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그건 네 사정이고" 반대편에서 시작되는 은밀한 밤의 수업!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그건 네 사정이고" 반대편에서 시작되는 은밀한 밤의 수업!

[정혜윤의 '우더잘']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을 만나다

올 여름 책 읽는 사람들의 밤에는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지음, 난다 펴냄)라는 선생이 있었다. 불문학자, 비평가로서 수십 년 한국 문단 곁을 지켜온 예순여덟의 저자가 처음으로 낸 산문집이다. 젊은 문인들로부터 시작된 책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곧 수많은 지면 위로 피어올랐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드디어 말라르메가 한국어 속으로 왔소.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말이외다"라고 말했던 프랑스 현대시 번역가이자 <말과 시간의 깊이>(문학과지성사 펴냄),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펴냄) 등의 비평가인 그가 첫 산문집과 함께 '드디어 독자 속으로 온' 것이다.

▲ <밤이 선생이다>(황현산 지음, 난다 펴냄). ⓒ난다
<밤이 선생이다>는 주로 신문에 기고한 짧은 칼럼을 모은, 저자의 책 가운데서는 입구가 낮은 책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교수이자 문인으로서 평생 가지고 있던 강박관념과 문제의식, 주제 등"이 집약되어 있다는 이 책의 출구는 결코 낮지 않다. 삼학도의 개펄에서 인문학의 진짜 필요를, 인터넷 용어에서 이 시대 종교의 역할을 통찰하는 글들은 30여 년 세월 속 문학자의 오랜 고민이 일상에서 조응의 단면을 만나 맞부딪힌 순간의 결정이다. 특히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 출구를 나오며 어떤 식으로든 달라짐을 체감하는 책일 것이다.

지난 19일 <사생활의 천재들>(봄아필 펴냄), <여행 혹은 여행처럼>(난다 펴냄)의 저자이자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정혜윤(CBS PD)이 황현산을 만났다. '프레시안 books'와 함께 하는 북 토크 행사 '우리 더 잘 살아요(우더잘)' 열한 번째 시간이었다. 이날 저녁 김대중도서관 국제회의실에서 두 사람이 약 100명의 독자와 함께 나눈 '밤, 문학, 실패,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정혜윤 :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을 직접 정하셨다고 들었어요. 선생님한테 밤은 어떤 시간인가요?

황현산 : 제가 워낙 올빼미 체질이에요. 거의 모든 일을 밤에 하지요. 밤에 일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 경우엔 게으르기 때문에 그래요. 낮에 해야 할 일을 내내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일하는 버릇이 들다 보니까 낮에 일하면 가짜로 일하는 것 같아요. (웃음)

밤은 원래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시간이지요. 그런데 밤에 일을 하면, ―물론 정신이 총총하니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만― 반쯤은 꿈과 몽상의 세계가 내게로 와서 내가 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낮이 우리가 이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시간이라면, 밤은 그 이성이 못하는 일들을 어느 정도는 보충해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밤이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어요.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한숨 자고 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라고 위로하는 말입니다. 이 속담(원어)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두고 번역자 몇 명이 의견을 나누다가 내가 '밤이 선생이다'라고 했어요. 농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책 낼 때 그게 생각나더라고요.

정혜윤 : 그 얘기를 들으니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요. 소설가 보르헤스는 신이 우리에게 한 가지 선물을 줬다고 말했어요. 그게 밤이랍니다. 만약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하룻밤 사이에 겪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누군가를 질투한 모든 일들이 자지 않는 동안 일어났다고 쳐봐요. 그걸 겪어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밤이 있어서, 잠을 잘 수 있어서 끊어서 겪을 수 있다고 한 거지요.

황현산 : 제가 학생들한테 몇 살 때부터 기억이 나느냐고 물으면 세 살, 다섯 살 때부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다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군데군데 조그만 단편들이 반짝하듯 기억날 뿐이지 대부분은 잊어버리고 있는 거죠. 그건 잠을 자는 동안 잊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무슨 손실이 일어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그게 아닙니다. 잠은 우리의 기억을 다른 차원의 지식이나 창조적 에너지로 만들어주고 있는 겁니다.

이 책에서 몇 번 군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군대의 낮은 전쟁하는 시간입니다. 전쟁하다보면 잃거나 잊는 게 많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도 낮에 자기 인생을 위해 노력하고, 돈도 벌고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실제로 잃어버리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어쩌면 자기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 잃어버린 부분들을 밤이 다시 복구해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 (<밤이 선생이다> 220~221쪽)

▲ 불문학자 황현산. ⓒ프레시안(최형락)

인문학

정혜윤 : 책을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책은 굉장히 엉뚱해요. 이거랑 저거랑 대체 무슨 상관일까 싶은 것을 '상관있게' 만들어 준다고 할까요. 그런 점에서 삼학도와 인문학을 엮은 글이 기억에 남아요.

선생님은 고향 목포 앞바다에는 삼학도라는 작은 섬이 있었대요. 선생님이 다니던 중학교, 고등학교는 삼학도를 마주 보는 바닷가에 있었는데, 썰물일 때 펼쳐지던 그 사이의 개펄은 아름답지만 별 쓸모는 없었다고 해요. "저게 논이라면"이라는 말로 아쉬워하는 교사들도 있었대요.

그러다 정치가들의 선전으로 개펄을 간척하는 개발이 시작돼요. 그러나 선거철이 다가올 때만 흙 몇 삽을 퍼다 붓는 식이었으니 공사가 지지부진했지요. 결국 개발을 원했던 사람들은 후회하게 되었고, 나중에 본모습을 되찾으려 애썼으나 과거의 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 이야기 끝에, 선생님은 인문학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미래학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닌 일, 언제 어디에 소용될지 모르는 일에도 전념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삼학도의 비극은 그렇게 계속된다." (57쪽)


최근 몇 년간 사람들은 인문학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인문학도 경쟁력이라면서 'OO을 위한 인문학'을 말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인문학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황현산 : 저는 오랫동안 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에서도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때문에 인문학으로 밥을 먹고 산 사람이죠. 그런데 생애 내내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즉 위기 속에서 위태롭게 밥을 먹으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학문의 분야를 나눈 뒤 인문학을 생각합니다만 나는 이런 것이 지나치게 편의적인 구분이라 생각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감과 지식, 생각들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활동 전체를 인문학이라 이야기해야 맞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인문학은 날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사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를, 친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의논 상대가 되어주는 모든 것들입니다.

요즘은 말씀하신 대로 인문학이 유행이지요. 'CEO를 위한 인문학'이라든지, 어떻게 하면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될까를 궁리하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그렇지만 인문학의 정신은 그런 것과는 정반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문제를 실효성과 관련 지어 생각하기보다 그것을 넘어서는 중요한 게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지요.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일을 해결하기 위한, 혹은 나쁜 문제를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필요한 일들, 여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하는 일들, 그래서 우리를 정말로 지혜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 인문학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혜윤 : 선생님은 책에서 글자가 새겨진 돌덩이 이야기도 하셨어요. 어느 날 학교 앞에 "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는 돌덩이를 보고 깜짝 놀라셨대요.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 설령 그 문장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돌에 새겨 공공장소에 새워둘 권리는 없다." (232쪽) 그러면서 이 거친 비석이 옛날에 확성기를 타고 울리던 새마을 노래에 못지않은 폭력이라고 했어요.

이 글을 읽으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어요. 제가 회사에서 '무지한 스승'이란 주제로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였어요. 이 주제는 어떤 취지였냐 하면, 학벌, 학위를 가진 사람들 말만 경청하는 경향에 반기를 든 거예요. 밤이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는 게 저의 생각이었어요. 그렇다면 누구도 미리 섭외해선 안 되는 거잖아요? 아무한테나 마이크를 대야 하죠. 그래서 어느 날 아무도 섭외하지 않은 상태로 통영에 출장을 갔어요. 당연히 긴장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마을을 지나치다가 특이한 장승을 봤어요. 보통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쓰여 있는 장승에 '걸레처럼'이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그 날씬하고 예쁜 장승을 누가 세웠는지 수소문해봤어요. 혹시 목공예를 전공한 교수가 은퇴하고 지방에서 장승을 만드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마을에서 30년간 살며 돼지를 치는 노인이, 버려진 나무를 주워서 깎은 거더라고요.

노인은 젊은 시절 소박하게 사는 게 꿈이었대요. 돈에도 출세에도 관심이 없고 작은 집에서 나무를 기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그 마을에 들어간 건데, 이 마을은 이상하게 아이들 교육에 소홀했대요. 초등학교만 마치면 나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게 했대요. 그래서 노인은 '공부를 안 시키면, 저 아이들 인생에 아무 변화도 없게 된다'고 이야기했대요. 하지만 부모들은 괜한 간섭을 한다며 싫어했지요.

그래서 이 사람은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물어보기만 할 게 아니라 무엇인가 모범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대요. 그는 마을 전체를 학교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지나다니며 보는 곳에 지혜가 담긴 글귀를 적어놓기로 한 거예요. 그에게 있어 지혜란 자신의 삶에서 느낀 것을 책에서 발견한 순간에 발생하는 무엇이었어요. 그게 바로 '걸레처럼', '빗자루처럼', '파도처럼', '바다처럼' 같은 구절로 표현되었고요.

그에게 왜 이런 일을 했냐고 물어보았어요. 아까 말했듯이 아이들이 오가며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제게 충격을 주었어요. 그는 경상도 사투리로 "넘들이 보기엔 우스울지 몰라도, 내는 이 글자 하나하나 대못 박듯이 새겼다"라며, 자기 스스로도 그 글자처럼 살겠다고 선언한 거라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들으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더라고요. (웃음)

저는 이 분이 정말 지혜롭다고 생각했어요. 오르테가 이 가세트라는 철학자는 언젠가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웨딩드레스 자락처럼 끌고 다니는데, 그게 책과 만나는 어떤 순간 지혜가 발생한다'고 말했어요.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게 이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황현산 : 통영 이야기라니 더 좋게 들리네요. 왜냐하면 제 처가집이 통영이거든요. (웃음) 그 노인이 새겼다는 '빗자루처럼'이나 '걸레처럼'은 세상의 가장 밑바닥을 쓸어내고 닦는다는 의미일 테고, '바다처럼'은 어떤 목표점을 말해주는 것일 텐데, 이런 말들은 누군가를 억압하는 말이 아닙니다. 네가 지금 잘못 살고 있다고 꾸중하는 말도 아닙니다.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자기 체험을 건져 올린 생각이고, 거기다 어린 아이들하고 대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지요. 이거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치유

정혜윤 : '인문학' 만큼 유행이었던 '힐링'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이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글은 '김기덕 감독의 한'이라는 글이에요. 선생은 김기덕 감독이 자기 자신을 주제 삼아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형식의 <아리랑>(2011)에 대해 '자기치료의 과정'이었으리라고 썼어요. 그 표현이 정말 좋더라고요. 우리는 자꾸 '치유의 노하우'를 알려고 하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치유했다는 점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선생이 생각하는 치유는 무엇인가요?

황현산 : 아까도 말했지만 인문학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쓸데가 없잖아요. 문학이 그렇고, 문학 중에서도 시가 가장 그렇지요. 모든 것의 효율성을 고민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나오는 것이 '시 치료법'이니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시가 치료 효과를 가질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힐링 같은 거,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치료는 의사들이 훨씬 더 잘 하지, 시가 그만큼 할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 시로 힐링을 해야겠다고 본격적으로 마음먹는 순간 힐링 효과는 없어질 겁니다. 아니, 치료하려고 나서는 순간 그때부터 시는 망합니다. 제대로 된 시가 쓰일 리 없어요. 시는 자신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고 쓰일 때 시로서의 효과에 도달하고 그 본래 목적을 완수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나는 힐링을 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쓰인 시는 사람들한테 힐링 효과가 있을 수 있고, 누구보다도 시 쓰는 사람 그 자신을 치료해주기도 합니다. 그 효과는 아마 굉장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존재의 밑바닥'을 훑어내야만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아까 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말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는듯해도 사실 잘 모르잖아요. 우리 존재가 갖고 있는 비밀스러운 구석에 대해서요. 그렇지 않다면 그리 실수를 많이 하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안의 어떤 힘이 나와서 일을 하게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게 현실적으로는 밤이라는 시간대일 것이고, 일원화시켜 말하면 시 쓰기 같은 창조를 하는 시간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로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만, 그의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도 참 고생하지만(웃음),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그는 외국에서도 몇 번인가 상을 탔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늘 자신이 이해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오는 한이 있었던 거지요. 이런 한을 치료하기 위해 역시 영화를 다시 만들고, 만드는 동안 자기 존재를 밑바닥부터 훑어서 점검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라고 봅니다. 창조하는 과정 자체가 힐링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창조 경제'가 그런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정혜윤 : 선생님은 어떻게 '힐링'을 하시는지요?

황현산 : 제 경우에도 역시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 제가 갖고 있던 여러 상처들이 치료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 시간에 상처가 덧나기도 하지만, 덧나면서 결국에 치료되는 것이겠지요.

글 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의사가 대전 근처 어디에 한 명 있습니다. 독특한 처방을 하기로 유명해서 저도 어느 작가의 소개로 그를 만나게 됐어요. 의사는 제 진맥을 짚더니 상처가 굉장히 많다더군요. 그러면서 '날마다 1000미터씩 뒷걸음을 걸어라' 하더군요. 그래서 그 운동을 1년 동안 했어요. 뒷걸음을 걸으면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써야 해서 운동이 된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통해, 나는 운동 말고도 아주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아마 뒷걸음을 걸어 본 사람을 알 겁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앞으로 나가는 걸 상상해 보면, 풍경이 양쪽으로 찢어지게 되죠. 앞으로 걸어갈 때도 풍경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뒤로 물러나지요. 그런데 뒷걸음을 걸어보십시오. 그럼 풍경이 앞으로 모입니다. 그건 굉장히 색다른 경험입니다.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면, 심리적으로 풍경이 앞으로 모이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보통 '힐링'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혜윤 피디의 힐링법은 무엇인가요?

정혜윤 : 저도 한 번 해보고 싶네요. 제 힐링법이자 취미는 감탄이에요. 최근에 크게 감탄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다 내려왔지만, 몇 달 전까지 평택 쌍용자동차 앞 송전탑에 노동자 세 명이 올라가 있었어요. 그 중에 복기성(쌍용차 비정규직노조 수석부지회장)이란 분이 있었어요. 그분은 고향에서 풍물패 활동을 했대요. 퇴근하면 북이나 장구를 치는 생활을 오래 했더니, 실력이 늘어 잘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공장 그만 다니고 전문 풍물패 하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분의 꿈은 전문 풍물 연주자가 아니라, 노동자 중에서도 이렇게 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대요.

세월이 흘러서 송전탑에 올라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옛날에 그와 함께 풍물을 하던 사람들이 송전탑 위의 그를 알아보고 그 앞에 모이게 된 거예요. 그들은 장구를 그 위로 올려주었지요. 그래서 고공농성장 밑에 있는 사람과 거기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함께 풍물놀이를 하게 된 거예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이 순간을 묘사해주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지를 알 것 같았어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 안에 있던 뭔가가 정리되더라고요. 그래서 저한테는 아마 '듣고 감탄하기'가 취미이자 힐링법이 아닌가 싶어요.

황현산 : 제가 워낙에 잘 울기도 하지만, 정혜윤 피디는 지금까지 저를 세 번이나 울렸어요. 사람을 울게 하는 데 굉장한 재능이 있어요.(웃음)

우리는 날마다 무장을 하고 결투하는 태도로 사람을 만나고 삶을 살아갑니다. 무장하고 있는 순간은, 바꿔 말하면 자기 존재 중에 일부만 가지고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가령 운전할 때는 운전하는 자기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늘 욕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무장을 해제해버리는 어떤 순간이 있습니다. 그게 감탄할 때, 웃을 때,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자기 무장을 해제하고 그럼으로써 전(全) 존재가 드러나는, 스스로가 저다워지는 순간인 것이지요. 아마 정혜윤 피디가 말한 '감탄을 통한 힐링'은 문학에서 이르는 '카타르시스'와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야말로 본질적인 '힐링'을 하고 계신 거로군요.(웃음)

▲ 정혜윤 CBS PD. ⓒ프레시안(최형락)

희망

정혜윤 :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글은 '몽유도원도 관람기'입니다.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가 2009년 한국 박물관 개관 백주년 기념 특별전에 아흐레 동안만 전시되었대요. 선생님은 이 그림을 보러 갔었는데, 줄이 굉장히 길었다고 해요. 거의 2시간을 기다려 단 2분도 채 보지 못했지만, 기다리던 관람객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줄을 서서라도 그 그림을 보고자 했을까요? 그 시간은 왜 아깝지 않았을까요?

황현산 : 사람들이 저더러 낙천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낙천주의자는 뭐든 잘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일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뭐든 잘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안 되더라도 해보기는 하자, 안 되더라도 희망은 갖자, 이렇게 말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뭐가 있어야만' 희망이란 것을 가질 수 있어요. 그 희망은, 정말 절실하게 괜찮은 것에 대한 이미지를 가진다거나, 자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반드시 거기에 가서 살고 싶다는 염원을 가진다거나,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한에서 어떻게든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때부터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몽유도원도를 구경하려고 줄을 서 있던 그들은, 바로 그런 식의 희망과 낙관주의의 행렬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몽유도원도는 내내 일본에 있었고 한국에 들어온 적은 드물지요. 모르긴 몰라도 30년에 한 번 꼴로 한국에 들어오는 식의 전시로 기억하는데, 사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 전시관에는 몽유도원도를 그대로 복제한 그림이 있어요. 원본과 똑같아요. 하지만 진짜 몽유도원도라는 훨씬 더 훌륭한 그림이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줄을 섭니다.

저야 2시간 남짓 섰지만, 6시간을 기다린 사람도 있다고 해요. 그런데 막상 그림 앞에 가면 2분도 못 있습니다. 사람이 계속 밀려드는데 어떻게 계속 서 있겠습니까. 약간 천천히 그림 앞을 지나가는 정도라 해야 옳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걸 다 알면서도 줄을 섭니다. 그 앞에서 한 시간 그림을 보고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건 몽유도원도라고 하는 이름, 그 이름을 넘어선 그것으로 상징되는 어떤 세계, 일상을 넘어서는 찬란한 빛, 그런 것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건 이런 줄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27쪽)

정혜윤 : <닥터 지바고>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혁명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잘 알거나 뚜렷한 확신을 가져서 한 건 아니에요. 알고 보니, 사람들은 책이나 그림에서 본 것처럼 한 번 살아보고 싶었고, 지금 이런 삶 말고 다른 삶을 가져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열망의 순간들이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몽유도원도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나의 지금을 걸어 보는 게 희망이라는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실패

정혜윤 : 여러분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이 영화에서 유지태가 하는 일이 제가 하는 일과 비슷해요. 소리를 따라다니지요. 그래서 특별히 더 기를 쓰고 본 영화 중 하나로 기억해요. 유지태가 고생을 하는 것처럼, 실제 밖에서 녹음을 하다보면 우리 귀에 뚜렷이 들리는 물소리나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매체로 기록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든요.

선생님은 이 책에서 <봄날은 간다>에 대해 "잘 만들어진 실패담"이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 실패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공에 대해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거론하고 있어요. 이렇게 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요. 하지만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지적처럼, 저 역시 실패를 존중하고 싶거든요.

황현산 : 살면서 우리는 굉장히 많은 실패를 합니다. 이 실패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많은 경우가 있어요. 가령 젊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싶은데 실패할까봐 잘 못하겠다고 많이들 얘기해요. 그런데 이 '실패'라는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용기나 결단력을 훨씬 더 잘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이야기는 신중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정말 해야 할 일이라면 덤벼들어서 해야 합니다. 정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임에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친구의 곤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경우, 내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들… 그 사람들이 혼자서 거기에 가게 할 수는 없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실패를 자원하기도 하는 거예요. 또한 그 일이 위대한 일이기에, 반드시 실패하더라도 외면할 수 없어 뛰어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실패가 나를 나로 만들고, 나라는 조그마한 존재를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사라는 거대한 차원으로 옮겨 가면, 이런 실패가 모여서 인간의 역사를 이뤄왔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성장한다'고들 말하는데, 반드시 성장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실패를 통해 위대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어떤 부분에 승리를 했다면, 그것은 실패 때문에 얻어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나이를 많이 먹고 나서 했던 생각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정혜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안톤 체호프를 평하면서,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항상 넘어지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의 말대로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늘 잘 풀리지 않는 자들이에요. 그들이 넘어지는 이유에 대해 나보코프는 '항상 하늘의 별을 보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즉, 이상을 보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영리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자기와 가족이 먹고사는 문제보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나 저 먼 민주주의 따위를 걱정하느라고 늘 가족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지요. 하지만 나보코프는 이런 사람들이 이 땅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희망일 거라고 썼어요.

저 역시 하늘의 별을 보기 때문에 늘 넘어지고 실패하는 사람들, 영리하지 않은 사람들을 거의 매일 보고 있어요.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제게 주는 가치는 헤아릴 수 없는 것 같아요.

황현산 : 영리한 사람들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담에 '영리한 개가 밤눈 어둡다'는 말도 있잖아요.(웃음) 실패를 하지 않으려고 온갖 꾀를 다 짜내도 실패는 피하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자본주의 세상은 개인이 실패를 피해가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별을 보는 사람은 하늘의 별이라도 보고 실패하잖아요. 말하자면 커다란 혁명에서 실패하는 것이 날마다 작은 싸움에 실패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었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88쪽)

정혜윤 : 정말 영리하지 않은 사람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진짜 바보 같은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시골에서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고시원, 친구 집, 친척 집을 거치며 오랫동안 얹혀살았어요. 그러면서 가족이 생겼고, 내 집을 하나 갖겠다는 꿈이 생겼어요. 취직을 하고 나서도 한 달에 20만 원으로 살며 계속 돈을 모았어요. 휴일에도 특근을 해서 돈을 버느라 좋은 아빠도 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32평짜리 집을 샀어요.

이렇게 고생하는 와중에 유일한 낙은 직장생활의 어느 한 부분이었대요. 동료들이랑 '형님, 동생'할 수 있는 게 그리 좋았대요. 그는 차량 정비 일을 했는데, 그 일을 통해 배운 건 아무리 대단한 정비사라도 혼자서 차를 번쩍 들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대요. 고개를 돌리면 어깨 너머에 형이 있어서, "형님 좀 들어줘요"라고 말만 하면 된대요. 게다가 정비는 어떤 매뉴얼이 없어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만져보고 판단해야 한대요. 자기의 경험을 기준으로 증상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아서 서로서로 경험을 참조해야 했대요. 이렇게 회사에 의견을 나누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일이 싫지 않았대요.

그러다가 정비사들이 사측에 맞서 파업을 하게 돼요. 그런데 사측에서는 파업 대열에서 빠지면 복직시켜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어젯밤 같은 자리에서 잠든 동료가 아침에 깨어나 보니 없다는 사실에 이 사람은 놀랐어요. 우리가 어깨 너머로 눈빛을 교환하며 일해 왔는데 '어떻게 나갈 수 있지?' 싶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상황도 끊임없이 계산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 해고되면 32평 아파트의 대출금은 갚기 힘드니까요. 그런데 파업 대열에, 자신이 형님이라고 부른 사람이 한 명 남아 있는 거예요. 그때 이 사람은 영리하지 않기로 결심을 합니다. 형님이 있었기 때문에요.

저는 우리가 영리함에서 배우는 것보다 '버티는 사람'과 '견디는 사람'이 주는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해요. 버티는 사람이 버티게 하고, 견디는 사람이 견디게 하는 거예요. 영리한 사람이 우리를 강하게 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체 왜 그 힘든 길을 택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패에 대한 궁금증과 존중이 생긴 거지요. 이런 영리하지 않은 사람, 그러나 버티게 해주는 사람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 주변에 많을 거라고 봐요.

황현산 : 또 제 가슴을 먹먹하게 해주시네요. 우리가 하늘의 별을 보고 걷고 있으면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계속 함정이 나타나고,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지요. 스스로에게도 '이런 길 가서 뭐해?'라는 생각이 들고요. 별을 보며 가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를 다 걸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묻지 않으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글쓰기

정혜윤 :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여러분에게 이 책의 단 한 꼭지만 권하라고 하면, 전 '당신의 사소한 사정'이란 글을 고르고 싶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읽어도 될까요?

"우리는 늘 실패한다. 우리가 배웠던 것, 세상의 큰 목소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들과 우리의 사소한 경험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고 엇나갈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당신의 사정'이다. (…)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175~176쪽)


글쓰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라고 봅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약하고 초라한 데서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현산 : 그 글은 제가 알고 있던 한 시인이 쓴 글쓰기 책에서 시작됐습니다. <밥하기보다 쉬운 글쓰기>(전영주 지음, 여름솔 펴냄)라는 책인데요. 사람들이 글쓰기에 관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대체 무엇을 쓰느냐 하는 거래요. 일단 너에 관해, 혹은 네 주변에 있는 사정에 관해 쓰라는 게 이 시인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네 사정이 그렇게 중요해?"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관료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가령 우리에게는 미묘하고 구체적인 민원 사항이 있어요. 그런데 관청에 가서 그걸 설명하려 하면 설명이 잘 안 됩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법 조항에 없으면 '그건 당신 사정이고'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말은 쉽지만 막상 당해보면 구체적인 비극입니다. 우리 삶에는 군데군데 그런 '당신의 사소한 사정'이 도사리고 있어요.

그런데 만일 그 민원 사항을 마을 노인에게 하소연하면, 그들은 절대 '그건 네 사정이야'라고 말 안 할 겁니다. 그것 참 딱하게 됐다, 이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이렇게 말하겠지요. 이게 바로 지혜입니다. 글 쓴다는 행위도 그런 것이고요.

우리 각자가 가진 기막힌 사정들을, 세상과 법률은 몰라줍니다. 그래서 그 사정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외롭게 떨어져 있는 '당신의 사정'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도 있습니다. '너 참 이상한 사정을 만났구나'가 아닙니다. 법도 규칙도, 청와대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외로운 사정들에 대해 '그건 네 사정'이라 굴지 않고 '인간의 사정이다'라고 대하며 이해해 보려 애쓰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이 가진 진정한 힘이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께 자신감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외국의 유명한 이름을 내걸지 않으면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한 일부 인문학자들이 있어요. 전 그런 식의 인문학을 굉장히 혐오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성의를 다해 따져보니 이렇더라, 나도 여기까지 생각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신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누군가 뭐라고 말했을 때 '정말 그런가?'를 따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이것이 비판적 이성의 첫걸음, 자유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혜윤 : 라디오를 듣다가 꺼버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잖아요. 제가 몇 달 심혈을 기울여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든다 한들, 사람들은 몇 초도 안 듣고 꺼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저에겐 '딱 한 명만은 이걸 듣고 있다'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게 제가 방송을 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고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딱 한 명에 대한 믿음이 제게는 자신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난주에 인생 최고의 극찬을 받은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친구 한 명이 늦은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페르난두 페소아란 시인을 공부하기 위해 혈혈단신 포르투갈에 갈 예정이에요. 유학을 앞둔 친구가 정말 슬퍼하는 것은, 사랑하는 친구 A를 두고 떠나는 일이었어요. 벌써부터 A를 그리워할 정도로요.

제가 이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 "오늘은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회사 앞에서 만나 같이 김포공항에 갔답니다. 둘이 함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걸 보기로 했어요. 다른 공간에서 온 사람들의 표정을 보자고 한 거지요. 입국장 앞에서 시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날 A라는 친구가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건 저만 알고 있었죠. 문제는 A가 정확히 몇 시에 어떤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지를 몰랐단 거예요.(웃음) 저는 입이 아프도록 대화를 나누는 한편 눈이 충혈되도록 두 곳의 입국장을 번갈아 보며 기다렸는데, 기적처럼 A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날 서로 볼 거라고 예상 못 했던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절 찬양하는 것으로 이날은 끝났는데요.(웃음)

저는 <밤이 선생이다>가 이런 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어디로 연결된 채 질질 끌려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는 이야기였다고도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황현산에게 직접 묻는다 - 청중과의 대화

Q1. 종교와 인문학, 종교와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황현산 :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거의 전투적인 무신론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영성이라 말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이해는 있습니다.저는 영성이 반드시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를 가정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적 작용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을까?'란 것은 답을 낼 수도 없고 누굴 설득시킬 수 없는 물음이지만, 물질이 가지고 있는 조건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상태에 대한 희구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 대한 열망, 그 상태가 가져다주는 고양감 자체를 영성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정의합니다.

이렇게 정의할 때 영성은 나 같은 분야의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 혹은 시를 포함한 문학예술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문학예술, 그중에서도 시는 그 영성을 찬양하는 일만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는 일 ―거기에 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혹은 영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구렁텅이에 빠져있는가를 묻는― 을 더 많이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2. 사진이 함께 나오는 2부가 가장 좋았습니다. 사진 속의 개 한 마리를 보고 어떻게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가 신기했고요. 이 글을 쓰실 때 이 사진을 어떤 관점에서 얼마 동안 보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시에 문외한인 독자는 현대시를 잘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황현산 : 그 사진을 얼마나 오랫동안 봤냐고 묻는다면, 아마 평생을 봤다고 답해야 할 겁니다. 물론 제가 태어났을 때는 그 사진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문자 그대로 평생은 아니지만요. 다만 오랫동안 여러 각도로 고민하던 문제가 그 사진과 관련되어서 나온 것이겠지요.

전 늘 쫓기면서 글을 썼습니다. 이 책에 실린 글도 대개 신문 칼럼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마감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쓴 글들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농담 삼아 '마감이 재능이다, 마감이 다가오면 원고지를 채울 수 있는 무슨 생각이든 나오게 마련이다'라고 말하는데요.(웃음) 평소에 어떤 것이든 늘 생각을 하고 있어야 쫓길 때 원고지에 토해낼 게 있을 테고, 보잘 것 없는 생각이 글 쓰면서 확대 재생산 되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강운구 선생의 사진에 대해 쓴 글에는 평소에 갖고 있던 예술론이 묻어나왔다고 해야겠지요.

또 시를 어떻게 읽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미 시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못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시는 암호도, 과학 논문도 아닙니다. 만약 같은 말을 친구들이 농담으로 던졌다면 금세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텐데, '시'라고 해놓으니까 무슨 뜻일지를 고민하는 겁니다.

오늘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들었어요. 한 부인이 동창회에 다녀오더니 그릇을 깰 듯이 화를 내며 설거지를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남편은 "동창회 가서 남편이 사준 외제차 몰고 온 친구 만났느냐, 남편이 사준 명품백 들고 온 친구 만났느냐"라고 물었지요. 헌데 계속 "됐어!"라고만 답하더랍니다. 그러다 행주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가서 봤더니, 남편 있는 여자는 나밖에 없더라고!" (웃음) 이 이야기를 농담이라 생각하면 듣는 즉시 바로 웃잖아요? 그런데 시로 쓰면 지레 난해하다는 벽을 칩니다. 읽을 때 힘을 빼고 읽으세요. 금방 이해됩니다.

Q3. <봄날은 간다> 마지막 장면을 좋아합니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비록 사랑에 실패했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내가 되었다는 거지요. 두 분은 언제 스스로를 가장 '나답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정혜윤 : 나다운 건 나를 잊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제가 언론사 입사를 준비할 때엔 요즘처럼 인터넷이 집집마다 깔려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반드시 책을 봐야 했어요. 그게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였지요. 그때 거기에 트레이닝된 것 같아요. 하나를 알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그때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돼요. 저는 '아무리 읽어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좋아해요. 잘 알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알게 되니까 더 알고 싶어서 쓰게 되는 거예요. 항상 채워지지 않은 듯한 느낌,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큰 동력이에요.

황현산 : 2 더하기 3은 5죠. 이 말을 할 때 여러분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2에 3을 더하면 5가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게 아닙니다. 내가 없어져도 그건 5이지요. 내가 나를 떠날 때, 나로부터 출발해 나를 넘어선 어떤 지점에서 발언할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런 상황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Q4. 요즘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게 아닐까', '내가 읽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게 아닐까'라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혹시 그런 편향이 생길까봐 걱정이 됐어요.

황현산 : 이 책은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고, 제가 쓴 책 중에서는 읽기 쉬운 책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한 사람의 교수이자 문인으로서 평생 동안 가지고 있던 강박관념과 문제의식, 주제 등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짧고 쉽기는 하나 오랫동안 농축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대개 독자들은 책 앞에서 자기를 해제하고 책을 읽지 않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글쓴이에게 그 글은 상당한 긴장의 결과물입니다. 적어도 이 책의 경우 ―그게 독자에게 제대로 가 닿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독자인 당신이 나의 주제를 따지면서 읽을 수 있는 근력이 함께 길러졌으면 좋겠다, 라는 바람도 담겨 있습니다. 그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레시안(최형락)

Q5. 나이가 들수록 유연해진다고 하는데, 저는 반대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생각이 통하지 않는 사람하곤 만나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요. 동창회에 가서도 진짜 하고 싶은 얘기보다 빤한 이야기만 하게 되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황현산 : 그렇게는 잘 못 살죠.(웃음) 시간이 지남과 함께 사람마다 사는 방식과 생활이 달라지고, 그 생활이 생각을 규정하기 때문에 옛 동창들을 만나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만나는 기회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글을 열심히 쓰고 있을 땐 오히려 동창회에 잘 나가게 되더라고요. 글을 안 쓸 땐 안 가게 되고요. 사람들과 널리 사귀고 마음을 넓게 갖는 것은 결국 자기를 부지런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말 같아요. 늘 어떻게 하면 몸과 머리를 좀 더 움직일 수 있을지를 생각하세요. 그게 최소한의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Q6.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고 세분화되는 추세인데, 최근의 문학 역시 그러한 경향으로, 특수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쪽으로 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황현산 : 문학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먼저 만든다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철이 좀 없어서, 제도가 하는 말을 잘 안 들으니까 그럴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옛날의 문학은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그랬어요.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이야기를 달달 외워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냥 읽어줬습니다. 그래서 그 음조가 제 글에 남아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할머니들은 날마다 듣는 이야기인데도 들을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감탄하며 들어요. 요즘은 문학이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지요.

한국에 시인이 2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집 한 권이 1000권이 채 안 팔려요. 시인들도 시를 안 읽는다는 거지요.(웃음) 그런데 읽을 사람은 또 다 읽습니다. 정혜윤 PD 같은 사람, 방송 작가, 영화감독들도 열심히 읽습니다. 우리가 '시인들도 안 읽는 시집'이라 비하하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일반 독자들에게 다 도달합니다. 그것이 문학을 이끌고 나가는 힘이라고 하지요. 시집이 언뜻 어려워 보이겠지만, 읽으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겁니다. 어떤 시라도 좋으니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Q7. 군대에서 여러 일을 겪으면서 부정의나 폭력에 무뎌진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군대를 나오면 '사람 됐다'고 말합니다. 그게 굉장히 싫습니다. 잘못된 것 아닌가요?

황현산 : 누구나 군대에 가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비극입니다. 제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 엄마가 "이 아이도 나중에 군대 가겠네"라고 말했는데, 저는 아이가 클 때까지 징병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여러분들이 군대라는 숙제를 떠안게 만들었으니, 노인으로서 저 역시 젊은이에게 사죄해야 할 사람 중 하나입니다.

질문 주신 대로, 군대가 사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내 경우에도 그랬어요. 사람 만드는 게 아니라 비굴한 사람으로 만들지요. 우리가 군대를 말할 때, 항상 국가주의가 내걸어 놓은 어떤 장벽이 있습니다. 군대에 대해 찍소리 못하게 하는 거지요. 그러나 이제 군 제도의 부당성에 대해서도 저항할 때가 왔다고, 이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 세대가 물려주고 만 숙제이지만요.

Q8. '두 국사 선생'이라는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언급된 선생님의 고등학교 시절 국사 교사처럼, 저 역시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고구려의 힘으로 이 땅에 지금보다 더 부강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이룩되어, 거기서 수많은 재능이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나라가 '내' 나라일 수는 없는 것이 확실했다." "이 나라의 역사가 어떤 역사이건 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에도 할 수 있었다"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도 안 좋은 일들이 많으니까요.

황현산 :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현실을 다 인정해야 한다는, 즉 전두환도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그 역사 위에서 진행되어 온 것이 '우리나라'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를 사랑한다면 그 우리나라를 사랑해야지, 고구려가 통일했을지도 모르는 가공의 나라를 상정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고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건 마치 프랑스가, 혹은 미국이 우리나라였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Q9.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 역시 실패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한 사람들의 인생을 다룬 게 소설이라고들 하잖아요. 맞는다고 보시나요? 선생님에게 있어 문학은 어떤 의미인가요?

황현산 : 문학의 의미… 그걸 이야기하려면 너무 깁니다.(웃음) 다만 말씀해 주신 '실패'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 드리면, 문학에 자기를 투신한다는 것부터가 일종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출세하려고, 돈 벌려고 문학을 하는 게 아니지요. 사회가 명령하고 재촉하는 일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실패고, 잘 만든 문학작품 서사의 거의 90퍼센트는 실패담이 차지합니다. 그런데 그 실패담이 어떤 성공에 대한 약속입니다. 문학이 바로 그 전형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