자. 저자는 제5장에서 바울의 편지 <데살로니가전서>의 배경이 되는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 데살로니가와 21세기의 서울을 '제국의 질서'에 편입된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의 관점에서 겹쳐 읽기를 시도한다. '데살로니가'가 로마제국과 황제의 권력에 충성스러웠던 것처럼 오늘날 서울은 지구제국의 질서에 유난히도 충성스러운 도시이다. 하여 예수라는 이를 새로운 왕으로 섬기는 자들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바울의 동료들을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던 '황제의 질서'하의 데살로니가처럼, '도시국가 서울' 역시 '자본의 질서'에 거스르는 이들을 무참하게 죽여 나가고 있다. 자본의 추방령에 내몰려 스스로를 살해한 쌍용자동차의 해고자와 그 가족들, 몸이 불이 되어 잿더미가 된 용산 남일당의 철거민들, 공장의 혹독한 질서 속에서 살해당한 삼성반도체 사업장의 젊은 여성노동자 등등. 그런 주검들이 도시 가도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고, 그 죽음을 기리며 메시아를 갈망하는 이들이 혹독한 자본의 질서 속에서 겨우겨우 숨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점에서, 바울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데살로니가와 민중신학자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서울, 그 둘은 닮아도 너무나 닮은 세계이다.

남일당 터에서 서울역 광장으로 행진하는 용산 참사 유족들. ⓒ프레시안(최형락)

이처럼 신학계 내부에서 나타난 유대교나 바울에 관한 새로운 해석의 흐름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지점, 그리고 동시대 유럽 철학자들의 바울 관련 저작들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날카롭게 비평하는 대목도 인문학 독자들에게 꽤 매력적으로 다가오겠지만, 그래도 역시 이 책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원로 민중신학자 김창락의 '의인론'을 재평가하고 그의 논의를 보충하고 수정하여 그 논지의 완성도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 있다. 특히 내가 보기에 김진호가 재해석한 바울의 '의인론'은 개인에 관한 구원론을 넘어 사회 구조의 변혁을 목표로 한 '정의론'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보여주듯이, 의인론이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갈라디아의 회당 사회나 로마의 회당 사회에서 바울이 직면했던 갈등의 구체적인 성격, 그러한 갈등적 상황들을 '문제화'할 때 드러나는 바울의 문제의식, 그리고 의인론을 통해 궁극적인 변혁의 초점으로 맞춰지는 대상 등, 그 모든 논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바울의 의인론은 오늘날의 '정의론'의 논점들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의인론'은 '개인 구원론'이 아니라, '사회 정의론'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의(義)'에 관해 해석하기를, 그것은 인간에게 나누어짐을 통해 실제로 인간의 인격이 변화되는 모종의 '특질'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가톨릭의 해석에 도전한 인물이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하느님의 의'를, 그것에 의해 믿게 되는 자가 의로운 자로 인정받아 살게 되는 "수동적 의로움"이라고 이해했다. 마치 법정에서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을 때 얻게 된 그런 "법적인 신분 상태"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당사자의 실제적인 인격이나 자질은 전혀 의롭지 않은데, 재판장이 그에겐 죄가 없고 그는 이제 의롭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주었을 때, 그렇게 수동적으로 주체에게 전가되는 그런 의로운 신분 말이다. 그래서 루터 이래로 개신교의 핵심적 교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줄여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칭의, 稱義) 또는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의인, 義認)로 표현되어 왔다. 하지만 루터 이후로 '하느님의 의'가 변화시키는 대상이 인간의 인격이나 품성인지, 아니면 법정적인 맥락에서 그들의 신분적 상태인지를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기나긴 논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두 해석 모두 의인론의 적용 대상을 '개인들'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이 바울의 의인론이 제기된 역사적 현장성을 간과하고 있다. 민중신학적 의인론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김창락에 따르면, 바울이 사용했던 원어, 즉 '디카이오'(dikaioō), '~을 정의롭게 하다'라는 타동사의 의미는 개별적인 인간 주체에 한정하여 단순히 그/녀의 인격이나 상태를 변화시키는 행위로 이해될 수 없다. 바울이 차용한 '디카이오'는 히브리성서의 문맥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행해진 사회적 죄악과 구조적 불의(不義)로부터 그 피해자들이 온전히 해방되는, 그런 총체적인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사건을 지시할 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의인론에서 핵심적인 표현인 '의(義)', 즉 '디카이오쉬네'(디카이오의 명사형)가 변화시키고자 겨냥했던 대상은 단순히 인간의 품성적인 자질도, 그렇다고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영적인 신분만도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행위를 제약하고 있는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상황 그 자체가 의로워져야 했고, 또 그래야만 당사자들의 내면세계나 신분적 상태도 같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바울이 말하는 '디카이오쉬네'는 각각의 개인들이 놓여 있는 사회의 구조적 조건 자체를 '정의롭게 변혁'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카이오쉬네'는 제대로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의(義)'가 아니라 '정의(正義, justice)'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바디우가 자신의 책에서 자주 다루었던, 저 유명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를 김진호는 김창락의 견해를 쫒아 바울의 '인권투쟁' 담론으로 해석한다. 기존의 신학자들과 민중신학자들의 해석이 명확히 갈라지는 지점이다. 일부 신학자들의 경우 바울의 의인론이 유대인과 헬라인의 각기 다른 정체성을 '차이'로서 적극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체성 안에서 통일하기 위해 제출된 담론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김진호는 의인론의 역사적 현장, 즉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안에서 불거졌던 문제는 단순히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인족 간의 갈등이 아니라, 명백히 제도화된 문화적 가치 패턴에 내장된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에 따른 '무시' 혹은 비(非)인정의 문제였고, 따라서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새로운 범주의 문화적 표현이나 담론을 생산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음을 보여주었다.

저자에 따르면, 바울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 차별이 없다."라고 선언할 때, 그가 말한 '헬라인'은 단순히 헬레니즘 문화를 표상하는 종족 이름이나 이스라엘인들의 관점에서 모든 이방인들에 대한 상징적 기표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회당 바깥의 사회에서 헬라인은 품격 있는 부(富), 품격 있는 신분을 상징하는 문화적 고상함을 함의하는 표현이었는지 몰라도, 바울의 의인론 텍스트에서 헬라인은 '죄인'의 표상, 추함을 상징하고 있는 부류(여성, 노예)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헬라인'은 사회경제적 차별과 문화적 차별 사이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 내지는 '구조적 집단'(structural group)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때의 '헬라인'은 로마제국의 정복전쟁의 종료와 더불어 노예경제가 붕괴된 여파로 대도시에 급격히 유입되기 시작했던, 특히 생존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 교포 사회로 들어오고자 '개종'까지 불사했던 '방출 노예들'을 가리킨다.

물론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유대주의자들'의 눈에 그들은 회당이 요구하는 기부금을 낼 처지도 못됐고 품격 있는 면모도 갖추지 못한 하층노예들에 불과했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은 다른 종류의 이방인들, 즉 사회적으로 품위 있는 지위의 사람(남성)들과 '헬라인'을 차별하고, 회당 체제 안에서 그들의 권리를 제한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의 차별에 맞서 '헬라인들'에게 은혜를 선사하는 새로운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게 된 것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내부에서 자행되던 사회적 지위에 따른 '무시'과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1세기판 '사회 정의론'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저자의 해석대로라면, 바울 시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 안에서 헬라인의 존재는 문화적·종족적 정체성의 범주를 넘어 구조화된 '사회적 지위'를 담지하게 된다. 적절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지 못한 당시 사회에서 '헬라인'으로 표상되는 도시사회의 약자들에게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은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최후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여 회당이 요구하는 대로 '이스라엘 종교'로 개종까지 했건만, 정작 그들에게 돌아온 대접은 회당 바깥의 사회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차별과 배제였다. 이렇듯 '헬라인'은 회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에 구조적으로 배제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평등한 동료로서의 지위를 거부당했다. 헬라인을 향한 '유대주의자들'의 구조적 배제는 참여의 평등의 거부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적 불의'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불평등을 겪고 있던 '방출 노예들'은 '개종'을 하고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로 인해 그곳에서도 배제와 차별을 당했고, 이는 결국 그들의 정치적·종교적 불평등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헬라인의 정치적·종교적 불평등은 또 다시 이들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시켰다. 따라서 바울은 '의인론'을 통해 '헬라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던 '유대주의자들'의 의인론을 신학적으로 해체하고, 동시에 헬라인들이 그러한 하느님의 '정의'를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바울은 회당 사회 안에서 배제되어 있던 헬라인들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임'(에클레시아, 교회)에 참여시킴으로써 회당 안에서 작동하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직시하고 비판할 수 있게 함과 더불어 진정한 정치적·종교적 평등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정치적·종교적 평등은 성만찬에서 먹을 것을 함께 나누는 행위를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으로 다시 이어지게 했다. 이렇듯 바울의 '의인론'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종교적 불평등 간의 구조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헬라인들이 직면했던 회당의 구조적 불의는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넘어, 회당의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 완벽한 참여자로서의 '지위'를 보장받는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바울의 '의인론'은 바로 그 불의한 사회적 구조를 정의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권리 없는 자들의 권리"와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요구하는 신학적 '인권담론'이자 '사회 정의론'으로 제출된 것이고, 또 그러한 목적에 부응하는 구체적인 제도의 개혁을 수반했다.

'헬라인'을 위한 우리의 책임에 관하여

이 책의 주장대로 바울이 만났던 회당 안의 '헬라인들'이 당시 도시사회에서 하층노동자로 분류되는 '방출 노예'로서 경제적 영역에서 '분배'의 불평등을 이미 경험했고, 회당 안의 정치적·종교적 영역에서도 동등한 참여를 위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헬라인들'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놓인 이들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한국의 노동시장에는 최저임금, 노동관계 기본법, 사회보험 등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말 그대로 경제적 시장소득(임금)의 차원에서부터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에 놓여 있으며, 아울러 노동법과 사회보험, 소득과세, 사회보장, 고용관련 보호로부터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 아닌 노동자, 즉 '비공식적인' 노동자들이다.

이들 비공식 노동자는 법적으로든 관행상으로든 국가 노동법규, 소득세, 사회보호, 기타 고용관련 혜택들(해고 시 사전통지, 퇴직금, 유급 휴가, 유급 병가 등)을 전혀 받지 못한다.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고용되어 있는 일자리 자체가 공공기관에 노출되지 않거나, 노동시장 규제에 노출되지 않는 일자리이기 때문이다. 가령, 비법인 기업에 의한 고용형태, 가사도우미와 같이 가구 내에서의 고용형태, 일하는 장소가 사용자 기업의 건물 밖에 있는 고용형태, 그 밖에 다양한 이유로 인해 노동법규가 적용되지 않거나 집행되지 않는 그런 일자리 말이다.

2012년 말에 발표된 한국노동연구원의 <비공식 취업 연구 보고서>(이병희 외 지음)에 따르면, 국제노동기구(ILO)의 정의에 따라 분류했을 때 한국의 비공식 노동자는 지난 2011년 기준 704만 4000명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40.2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공식 노동자들이 경제적 소득 차원에서의 불평등은 물론이고, 노동관계법이나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조차 놓여 있다는 것은 이들이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는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이러한 비공식 노동이 의도했든 안 했든 사회적 권리와 사회적 연대의 토대를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노동법, 사회보험, 법정 복지 수혜, 그리고 소득과세의 자격 등에서 비공식 노동자들의 권리와 책임이 배제될수록 노동계급 내부의 연대나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연대와 같은 정치적 복지동맹의 형성은 물론이고, 시민으로서 조세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면서 사회적 연대의 제도화 과정에 참여하게 될 가능성 역시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경제적 불평등(최저임금 미달)과 사회적 불평등(사회보험 배제)이 정치적 불평등(과세책임 부재)으로 이어지게 되고, 다시 그러한 정치적 불평등이 경제적 불평등(자산축적의 불가능성)과 사회복지 불평등(차상위계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회당 안에서 "유대인다운 삶"을 사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헬라인·여성·노예 등)의 관계는 곧 이들이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렇게 회당 안에서 서로 다른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각기 다른 규칙이 적용되며, 목적을 달성하려는 노력에 동원될 수 있는 자원의 종류와 양 또한 불평등하게 배분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회당을 지배하고 있었던 '유대주의자들'의 권력이 구조적인 토대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회당의 공식적인 통치자들이 의존하고 있는 회당의 구조적 지배력은 그들 소수에 의해 일방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사회 안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구조화'된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불의한 사회적 구조가 생산·재생산되는 데에는 객관적·물질적 조건만이 아니라 그 조건에서 구성원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취하는 행동패턴도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바울의 의인론은 단순히 회당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소수의 특정한 '유대주의자들'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헬라인·여성노예라는 범주가 단순히 '개인적 정체성'의 표식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로서 구조화되고 있는 회당 내부의 현실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 그 불의한 구조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은 것이 된다.

오늘날 우리 역시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헬라인'을 향한 정치적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이를테면, 비공식 노동자들의 불평등·차별·배제를 야기하고 유지하는 한국 노동시장의 거대한 구조에 다른 시민들이 소비자로서건 사용자로서건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일조하고 있는 이상 저들이 겪는 '불의'에 공동의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리부팅 바울>에선 그런 측면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지만, 나는 바울이 '의인론'을 제기한 궁극적인 목적은 일상적인 혹은 정상적이고 관습적인 행동을 통해 불의한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다수의 대중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바울의 '의인론'은 "차별이 없음"을 단지 신학적으로 선언하는 수준을 넘어, "모두가 하나임"을 깨닫고 경험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 위한 '연대성'(solidarity)의 프로젝트였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의인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듯이,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해결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의 주체화 과정을 제약하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요인들을 폭로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불의한 차별과 배제를 발생시키는 구조화 과정에 연루된 다른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을 제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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