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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 읽는 연쇄 살인마가 당신의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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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 읽는 연쇄 살인마가 당신의 친구… ?

[김용언의 '잠 도둑'] 데이비드 고든의 <시리얼리스트>

해리 블로흐는 한때 시인의 원대한 꿈을 가슴 깊숙이 품고 있었으나 지금은 포르노와 싸구려 미스터리·SF·뱀파이어 판타지 소설을 쓰고, 대필 작업과 매우 사적인 가정교사 일로 근근이 먹고 산다. 이런 남자를 좋아하는 건지 딱하게 여기는 건지, '제자' 중 한 명인 열 다섯 살 소녀 클레어는 동업자를 자처하며 해리의 다중생활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물심양면 돕는다.

어느 날 해리에게 편지가 온다. 젊은 여성들을 잔혹하게 토막 낸 다음 그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던 '포토 킬러' 연쇄 살인마 대리언 클레이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다. 대리언은 자서전 독점 출간을 조건으로, 감옥으로 수없이 편지를 보내오는 열성적인 여성 팬들을 대신 만나 인터뷰하고 그녀들의 성적 판타지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적 포르노 소설을 써달라는 요구를 한다. 해리는 악마를 위해 일하는 게 내키지 않지만 대리언의 자서전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억지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그리고 해리가 만난 여자들은 모조리, 그 옛날 대리언의 방식 그대로 끔찍하게 사지절단된 채 발견된다.

▲ <시리얼리스트>(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검은숲 펴냄). ⓒ검은숲
<시리얼리스트>(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검은숲 펴냄)의 가장 큰 매력은, 2013년의 독자들에게는 이미 박제된 활자로만 남아있는 1940~1950년대 펄프 컬처의 시대를 풍성하게 되살린다는 데 있다. 주인공 해리 블로흐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처럼 혹은 미키 스필레인의 마크 해머처럼 가는 곳마다 매력적인 여자들을 만난다. 눈 튀어나오게 아름다운 그녀들은 모두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안달한다(무엇보다 영화 <킥 애스>의 '힛 걸' 클로이 모레츠를 뛰어넘을 것만 같은 10대 소녀 클레어는 홈즈의 조력자 왓슨의 존재감에 필적하는 매력을 쌍검처럼 휘두른다).

또한 심약한 해리가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끌어 모아 대적하는 남자는 토머스 해리스의 한니발 렉터(<양들의 침묵>)의 세속화된 버전이자, <싸이코>(로버트 블록 지음, 정태원 옮김, 도서출판다시 펴냄)의 노먼 베이츠와 <프롬 헬>(앨런 무어·에디 캠벨 지음, 정지욱 옮김, 시공사 펴냄)의 잭 더 리퍼와 <허니문 킬러>(실존 살인마 커플 '론리 하츠 커플'을 모델로 한 레오너드 캐슬의 1969년 영화)의 희미한 모방자 중 한 명이다. <시리얼리스트>의 전반적인 톤이 경쾌한 문학청년의 그것이다 보니, 연쇄살인마 대리언 클레이마저도 무시무시하다기보단 할리우드 최신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적당히 매력적인 중년 배우가 힘을 좍 빼고 느물거리며 연기하는 어떤 익숙한 캐릭터를 보는 듯하다.

풍문으로만 전해 들었던 펄프 잡지 <블랙 마스크>나 <위어드 테일즈> 특유의 선정적인 분위기도 한 몫 한다. 그러니까 해리 블로흐가 갖가지 정체성으로 집필한 여러 글들이 소설 중간 중간 적절한 변주로 끼어드는데…. 잡지 <론치>의 칼럼 '잡년 조련사'를 쓰던 톰 스탱스 풍의 소프트코어 포르노 소설과 J. 듀크 존슨의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모르드카이 존스 시리즈'의 <더블 다운 듀스>, 시빌라인 로린도 골드의 '사샤와 아람과 아이비 뱀파이어 시리즈' <진홍빛 밤과 안개>, T. R. L. 팽스트롬의 '조그 SF 시리즈'의 <오, 매춘선 선장이여,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발췌한 챕터들은, 해리의 끝없는 자조를 무마하는 동시에 해리가 경험하는 미스터리와 맞아떨어지는 섹스와 폭력과 배신과 욕망의 디테일을 휘황찬란하게 변주하며 팽창시킨다. 그건 이 변덕스러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충실한 존재들인 '이쪽 장르' 독자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해리(와 스탱스와 존슨과 로린도 골드와 팽스트롬)의 싸구려 소설이 비로소 획득할 수 있었던 "자존감의 비결"이자, 비교적 단순한 원안의 <시리얼리스트>를 구원한 귀중한 보철장치다.

현란한 입담과 적절한 향수 자극과 남들이 보기엔 무용하기 짝이 없는 공통의 잡학 지식을 확인할 수 있는 뜨거운 동지애가 뒤섞이며, <시리얼리스트>는 최근 읽은 미스터리 소설 중 가장 유쾌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 미스터리 자체의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펄프 픽션과 대도시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황금기에 대한 절절한 향수와 동경이 빚어낸 메타 펄프 픽션으로서의 매력이 훨씬 크다. 1992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혜성 같은 등장 이후 싸구려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는 게 '오타쿠'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너무 손쉬운 방법이 된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공통점이 <시리얼리스트>의 매력을 깎아 먹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글로 벌어먹을 수 있는 모든 짓을 경험해봤던 작가 데이비드 고든은 눈물겨운 굶주림의 시절을 손쉽게 떠벌리지도 않고, 온갖 싸구려 장르소설에 대한 애정과 자조를 적절한 수단으로 활용할 줄 알며, 결정적으로 느끼해지는 순간마다 강력한 웃음을 흘리며 재빨리 꼬리를 감출 줄 알고, 통속성의 매력을 지극히 통속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되살리는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했다. 고든의 소설 <시리얼리스트>는 타란티노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만큼이나 신나는 데뷔작이다.

(그리고…말이 나와서 말인데 솔직히 <트와일라잇> 시리즈보다 시빌라인 로린도 골드의 <진홍빛 밤과 안개>가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고든의 '아이비와 아람' 스핀 오프 시리즈를 원한다. 소설 말미, 아름다운 아가씨(중 한 명)가 해리 블로흐에게 외치는 응원처럼 말이다. "글을 계속 쓰세요. 우린 당신이 필요해요.")

▲ 레오너드 캐슬의 영화 <허니문 킬러> 포스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시리얼리스트'라는 원제대로 출간할 수밖에 없었을 고충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시리얼리스트>는 싸구려 '연재물'이 대중들의 가장 큰 오락거리였던 시대에 대한 러브레터이자, 클리프 행어에서 무자비하게 문장을 끝내버리며 '다음 호에 계속'이라는 약속으로 독자들의 탄식을 자아내는 연재물과 어떤 정신병자의 연쇄 살인이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명시하기 때문이다. 살인마는 왜 그(그녀)를 죽였을까? 무작위로 보이는 이런 무질서한 살인 행위의 의미는 다음 번 희생자에서 확실해지지 않을까? 살인마는 이번보다 좀 더 대담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게 될까? 그 '구경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발생할 것인가? 텔레비전과 신문과 인터넷 너머 숨어있는 무작위 독서 대중들의 호기심은 연재물을 쓰는 작가와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악마 모두를 추동한다. 양쪽 모두, 그 형체 없는 호기심의 동력에 떠밀린다.

"만약 그 사람이 선생님에게 독점으로 자백하면, 우린 수십만 달러를 손에 쥘 수 있어요. 그것도 선인세만으로요. 슈퍼마켓에서 주로 팔리는 페이퍼백도 있고, 타블로이드 신문에 발췌된 부분이 실릴 수도 있어요. 또 누가 아나요? 우리가 연쇄물로 갈 수도 있을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뭐가요?"
"연쇄 살인 같잖아."
"아,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서부턴 좀 조심스러워져야 한다. 이렇게까지 단숨에 말하고 나면 마치 '그 소년은 공포영화 <호스텔>을 보고 살인을 저지르고 싶었다더라'며 대충 써 갈기는 사건기사와 다를 바 없을 텐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 대리언 클레이가 하필이면 해리 블로흐를 자신의 대리자로 골랐던 이유다. 그는 싸구려 대필작가 해리를 조종함으로써 자신의 사적인 쾌락과 사형 집행 연기라는 더 큰 목적 두 가지 모두를 성취하려 했지만, 대리언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제정신의 영역에 위치한다. 모든 걸 종이 위에 적음으로써 망각으로부터 세상을,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구하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선혈 낭자한 섹스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의 지고의 예술적 가치를 찾았다고 믿는 대리언과, 똑같이 (그러나 '현실'이 아니라 상상된) 섹스와 폭력의 세계로부터 돈을 벌어 먹고 살던 해리의 차이는, 자신의 강박에 함몰되느냐 아니면 한 발자국 물러서서 관조할 수 있는가의 차이였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재물'에도 질적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제 분명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쓰레기 같은 살인마의 고백록을 들어줄 만한 여유가 어디 있냐고. 그러니까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대체 왜 이런 책을 읽느냐고. 왜 사람이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그래서 결국은 범인이 잡히거나 (현대에 넘어와서는) 잡히지 않고 자신의 강박적 살인론을 장광설처럼 고백하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낭비하냐고.

순수한 문학이 그리웠지만 생계를 생각하면 변태들과 멍청이들을 위한 글을 쓰기 위해 재능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책은 하나의 숭배 대상이 됐고 오직 숭배자들만이 책을 읽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신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서 지적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인도와 일본과 한국의 불교를 비교 분석하며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밤이면 밤마다 수학자 푸앵카레의 '추측' 난제를 풀어보려 이리저리 궁리할 때의 그런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안에서 충분히 즐겁고, 이 안에서만 나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몰입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진지하게 평행우주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나는, 현실의 평범한 내가 아니라 가련한 희생자이자 숨막히는 서스펜스로 뒤쫓기는 억울한 용의자이자 예리한 탐정이자 자신만만한 범죄자가 되어 흥분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같은 가공의 삶을 그토록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재능이다. 작가처럼, 위대한 범죄자처럼, 우리 독자들 역시 그같은 재능을 타고난 것이다. 데이비드 고든의 <시리얼리스트>는 '그런' 책을 쓰는, 그리고 '그런' 책을 읽는 모두를 위한 기나긴 논고이자 사용 설명서이자 우정의 편지다.

우린 왜 읽을까? 책을 처음 접했던 어린 시절, 왜 우리가 사랑하는 그 책들에 빠지게 된 것일까? (…) 내가 글을 읽을 때면 책장 속의 단어들이 내 머릿속의 목소리를 대신했고,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내가 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멈출 수 있었다. 진짜 독서가들, 마니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황홀함에 빠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 받는 대상을 숭배하는 것처럼 허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다. 읽는 데 이유 따위는 없다. (…) 뱀파이어를 사랑하며, 과학 소설에 빠져들고 미스터리에 중독된 장르 소설 독자들은 인간 본성을 간직한 원시 종족들로, 순수하지만 독특하다. 그들은 여전히 어린애처럼 어리석고 엄숙하게 읽고, 십 대 청소년처럼 절박하고 용감하게 읽는다. 장르 소설 독자들은 스스로 절실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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