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라고 하면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분들이 있다. 대구야생화연구회의 회원들이다. 이들이 1년에 서너 번 먼 산행을 하는데 이번 여름에는 울릉도행이다. 어쩌다 인연이 닿아 나도 그 말석에 따라 붙기로 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나로서는 동대구역에 9시, 포항에는 12시에 도착해야 하는 빠듯한 시간. KTX 타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한겨레>가 발끝에 걸렸다.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려는데 1면의 사진이 눈길을 붙들었다. 너무도 뻔한 정치인의 뻔뻔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녹슨 철길을 담은 사진에 이런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이틀 뒷면 한국전쟁 휴전 협정을 맺은 지 꼭 60년이 된다. 남북은 2007년 5월 17일 분단으로 끊어졌던 남과 북의 철길을 연결했다. 그날 서쪽에선 남쪽 열차가 경의선을 따라 휴전을 넘어 개성으로 올라갔고, 동쪽에선 북쪽 열차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제진역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2013년 7월 현재. 남과 북은 철길뿐 아니라 교류와 협력도 끊어졌다. 지난 16일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 동해북부선 제진역 철길은 검붉은 녹뿐만 아니라 칡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 신문 속의 칡넝쿨. ⓒ이굴기 |
바다는 그리 사납지 않았다. 뱃멀미 한번 없이 오후 4시 반쯤 도동항에 도착했다. 서둘러 도동 성당을 찾았다. 울릉도 도동 성당의 주임 신부님 또한 열렬한 꽃 애호가로서 대구야생화연구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저녁을 먹기 전에 성당 뒤편의 산을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산행 채비를 하는 동안 성당의 조그만 화단을 보니 능소화가 주렁주렁 피어 있다. 중국 원산의 덩굴성 식물. 줄기에 흡착근이 발달하여 다른 물체에 착 달라붙어 잘 기어오른다. 재미있는 건 줄기의 대칭성이다. 저 혼자 뿔뿔이 기어오를 법도 하건만 좌우로 정확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줄기 끝이 둘로 갈라진다. 마치 성당 제단의 촛대처럼!
▲ 능소화. ⓒ이굴기 |
육지와는 사뭇 다른 울릉도의 생태계. 이번 여행에서 울릉도는 무슨 꽃과 나무들을 우리에게 보여줄까. 울릉도는 육지와는 한 번도 연결된 적이 없이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섬이다. 따라서 식물상이 아주 특이하다. 울릉도에서만 서식하는 특산종이 많다. 가벼운 흥분과 함께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가파른 길을 올랐다.
작은 봉우리에 올랐더니 벌써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이곳은 섬개야광나무와 섬댕강나무의 군락지였다. 천연기념물 제51호였다. 하지만 절벽 능선이라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잎은 난형, 도란형 혹은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엽병과 탁엽이 있고 표면에는 털이 없거나 약간 있고 뒷면에는 털이 많으나 점차 없어진다. 꽃은 5~6월에 피고 백색이다"라는 섬개야광나무의 설명문으로 만족해야 했다.
섬개야광나무. 이 나무는 중국이나, 러시아, 서남아시아에는 흔히 자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로지 울릉도, 그것도 해안 절벽 지대, 더구나 서너 군데에서만 자라는 아주 귀한 식물이다. 그래서 멸종위기식물1급으로 지정된 식물이다. 꽃 피는 시기는 좀 늦었다고 하나 이번 여행에서 찾을 수가 없는 것일까.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참나리가 참 많이도 피어있는 절벽을 끼고 행남 등대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울릉도가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알아차리기라고 한 것일까. 덩굴식물들이 교목과 관목들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리고 칡넝쿨이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전봇대를 휘감아 오르고 있었다.
▲ 칡. ⓒ이굴기 |
전국 어디를 가나 흔히 보이는 칡넝쿨. 동해의 외딴섬 울릉도에서 칡넝쿨을 보니 아침에 보았던 신문 속의 칡넝쿨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칡넝쿨에 엮여 내처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칡덩쿨이 뻗어가네 / 골짜기로 뻗어가네 / 그 잎사귀 무성해라 / 꾀꼬리도 날아와서 / 덤불숲에 모여앉아 / 꾀꼴꾀꼴 울어대네 // 칡덩쿨이 뻗어가네 / 골짜기로 뻗어가네 / 그 잎사귀 무성해라/ 잘라다가 삶아내어 / 굵고 가는 베를 짜서 / 옷 해 입고 좋아하네 // 여스승께 고하리라 / 친정 간다 고하리라 / 막 입는 옷 내어 빨고 / 나들이옷 내어 빨고 / 모두 내어 빨아놓고 / 부모 뵈러 친정가리" (<詩經>(심영환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 중)
위 시는 <시경>의 한 대목이다. <시경>은 현실을 풍자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정치를 원망하는 것도 있지만 남녀 간의 정과 이별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시로 읊은 것도 많다. 총 305편의 시 중에서 두 번째인 '갈담(葛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법한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시집간 딸이 결혼하고 친정과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심경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살이의 형편과 마음의 세목들은 어쩌면 이리도 대동소이할까. 그리고 뭍이나 섬이나 식물이 자라나는 생태도 어쩌면 똑같을까.
행남 등대에서 바닷가로 완전히 내려서면 도동항까지 해안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바닷가. 파도가 끊임없이 철썩이는 가운데 절벽을 따라 칡넝쿨처럼 뻗어나가는 길.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저 바다의 파도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오늘은 실상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그 길 한 가운데를 삼삼오오 무리지어 사이좋게 걸어가고 보통 사람들. 그중에는 모처럼 큰 맘 먹고 친정 부모 모시고 울릉도에 여행 온 곱상했던 딸도 있으리라.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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