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하면서 이택광의 세미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그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펴냄)가 출간될 즈음이었고, 수업 시간에는 청강생이 많았다. 3시부터 진행되는 수업에 늘 4시가 좀 넘으면 헐레벌떡 들어오던 노(老)학생이 있었다. 첫 수업이라 간단한 자기소개와 관심사를 말하는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이원석)는 자신이 수잔 손택을 영혼을 바칠 만큼 좋아한다고 말했다.
같은 학기, 다른 학교에서 진행되는 서동진의 세미나 수업이 있었다. 학점 교류로 수업을 들으러 다녔는데. 저녁 6시가 넘어서 시작되는 수업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말(言)로 작두 타기'를 보여주는 서동진의 수업 안내가 끝나고 대학원생끼리 발제를 정리하는 타이밍. 그때 이원석이 나타났다. 거기서 그는 수업을 진행하는 문화연구학과의 박사과정생이었고, 약간의 여유가 있어보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본 것은 2011년 우석훈이 출간했던 <나와 너의 사회과학>(김영사 펴냄)강의의 후속으로 진행된 워크숍에서였다. '카이로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던 그는 이런저런 비평을 참가자들에게 날리기보다는, 늘 '디오니소스 주연'의 장에서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좌파'적 관점에서 '인문학', '사회과학'을 말하는 많은 장소에 그가 있었다. 2000년대 중순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한동안 형성되었던 '좌파 이론 팬덤'이 흘러 다니던 장소에 늘 이원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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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011년까지를 복기해보면 참 많은 '인문좌파'가 있었다. '잉문좌파'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이론을, 오직 이론만을 사랑하여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며 논쟁을 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젝이나 바디우, 랑시에르, 고진의 말로 한국 사회를 연역했다. 아니 '인문좌파'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어떠한 '사태의 징후'를 한국 사회에서 발견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그와 더불어 많은 '사회과학도'가 있었다. '사회과악'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그들은 몇 명의 경영학의 구루 같은 잘 나가는 최장집, 샤츠슈나이더, 로버트 달, 칼 슈미트 등의 정치학자·사회학자의 이론을 달달 꿰고 거기에 몇 가지 방법론적 '테크닉'을 갖춰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까칠한, 다소는 악의적으로 보일만한 코멘트를 했다. 마찬가지로 블로그와 트위터, 페이스북에서는 그들 사이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 '논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블로그는 너무 길고 고루한 매체가 된 것 같고, 왕년의 '20대 논객'이나 '젊은 좌파'들은 페이스북에서 아는 이들끼리만 지식을 공유하거나, 140자 이내로 단말마의 '비명'을 트윗하기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정태의 연재('논객 시대' ☞바로 가기)에서 언급했던 '논객'들의 포스가 서서히 사그라져 가고, '20대 논객'의 시대 또한 몇 명의 '위너'들만 살아남은 상황에서 닫히는 와중에, 더 이상 스스로의 장을 창출하지 못하는 상황. 지금이 얼추 그 어디쯤인 것 같다.
따져보면 지금 소개하려는 책의 저자 이원석은 같은 시기를 비슷한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보냈지만, 사실은 별 상관없는 포지션이었던 것 같다. '이방인'이 더 적절해 보일 수도 있다. '20대 논객'이 왕성할 때 30대로서 그들의 논쟁을 구경했고, 그들이 한참 따라가려 했던 '선생'들의 강의를 찾아다녔지만, 내게 그는 '혁명'에 대해 사유하고 싶었던 젊은 좌파들보다 더 근본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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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사기극>(이원석 지음, 북바이북 펴냄). ⓒ북바이북 |
어쩌면 '철 지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미 서동진의 역작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펴냄)가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서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를 신나게 규탄한지 박사논문 출간시점으로 보면 거의 10년, 책 출간으로 보면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정책 패키지나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1번 신자유주의)가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두드려 맞고, 그러한 1번 신자유주의를 개인들에게 이식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 혹은 통치술로서의 신자유주의(2번 신자유주의)가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뽀록'이 나버린 상황. 그리고 거기에 다양한 계급적 바탕과 산업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 이원석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바닥' 사람들에게는 다 끝난 이야기의 '설거지'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원석이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제 그동안 열광적으로 소비되어 왔던 자기계발 상품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씩 그러한 평가 작업들이 제출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힘이 되도록 시야를 밝혀줄 본격적인 작업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7쪽)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본격적인 작업'이 아직 전개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이원석은 충실히 그 본격적인 작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본격적인 작업은 자기계발서 그 자체의 계보를 살피는 것(자기계발의 역사), 그리고 자기계발서의 트렌드의 내용과 그것이 겨냥하는 것(자기계발의 담론, 자기계발의 형식, 자기계발의 주체)에 대한 분석이 된다. 서동진의 논의와 이원석의 논의는 다르다. 서동진의 논의가 '자기계발'의 경제,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토대'에 대한 논의 또는 푸코의 '에피스테메'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계발 담론의 모습을 살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원석은 자기계발 담론 자체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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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릿>(론다 번 지음, 김우열 옮김, 살림Biz 펴냄). ⓒ살림Biz |
그리고 두 가지 패러다임 외에도 최근 부상하는 심리학 이론을 차용한(실제 검증과는 상관없이) '심리적 패러다임'의 사례들도 살핀다. 예컨대 힐링 담론이나 긍정 심리학 등이다.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과 상관없이 자기계발 담론이 겨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기계발의 초점은 자기에 있다. 그냥 해라. 불가능은 없다. 나는 할 수 있어 등 온갖 슬로건으로 포장된 이 복음의 핵심은 자기 가능성에 대한 무한 신뢰이다. 자기계발의 복음은 자기의 극대화 가능성을 신뢰한다."(159쪽)
더불어 자기계발 담론이 초창기 세일즈맨을 위한 것에서 출발하여, 어린이에게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는 것에 대해 한탄하듯 이원석은 지적한다.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는 얼마나 '끔찍한가?" 그리고 저자는 권한다. 자기계발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자고. "자기계발을 하지 않더라도 취업할 수 있고, 결혼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문제는 사라진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적 안전망을 새로이 구축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 여기에서 개인이 담당할 수 있는 몫은 극히 미소하다. 모두가 알듯이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개인의 합보다 크다. 따라서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가 필요하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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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의 '본격적인 작업'에서 나오는 탄탄한 분석을 통해 도출되는 논의는 '옳다'. 자기계발서에 푹 빠져있던 사람들이 꼼꼼하게 이 책을 읽는다면 생각을 바꿔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당하다. 사회적으로 발생한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를 '상호호혜'를 통해 극복하자는 주장은 어떻게 봐도 정당하다. 그렇게 '옳고', '정당'하나 뭔가 부족하고 심심하다. 나는 그게 불만이다.
먼저 나는 자기계발서를 누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읽는지가 궁금하다. 사실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내용을 진실로 '복음'으로 처음부터 믿고 읽는 이는 별로 없다. 개신교에 '회심'하고 입교하는 이들이 겪게 되는 '원체험'처럼, 많은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이나 자기계발서의 팬들은 그러한 과정을 겪게 된다. 다른 경우, '회의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서 자기계발서를 잡는다. 1/45P6의 확률임을 알면서도 일주일의 평화를 위해 '로또'를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행위'에 대한 경험 분석이 누락된 자기계발서의 '담론 그 자체'를 추적하는 것은 실제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의 반쪽짜리 분석이 되게 마련인 것만 같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중독자도 아닐 수 있다.
두 번째로 손쉽게 '사회구조'의 탓으로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를 해석하면서 또 다른 한 편에서 실용적인 내용으로 오락가락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도 불만이다. 어차피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사회라고 말하면서("자기계발은 이제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216쪽))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를 규탄하고, 그러면서도 황당하지 않은 수준의 '괜찮은 자기계발서'를 선별해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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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동진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
그럴 때 두 가지의 대안이 나오게 되는데, 1)구조를 다시 더 신나게 욕하기, 2)새로운 '주체화'의 방식을 찾기. 좌파들은 두 가지 길에서 갈팡질팡하곤 했다. 이원석의 책에서도 그 딜레마가 느껴진다. 아주 실용적인 이야기로 가기에는 윤리적으로 자신이 없고, 구조만 털자니 별 이야기가 아닌 게 되어, 결과적으로 어정쩡한 '괜찮은 자기계발서' 고르기와, '근본적인 자기계발 사회에서 탈피하자'는 구호가 결합된 말로 종결되게 된다.
게다가 자기계발서의 내용에서 미래에 대한 허무맹랑한 '정신승리'적인 것들을 제외한다면, 예전의 '윤리적 패러다임'이 그랬듯 '시간관리'나 특정 실용 기술들을 가르쳐주는 책들은 그 자체로도 꽤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제목에 달린 '사기극'은 뭔가 과도하며 얻어맞기 딱 좋다. 자기계발서든 뭐든 문제에 대한 직시와 그것을 풀기위한 준비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세상 소식을 잊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따르든 거스르든 무시하든 스스로의 자기-신뢰/자기-배려를 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이다. '자존감'이 있어야 '좋은 시민'이 되고 '좋은 공동체'의 구성원도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저자가 그 딜레마에서 조금 빠져나오길 기대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자기계발하는 사회'에 예외가 없다는 저자의 진술을 차용해보자면, 이제 필요한 것은 '자기계발 담론'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그 담론에서 튕겨져 나오는 사람들의 경험과 스토리인 것 같다. 어차피 "사회가 개인의 합보다 크다" 하더라도 개인들의 선택이 바뀌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사회가 바뀐다. 그 부분을 늘 '거대한 구조'를 강조하던 '젊은 좌파'들은 간과했고, 개인의 의식적인 것들의 변화와 개개인에게 새겨진 주체화의 내용들을 강조할 때마다 '자유주의자'라 규탄했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구체적일 수가 없었다. 주체사상파처럼 이론적으로 취약했지만 '개인'에게 뭔가를 어필하는 것들에 대해 무력했던 게 하루 이틀이었던가? 물론 그와 상관없이도 점차 자신의 구체적 삶의 조건들 때문에 '논객'의 장에서 빠져나왔지만…
이원석의 <거대한 사기극>은 구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자기계발 담론의 역사와 형식, 그리고 내용과 주체를 모두 살폈다는 점에서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에 대한 꼼꼼한 종결자적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더 나와야 하는 논의는, 지금 필요한 논의는, 아무래도 그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이 자빠져서 자기계발을 포기하게 되는 이야기 혹은 거기서 다른 경로로 삶을 틀어버리는 이야기, 그리고 그 흐름들이 묶여서 유의미한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이 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아니면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좋은 시민'의 태도를 만들어내게 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든가. 또한 필요하다면 경영학의 담론이든, 심리학의 담론이든 해석과 대안적 담론을 위해 차용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개념의 '전유', '재전유'라는 실천을 가장 답답한 형태로 비슷한 학문 간에만 쓸 필요는 없지 않나? "꺅"하면서 비명만 지르고 끝나는 납량특집과 그에 따른 만족감은 이제 시효가 끝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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