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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언제 '인문학만이 살 길'이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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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언제 '인문학만이 살 길'이라 했나!

[이명현의 '사이홀릭']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

서평을 정기적으로 쓰다 보니 지인들과 만나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비슷한 시기에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자인하는 지인 두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과학책을 읽었는데 지은이가 너무 쉽게 써서 술술 잘 읽혔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책을 쓴 지은이 본인도 내게 자신이 쓴 책 중에서 제일 쉽게 풀어서 쓴 책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독자들에게 그의 노력이 전해진 모양이다.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장대익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이 바로 그 책이다.

'진화학자 장대익의 인간 탐구'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나도 찬찬히 읽었다. 쉽게 풀어서 쓴 책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들이 '읽기 쉽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쓴 책임에 틀림이 없다. 그만큼 친절한 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쉬운'이라는 수식어보다는 '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결코 쉬운 것들이 아니다. 다만 장대익이 친절하게 정성껏 풀어서 썼을 뿐이다.

▲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장대익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을 '잘' 쓴 책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이렇다. 어려운 내용이나 쟁점을 억지 비유를 통해서 우회하지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로 직접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쟁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글쓰기 방식이다. 장대익은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도. 그것들을 명징한 언어로 이 책에서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강력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잘' 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융합이라는 단어는 넘쳐나지만 정작 무엇을 융합하고 어떻게 융합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면 융합 전문가들조차도 입을 다물거나 어색한 비유를 늘어놓기 일쑤다. 융합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면 너무나 빤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민망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융합에 대해서 별다른 인식도 없이 연구비나 타 볼 요량으로 구호처럼 외치고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재천 교수와 함께 '통섭'이라는 단어를 퍼트린 장본인인 장대익 교수의 진면목은 융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제 '전공'이 무엇이냐고 묻는 시대는 가고 '질문'이 무엇인가를 묻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이해하는 제너럴리스트냐, 한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스페셜리스트냐'를 구분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통섭적 시야를 가진 전문가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오고 있다. 지식의 순수혈통을 따지는 시대에서 잡종적 지식을 선호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나는 이것이 바로 미래 지식의 메가트렌드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부 수준에서 융합 교육의 최고 목표는 학생들의 태도 변화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융합적 태도를 가르치고 익히게 하는 일이야말로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융합을 과정으로 파악하고 태도를 가르치는 일이라고 한다면, 학부 수준의 융합은 가능한 것이 되고 도전적인 과제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융합을 직접 실천하고 있는 현장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한때 각 대학마다 유행처럼 자유전공학부를 개설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교의 자유전공학부는 경영대학원이나 의치전문대학원을 진학하기 위한 입시학원이 되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만 원래의 목표를 실천해가고 있는 듯하다. 그 중심에 장대익이 있다. 이 책에서 융합과 통섭을 운운하는 그의 글이 허황된 구호가 아닌 힘찬 비전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나는 과학 그 자체보다 '인문적 과학'과 '과학적 인문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여러 전공과 여러 연구소를 전전(?)한 그의 떠돌이 전력이야말로 장대익 식 융합과 통섭을 꽃피우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신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경계인이자 잡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을 일상의 언어로 '잘' 그리고 '쉽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 곳곳에는 그런 그의 여정의 향기가 묻어있다.

지금은 위안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동의한다. 나 자신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심술이 난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무력하게 지켜만 보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힐링이니 멘토니 하는 이름의 행위들이 판을 치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위안이 필요하니 힐링이나 멘토가 긴급한 처방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결국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고통스러운 성찰이 이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인문학의 위기니 이공계의 위기니 하는 말들을 한다. 그게 어디 좁은 학문 분야만의 위기이겠는가. 사회 전체의 위기일 것이다. 정체성의 위기일 것이고 힐링이나 멘토로는 잠시도 덮어놓을 수 없는 삶의 가치의 위기일 것이다. 구호뿐인 이공계 지원 대책이 우리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다. 동상이몽 속에서 잡스의 말을 오독해서 오직 인문학이 살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장대익은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에서 우회하지 않고 명징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그(스티브 잡스)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핵심 교양이었다. 그는 역사와 철학이 하이테크와 만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핵심 교양이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핵심 교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적어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에 관한 당대 최고의 신빙성 있는 지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최고의 핵심 교양은 되레 과학이어야 한다. 수많은 유형의 지식 중에서 현대 과학만큼 합리적 절차를 통해 얻어진 신뢰할 만한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잡스가 언급한 '리버럴 아트'는 현재 대학의 학문 체계에서도 '인문학'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심지어 예술까지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사용자의 경험과 인간의 직관을 강조한 잡스의 고백은 '테크놀로지와 인문학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의 결합'을 뜻하는 것이라고 읽혀야 한다."

잡스가 말한 핵심 교양이 과학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결국 우리 시대의 성찰의 화두는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의 결합'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화두를 움켜지고 치열하게 사고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시대와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비판적으로 합리적인 성찰의 과정을 거친다면 우리들의 삶은 더 풍성해질 것이고 행복해질 것이다. 그 출발선에 핵심 교양 즉 과학이 있다.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의 결합'에 대한 장대익 식 대답을 제시한 책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과학이 답할 시간이다.'라고 선언하고 이 책을 통해서 과학이 우리 시대에 대해서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의 친절한 가이드를 받으면서 삶 속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는 과학을 외면하지 않고 거기에 말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과학은 당신에게 멋지게 화답할 것이다.

"과학은 컴퓨터나 인공위성 같은 도구나 주변기기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이고 생각이다. 그 성능과 위력은 두말할 것 없다. 과학은 우리에게 단순한 도구 이상이다. 남들보다 풍부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오늘부터라도 과학에 말을 걸어야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과 낭만, 상상의 언어로 화답할 것이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인간에 대하여 과학이 말해준 것들>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로 부러웠다. 생각하는 것을 글로 옮기는 행위는 번역과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복잡한 과학적 사고 행위의 결과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이 부러웠다. 이야기해야 할 것과 강조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정리하는 능력이 또 부러웠다. 글을 '잘' 쓰는 그가 한없이 부러웠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무나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무작정 그를 따라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는 사실을 숨기고 쉽지 않다. 이렇게 매혹적인 글쓰기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는 것도 고백하련다. 하지만 나는 장대익을 따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멘토로 삼지도 않을 작정이다. 그의 글을 내 힐링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만 독자로서 동지로서, 그의 글을 흠모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그의 글의 향기 속에 젖어있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장대익과 그의 글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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