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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후진적이라고?" 열도 청년의 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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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후진적이라고?" 열도 청년의 패기!

[프레시안 books]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

"미국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게 하려고 기지 제공이든 전쟁 협력이든 뭐든 단지 따를 수밖에 없는 극동의 모 '선진국'의 현상을 생각하면 '중국은 뒤처진 사회다'라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가 없다."(36쪽)

"입이 찢어져도 할 수가 없는" 이런 말을 하는 일본인은 많을 것이다. 이웃에 있는 모 '중진국'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선진국' 일본에서 왜 이런 말을 못하겠는가. 현대화 이론에 따르면 일본은 근대(현대)화에 성공한 모범적 사례고 중국은 실패한 나라였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는 자신의 문화를 과감하게 변화시키고 적극적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의회제도와 민주주의, 법제국가와 인권의식 그리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서양화, 근대화,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실현했기 때문에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이에 반해 중국은 과거엔 유구하고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였지만 그 거대한 전통에 속박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전형적인 나라였다. 이런 통념은 중국이 2010년에 이미 경제 규모에서 일본을 따라잡고 세계 2위의 대국으로 올라섰기 때문에 변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이 자유나 인권, 법치 관념이 확립되지 않은 비민주적 국가라는 식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념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 <중국화하는 일본>(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페이퍼로드
경제적으로 "잃어버린 20년"에 이은 3.11 동일본 대지진, 그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건으로 일본 사회의 위기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높긴 하지만, 일본의 1인당 GDP는 중국과 여전히 비교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일본이 중국처럼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바로 요나하 준(與那覇 潤)이라는 젊은 학자다. 올해 34세로 요코하마 태생인 그는 아이치현립대학교 일본문화학부 역사문화학과 준교수로 일본 근현대사 전공자다. 이런 주장을 담고 있는 책제목만 보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가 말하는 중국은 현대 중국이 아니라 송나라 왕조이다. 따라서 일본에 짝퉁이 넘쳐난다든지 일본이 중국에 점령당한다든지 공산화한다는 통속적인 뜻이 아니다.

<중국화하는 일본>(최종길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은 한마디로 "중국화"와 "에도(江戶)시대화"라는 키워드로 일본사를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부제가 "일본과 중국의 '문명의 충돌' 1천년사"이지만 크게 보면 일본사를 다룬 책이다. 알찬 내용도 없이 독자의 이목을 끌기 위한 제목을 단 책이 넘쳐나지만 이 책은 일본학계의 최신의 연구 성과를 기초로 진지한 주장을 담고 있으면서도 상당히 대중적이다. 일본의 대표적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예로 들어 서술하는 부분은 특히 흥미롭다. 2011년 출판 당시 일본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다고 한다. 중국에는 우리보다 약간 일찍 번역되었다. 주류 매체에서 크게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매체에서 다뤘고 작가가 베이징에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반응이 나쁘지 않다.

"중국화"는 그가 독창적으로 제시한 개념으로, "중국화"의 "중국"은 앞서 말했듯이 송나라 왕조다. 허나 현대 중국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중국은 송나라 때 근세(early modern)에 진입한 이후 전체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세계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근대화도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보면 중국화의 결과물이고, 역사도 냉전 이후가 아니라 송나라 때 이미 종언을 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율령제 등 당나라 이전의 제도에 대해서는 열심히 본받기 위해 견당사를 파견하는 노력을 했지만 송 이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간에 고다이고 천황이나 무로마치 막부의 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중국화"의 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600년이나 지난 에도시대(1603~1867)가 되어서야 중국과 전혀 다른 유형의 일본의 근세가 시작한다. 에도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긴 에도화"가 진행되다가 최근에 와서 "중국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중국화"의 전제가 된 "송대 이후 근세설"은 원래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이 1920년대에 주장한 학설이다. 그는 왜 북방민족이었던 금나라에 시달리다가 수도까지 남쪽으로 옮긴 약한 송나라를 중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왕조로 보았을까.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 봉건제 대신 군현제를 채택하여 황제의 일극 지배체제를 처음으로 확립했고, 사회 경제적으로 귀족제를 폐지하고 과거제를 통해 기회 균등하게 관료를 선발하고 시장경제가 발달하는 등 자유롭게 경쟁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동양의 근세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기된 송대 이후 근세설에 따르면 송나라는 요컨대 (준)국민(민족) 국가(=군현제 국가)라는 것이다. 동양이 근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근대세계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국민국가가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10세기의 송나라에서 성립된 동양의 초기 국민국가는 14세기의 조선, 17세기의 도쿠가와 막부에서 순차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교토학파의 이런 동양 근세설은 사실 서양의 패권에 맞선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설이다. 동양이라는 말도 원래 거대한 중국의 역사적 지위를 해소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에서 제기된 개념이다. 하지만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인 왕후이가 <현대 중국 사상의 흥기>에서 지적하듯이 서양보다 앞선 초기 근대성을 외부의 충격에서가 아니라 중국 내부에서 발견한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학술적 공헌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송나라가 초기 근대적 형태의 국민국가였다면 그 후의 제국이었던 원나라와 청나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다시 과거 국가 형태로 퇴보했다? 나이토 고난의 송대 이후 근세설은 이 점에 대해 답할 수 없었다. 요나하 준의 "중국화" 논의는 나이토 고난의 송대 이후 근세설을 기초로 하면서도 원나라를 미제국의 선구자, 명나라를 중국판 에도시대, 청나라를 중국화 사회의 궁극적 형태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요나하 준의 독특한 관점은 일본 역사학계의 여러 연구 성과에 힘입은 바 크지만 거기에 덧붙여 그가 오키나와(류큐) 출신인 사실이 혹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요나하의 나하(那覇)는 주지하다시피 오키나와의 한 지명이다. 그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풀어보면 "나하와 더불어 윤택해지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으로부터 여러 차례 배반당한, 일본의 모순,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모순이 집약된 비극의 땅이다. 류큐는 본래 독립된 왕국이었다가 1879년 일본의 한 현으로 전락하여 2차 대전 당시 참혹한 피해를 입고 미군의 관할로 넘어갔다가 1972년이 되어서야 미국에 의해 사사롭게 일본으로 넘겨진 아픈 역사를 간직한 땅이다. 일본 국토의 0.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땅에 주일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 배치된 채로 말이다. 2009년 54년 만에 겨우 자민당 일당 지배체제를 종식시키고 정권 교체에 성공한 민주당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몰락하고, 이내 다시 자민당 지배체제로 복귀한 일본 사회에 대해 요나하는 곳곳에서 냉소와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어떻게 일본이 중국보다 앞선 사회냐고 말이다.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교 이념에 입각해 황제에게 성인이 되어달라고 간청하는 것과 평화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취임 직후의 오바마에게 노벨평화상을 준 서방 행위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인가. 냉전 이후 미국의 일극 지배가 관철되고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유동하는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한 세계의 모습이 송나라의 모델에서 본질적으로 진보한 점이 무엇이냐고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전후 미국의 핵우산과 경제 성장의 약속이라는 공모관계 위에 세워져 있는 현대 일본이 '중국보다 앞선 사회'라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젊은 학자 요나하 준은 묻고 있다. ⓒAP=연합뉴스

물론 "중국화" 개념이 내포는 적고 외연이 넓기 때문에 지나치게 단순하고 포괄적이다. 일본 역사에 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도 볼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넘어갔지만, 중국 연구자로서 중국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의 개념을 중국에 적용하면 중국의 역사는 "중국화"의 경향과 "비중국화(다시 말하면 에도화)"하는 경향이 서로 길항하는 역사가 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진짜 중국이 따로 있고 짝퉁 중국이 따로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책은 서술의 중심이 일본사에 있고, 원래 일본의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그간의 서양화·현대화 논리에서 탈피해 일본 사회에 자극과 반성을 촉구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좌우 이념이나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해서 현실에 직면하려는 과감한 기백, 외래문화의 어설픈 수용을 통해 개혁하려는 것은 "부론 효과"(멜론처럼 큰 열매가 포도처럼 많이 열리길 기대한 이종교배가 포도처럼 작은 열매가 멜론처럼 조금 열리는 불행한 결과를 일으킨다는 의미)를 불러일으키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는 역사적 통찰, 중국을 하나의 방법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를 성찰하려는 요나하 준의 용기는 정말 소중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반적 견해만을 반복하는 것은 안전하지만 그 순간 사고는 정지되고 변화된 현실을 해석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상계에는 다케우치 요시미, 미조구치 유조 등 중국을 자신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반명제로 사고한 전통이 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이 "중국화"하였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고의 지평에서 중국적 척도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중국은 단지 서양의 '보편적' 기준으로 비판하는 대상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이게 과연 온당하고 균형 잡힌 역사적 태도인지 이 책은 우리에게 엄중히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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