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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라, 모든 것을 잊으라!"

[꽃산행 꽃글·74] 무궁화 그늘에서

무궁화 그늘에서

여기는 강화도 고려산. 전날에는 석모도에서 수생, 염생 식물을 관찰하고 오늘은 역사의 흔적이 가득한 이 야트막한 산을 올랐다. 미꾸지 고개에서 올라 정상을 거쳐 백련사까지 일주하는 코스였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라 좌우로 서해 바다가 훤히 보이고 북으로 눈길을 돌리면 손에 잡힐 듯 북한 땅이 보였다. 아마 강화도 건너 해협처럼 잘록한 바다 가운데로 눈에 보이지 않는 NLL이 걸쳐져 있을 것이다.

진달래 피는 때면 장관을 이룬다는 정상을 거쳐 내려오는 길. 작은 연못이 있었다. 고려산 오련지(五蓮池)라 했다. 팻말에 이르기를.

"이 산에는 크고 작은 5개의 오정(五井)이 있다. 이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4세기에 축조되어 정상의 큰 연못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으로 사용되었고 작은 연못 4개는 연개소문이 군사 훈련 시 말에 물을 먹이던 곳이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 4년 인도의 천축조사가 이곳 고려산에서 가람 터를 찾던 중 정상의 연못에 피어있는 5가지 색상의 연꽃을 따서 불심으로 날려 꽃이 떨어진 장소에 꽃 색깔에 따라 백색 연꽃이 떨어진 곳에 백련사를 흑색 연꽃은 흑련사를 적색은 적석사를 황색은 황련사로 지었으나 청색꽃은 조사가 원하는 곳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하, 참 좋다. 꽃잎을 바람에 날려 그 꽃잎이 점지하여 주는 곳에 불심 가득한 가람을 짓다니! 더구나 인도에서 온 스님이라니! 그 당시 우리하고 인도는 군사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명과 종교가 오고가는 관계였던 듯. 문득 고려산 정상 오르는 길에 만난 고인돌 군락도 그냥 마구잡이로 조성한 무덤이 아닐 것이란 혼자만의 추측이 들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오련지의 물맛은 볼 수가 없었다. 배낭에서 꺼낸 식어빠진 한 모금의 물로 목을 축이고 백련사로 내려오는 길. 죽 이어진 시멘트 포장길 옆에 작은 규모의 군사시설이 있었다. 녹슨 철조망 곁에 하얀 팻말이 함께 있었다. 아주 짧은 문장의 경고문은 한글과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는데 특히 영어는 모조리 붉은색이었다.

아치형의 콘테이너 막사 옆에 한 무더기 꽃이 피었다. 멀리서 볼 땐 흰 꽃잎이 도드라졌다. 목련꽃인가. 그래서 이런 노래를 흥얼거렸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목련이 아니라 무궁화꽃이었다. 따지고 보니 지금은 목련이 필 시기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의 식물학적 안목에 문제가 있는 듯. 목련처럼 전신을 덮고 시원하게 누워 편지를 읽을 만큼의 그늘을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움큼의 그늘은 발아래 돌 하나도 제대로 못 가리고 있었다.

흰색의 무궁화꽃. 흔한 무궁화가 아니라 변이종인 듯했다. 꽃도 꽃이었지만 철조망 옆의 팻말이 눈길을 붙들었다. 잊으라 했다. 그것도 모든 것을 잊으라 했다. 너무 멋진 말이 아닌가. 베르테르의 편지에 등장하면 아주 어울렸을 것 같은 문장.

물망초라는 꽃이 있다. 얕은 보라색의 앙증맞은 꽃이다. 발등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피어 저를 잊지 말아 달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꽃이다. 목련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핀다. 영어로는 NOT-FORGET-ME. 하지만 여기서는 FORGET EVERYTHING이라 했다. 이것으로 꽃 이름을 삼는다면 물망초를 뛰어넘을 것 같았다. 잊으라, 모든 것을 잊으라!

잊고 안 잊고는 생각이자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머리에 있나 가슴에 있나. 그것도 아니라면 발바닥에 있나. 어디에 있든 하나 분명한 것은 내 것인 것 같은 그것을 내가 어쩌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만나서 괴로운 것처럼 마음이나 생각도 그 원리가 똑 같다.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냥 잊어버리고!

이제 몇 걸음 안 가 꽃잎에서 비롯된 우람한 절, 백련사가 나타날 것이다. 옛사람들의 저 아름다웠던 여유를 이젠 어디에서 찾을까. 지금의 우리는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한 시대를 통과하는 중인 모양이다. 여기는 군사 시설, 그것도 무슨 대단한 비밀을 취급하는 장소인 듯했다. 주어를 연결시키니 시적인 모든 감흥은 사라지고 보안을 강조하는 냉정한 명령만이 녹슨 철조망 옆에 걸려 있었다.

"출입자는 모든 것을 잊을 것! FORGET EVERYTHING YOU DO HERE!"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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