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들 녀석이 만 네 살도 되기 전이었던 어느 봄날 놀이동산에서 문득 내뱉은 말이었다. 딸아이도 초등학교 2학년 여름, 양구로 놀러가는 길에 차 안에서 지나가듯 내뱉었던 말이었다. 아내는 당시 이 말을 듣고 그야말로 '멘붕' 상태에 빠졌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딸아이는 요즘도 가끔씩 '죽기 싫다'는 말을 내뱉곤 한다. 그럴 때면 딸아이와 나는 '죽음'을 화두로 세상의 온갖 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긴 토론에 들어가곤 한다. 물론 해답에 이를 수 없는 토론이지만 우리는 둘 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그런 토론을 제법 즐기기도 한다.
충격이 컸던 아내는 아이들을 심리치료사에게 보내서 치료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건강한 아이들도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아내를 설득했지만 그것으로 아내가 받은 충격을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결국 심리치료사에게 보내졌고 일정 기간 동안 심리치료 과정을 거쳤다. 아내의 의견은 아이들 때는 정신적으로 어리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아이들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이고 따라서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아이들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표출한 것이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막막함과 두려움의 표상으로서 그 단어가 그냥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편견일 수도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내 어린 시절 추억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짐 홀트 지음, 우진하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
물론 앞에 적은 것 같은 개념화된 단어들을 떠올리면서 논리적으로 사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막막하게 내가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하는데 왜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의 아주 원시적인 형태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논리를 동원해서 그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작은 머리로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니 가슴은 먹먹하고 머릿속은 지끈지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지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에 슬퍼졌고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살고 싶었다. 나도 어떤 기회가 있었다면 이런 내 심정을 '나 죽기 싫어'라고 소리치며 표현했을 것이다.
모기장 속에서 잠을 설치고 있던 나는 '죽기 싫어'라고 소리치는 대신 용기를 내서 어머니께 물었다. 죽지 않을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라고 별다른 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인연이 있으니 죽은 후에도 하늘나라에서 다 같이 만나서 살 수 있다는 식의 대답을 하셨다. 그 때도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투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바람이라는 것을 눈치를 채고야 말았다. 내 고민은 더 깊어만 갔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도 막연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처럼 그런 막연한 고민에 휩싸여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가 아니라 토론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은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모색하고 하는 과정의 하나를 천문학자의 길로 생각해왔다. 내게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하는 질문은 너무나 절박한 것이었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아내처럼 그 문제가 전혀 자신의 삶의 여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우리 아이들은 어쨌거나 아내와 나의 유전자를 타고났으니 비슷한 형질을 보유했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그 화두를 잡은 채 살아가는 근원적인 질문을 아이들도 제기하고 힘들어한다는 사실은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아내는 '멘붕' 상태에 빠졌었지만. 그들은 각자의 삶을 통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하면서 갈아갈 것이다. 다만 나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에 대처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요즘 부쩍 더 자주 기회가 마련되는 아이들과의 대화 시간은 내게는 큰 충격이자 자극이자 기쁨이다.
나는 존재에 대한 수수께끼가 처음 내 의식 속으로 들어왔던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0년대 초로, 당시 나는 미국 버지니아주 변두리에 살고 있던 풋내기 고등학생이었다. 이따금 반항심이 폭발했던 나는 실존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실존주의야말로 내 사춘기의 불안함을 해결시켜주거나 최소한 좀 더 분명한 방향으로 이끌어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는 동네 대학 도서관을 찾아가 흥미로워 보이는 책 몇 권을 살펴보았다. 바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그리고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이었다. 하이데거의 책 첫 장을 펼치며 마주하게 된 질문은 바로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순진하면서도 완전한 질문에서 받았던 충격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 있다. 그야말로 우리 인류가 가져왔던 모든 의문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왜?"라는 문제에 대한 궁극의 질문이었던 셈이며, 그때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지적 생명체의 기원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처음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고 기쁨이다.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짐 홀트 지음, 우진하 옮김, 21세기북스 펴냄)는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들을 만난 후 그런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여름밤 모기장 속에서 내가 던졌던 화두는 짐 홀트의 고등학교 시절의 화두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인간 각자에게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 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을 것인가? 그 질문이 바로 나의 존재와 사라짐에 대한 정체성 문제를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짐 홀트는 '숨 가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 대신 유가 존재해야 한다는 신속한 증명'이라는 제목이 붙은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 무(無)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무런 법칙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법칙도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가 존재한다면, 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는 그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한다. 증명 끝.
그의 서술처럼 증명이 끝났다면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책이 이렇게 두꺼워졌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짐 홀트의 프롤로그는 우리를 더 서글퍼지게 하는 명확함을 가장한 허무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는 순례의 길을 떠났을 것이다.
나는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철학자와 신학자, 분자물리학자와 우주철학자, 그리고 신화학자와 미국의 유명 소설가까지 만나서 대화를 하면서 생각의 범위를 크게 넓혀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다재다능하고 다양한 지식인들을 찾아 헤맸다.
그가 만난 전문가들도 인간이었다. 초등학생 이명현이나 고등학생 짐 홀트가 막연하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을 그들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의 대답은 각자의 추억 사진처럼 나름의 이유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사상가들은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세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낙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언젠가는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관주의자들'은 세상의 존재에 대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결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 뒤에 숨어 있는 이유를 깨닫기 위한 실체를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거나, 혹은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그 이유가 인간의 지적인 한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우주의 내적 본성을 꿰뚫어보기 위한 것이 아닌, 그저 생존을 위한 태생적 도구일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거부주의자들'은 세상의 존재에 대한 이유가 있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의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계속해서 믿고 있다.
그들의 해답은 더러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먹먹한 가슴을 단박에 털어내 줄 수 있는 묘약은 아니었다. 현생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머물러 살았다. 그 기간 동안 자연에 적응하면서 인간 본성이 형성되었다. 우리의 뇌도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적응의 산물일 것이다. 그런 뇌로 세상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식도 이런 진화의 산물이라는 엄연한 진실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도 이런 진화의 산물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고 싶다.
와인버그가 말했다. "내게 그것은 더 큰 질문의 일부입니다. '왜 모든 것은 그렇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죠.
'왜 세상이 존재하는가?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질문이 지극히 인간적인 질문이 아닐는지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질 권리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연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질문 자체를 의심해 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중심으로 던지는 질문은 부메랑처럼 우리 자신의 국부적 문제로 회귀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와인버그가 표출한 문제의식은 물론 '최종이론의 꿈'을 피력한 것이겠지만 우리가 자신을 뛰어넘는 우주 전체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어떻게 던져야할지 고민할 때 새겨들을만한 이야기다.
인간의 지능이 우주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모델링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근원적인 질문은 늘 존재했지만 그것을 더 구체적이고 더 정밀하게 다듬어서 하는 것이 문명의 진보일 것이다. 질문이 정확해야 대답도 정확할 것이다.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는 고전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우리 문명의 대답을 모은 책이지만, 그것을 토대로 어떤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하는지 탐색하게 유도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 나는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짐 홀트는 용감하게도 이런 문장을 남겼지만 그 자신도 이 서술이 수사학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는 어쩌면 역사책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수천 년 동안의 인간 문명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표방했는지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는 여행기라는 생각도 했다. 마치 독립된 나라처럼 고립된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류의 지성들을 찾아다는 순례 여행기 같은. 하지만 그들의 질문과 대답 뒤에는 인간 보편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모범적인 여행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를 무엇보다도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2>를 위한 워밍업 책이라고 부르고 싶다. 진화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던질 수 있었던 고전적인 질문을 혁파해서 우주 보편적인 질문을 발굴해서 다시 던지는 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신이라는 시시한 관성적 대답을 송두리째 던져버리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뇌신경 회로를 재구성하는 혁신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의 축적과 문명의 성과를 이룩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동안의 관성을 과감하게 떨쳐버리는 것이 과제라면 과제일 것이다. 나는 회의론자지만, 이런 문명의 재무장을 통해서 다시 나올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2>가 궁극적인 대담을 던져주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들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쪽에는 판돈을 한껏 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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