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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꽃으로 치장한 특별한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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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꽃으로 치장한 특별한 논

[꽃산행 꽃글·75] 물옥잠표 쌀

물옥잠표 쌀

날씨 참 좋다. 싱그러운 들판을 걸어가면 햇빛의 알갱이가 잘 여문 벼 이삭처럼 하늘에서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 같다.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삽상한 공기들. 이 툭진 기운을 짓기 위해 올 여름이 그렇게 뜨거웠나 보다. 이제 고슬고슬한 고두밥을 제대로 익혀놓고 굴뚝을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여름의 열기도 그렇게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 수생, 염생 식물을 공부하러 석모도에 갔었다. 섬이라고 염전이나 낚시터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함초와 해홍나물이 자라고 있는 해변 가운데로 들어서니 옛날 바다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광활한 모래밭이 펼쳐졌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도가 철썩이던 곳이었나 보다.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패었고 바짝 마른 모래는 바다물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함초. 퉁퉁마디라고도 한다. ⓒ이굴기

▲ 해홍나물. ⓒ이굴기

갈대와 억새가 빽빽하게 우거진 습지를 통과해 나왔다. 문득 아스팔트길이 나타나고 해수욕장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민머리해수욕장이라고 했다. 좌우로 음식점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 길의 입구에 논이 있고 논에는 벼들이 빽빽이 자라고 있었다. 논에는 물은 거의 말랐고 이제 곧 알곡이 누렇게 익을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벼는 아주 대표적인 수생 식물이다.

벼는 이제 높이 자람은 다 이룩한 것일까. 제가 원했던 키에 도달한 모양이다. 모두들 어깨를 맞추면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부피 자람도 어느 정도 다 이룩한 것 같았다. 벼의 줄기가 더 이상 통통해질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열매를 맵씨 있게 단도리해야 할 때이다. 고독한 벼의 나락이 알차게 여무는 중!

머지않아 이 들판은 황금물결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빽빽이 자라야 할 벼가 뜻밖의 습격을 받아 논 한 귀퉁이가 허전해 보이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 시골에서 이맘때쯤이면 흔히 보던 풍경이 떠올랐다.

이맘때쯤이라 하면 장마철을 뜻한다. 우리 시골에도 마을 앞에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완대국민학교에 가려고 아침에 동청에 모여 동무들과 신작로를 걸어가다 보면 간밤의 세찬 바람에 논의 벼들이 여지없이 휘청휘청 쓰러진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도미노 현상처럼 한쪽에서 무너진 벼들이 곁에 있는 벼들과 차례로 함께 넘어진 것이었다. 그때 드러난 벼의 가는 발목은 어린 눈에도 퍽 가냘팠다.

아무 잘못 없이 무럭무럭 자라는 벼들을 쓰러뜨리는 건 장마철의 강한 바람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어느 해 먹이를 찾아내려온 것일까. 노루 한 마리가 마을로 내려왔다가 사람들 눈에 띄었다. 사람들에게 쫓긴 노루가 논으로 뛰어들었다. 노루는 밀림 같은 벼 사이를 돌아다니고, 그 노루를 잡겠다고 사람들이 포위를 하고. 그래서 논의 여기저기가 움푹줌푹 꺼져들었다.

민머리해수욕장 근처 논에서 움푹 꺼진 벼들을 바라보는데 그 노루 생각이 났다. 노루는 작대기로 쫓아내기라도 하겠지만 이곳에 있는 논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가까이 가서 보는데 상황이 파악되었다. 이 논의 벼들을 그렇게 자빠뜨린 건 바람도 노루도 아니었다. 논 가운데를 파고들어 자라고 있는 건 물옥잠이었다.

▲ 물옥잠. ⓒ이굴기

논에는 많은 것이 자란다. 농부가 벼를 심는다고 벼만 사는 게 아니다. 공중을 나는 새가 떨어뜨려 심는 것도 있고 바람이 와서 심어주는 것도 있다. 허다한 곤충이 슬쩍 물어다 놓고 기르는 것도 있다. 올미, 보풀, 벗풀, 소귀나물 등이 벼와 함께 논에서 자란다.

벼가 어느 정도 자랄 때 논을 보면 밀짚모자를 쓰고 일하시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결같이 고랑을 따라가며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를 솎아내는 중이었다. 그것은 피라고 하는 식물이다. 그것은 벼보다 훨씬 잘 자라서 키도 엄청 컸다. 벼와 피가 경쟁하면 늘 피가 이겼다. 생긴 모습은 벼하고 아주 비슷했지만 피는 농부가 원하는 곡식을 맺어주지를 아니 했다. 벼의 성장을 방해하는 피는 농부들의 손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눈에 띄는 대로 여지없이 뽑히고 마는 것이다.

벼와 함께 동반 성장해 가는 물옥잠. 석모도의 어느 논에서 만난 물옥잠은 한두 포기가 아니었다. 아예 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논두렁으로 내려가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물옥잠은 아주 예쁜 야생화였다. 이제 물은 모두 마르고 알곡이 익기만을 기다리는 논. 사방의 논은 적막했고 벼의 다리는 제법 통통했고 낱알이 차곡차곡 여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하, 둔한 나에게도 퍼뜩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논에서는 농약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다. 아마 피나 잡초를 겨냥해서 농약을 뿌렸다면 이곳은 부작용이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런 약을 치지 않고 유기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에 이런 광경이 연출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운 좋은 피가 훤칠하게 자라고 있는 게 보였다.

논 가운데 의젓하게 자라는 물옥잠. 보랏빛의 물옥잠은 애타는 농심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힘껏 피어 있었다. 이 진동하는 꽃의 향기를 맡으며 이 논의 곡식들은 참 향기롭게 그리고 아주 활짝 여물겠다는 짐작이 들었다.

사진을 여러 방 찍고 논두렁에서 나오는데 얕은 꾀 하나가 들었다. 나중 이 논에서 수확하는 쌀은 참 특별하겠다. 물옥잠이 차지하는 면적만큼 소출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물옥잠과 함께 익은 벼라면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 자라는 식물도 있다는데 이는 물옥잠의 향기를 먹고 자란 쌀이지 않겠는가.

같은 소금이라도 함초가 들어간 함초소금은 보통 소금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고 한다. 석모도에서 생산한 물옥잠표 쌀! 그런 상표를 걸고 출하한다면 조금 비싸더라도 이 쌀을 우선적으로 사먹겠다는 결심을 예쁜 물옥잠한테 했다.

▲ 물옥잠과 벼가 함께 자라고 있는 논.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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