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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난 '박쥐떼', "상상을 초월한 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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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난 '박쥐떼', "상상을 초월한 저 디자인!"

[꽃산행 꽃글·71] 최근에 만난 나무 몇 그루

1. 탱자나무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광화문 교보문고 앞을 지나다가 저 글귀를 보는데 하필이며 탱자나무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마을. 국민학교로 가는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집으로 가는 골목에는 탱자나무가 있었지. 탱자나무는 그리 키가 크지 않아 겨우 담 부랑 위로 삐쭉이 올라왔지만 그때의 내 키로는 제법 오르기 힘들었다. 주인이 떠나고 폐가가 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뿌리가 뽑혔다. 가을에 노란 탱자 열매를 탱자 가시로 찌르면 세상에서 가장 시큼털털한 탱자 맛!

국민학교는 딱딱한 건물이었지만 폐교된 지 오래. 코스모스는 코스모스. 해마다 몸을 새로 갈아 입는 코스모스만이 올 가을에도 제자리를 기억했다가 피어나겠지. 일년초라서 가장 오래 사는가.

탱자나무는 탱자나무. 울타리 없는 광화문에서는 자랄 일이 없는 나무. 그 나무를 떠올리면서 파블로 네루다의 저 시구를 읽자니 탱자 맛이 생각나 침이 고이고, 탱자가시가 나타나 나를 찌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였던 너는 지금 너이니?"

▲ 탱자나무. ⓒ박상무

2. 자귀나무

자귀나무는 작은 잎들이 쌍으로 나란히 달리는 이른바 짝수깃모양겹잎이다. 이 잎들은 해가 지면 수면(睡眠) 운동을 한다. 잎맥을 축으로 좌우의 잎들이 서로 포개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귀나무를 합혼목(合婚木)이라고도 한단다. 서로 사이좋게 딱 들러붙는 것을 보고 금슬이 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이다. 자귀나무는 북반구 열대, 온대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중국의 가장 서쪽인 신장 위구르 자치주를 여행하는 길. 카스에서 일박하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향해 가다가 소부현(疎附縣)의 어느 마을의 가게 앞에 차가 섰다. 그곳에는 수박이 가득 쌓였고 검은 화덕이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인 난을 구워 파는 가게였다.

가게는 예쁜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인이 젖먹이 아이를 하나씩 안고 지키고 있었다. 모녀일까. 여자 형제일까. 서로 많이 닮아서 분간이 잘되지를 않았다. 코를 마구 흘리는 작은 아이가 우리를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몇 십 년 전 우리 고향 마을에서 서성거렸던 내 어릴 적 모습을 꼭 닮은 꼬마.

그 가게에는 사내라곤 없었다. 대신 자귀나무 한 그루가 우람히 자라고 있었다. 간판을 단다면 '자귀나무 난 가게'라고 하면 맞춤할 것 같았다. 따끈따끈한 빵맛은 아주 좋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 일행을 가게 사람들은 정답게 맞아주었다. 카메라 앞에서도 싱그럽게 웃어주었다. 손도 흔들었다. 총명한 아이들과 따뜻한 빵, 무엇보다도 이 상냥한 아내를 두고 대관절 남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 자귀나무 잎들도 밤이면 서로 딱 들러붙을 텐데!

▲ 타클라마칸 사막을 향해 가다가 들른 소부현(疎附縣) 어느 마을의 빵가게. ⓒ이굴기

▲ 자귀나무. ⓒ이굴기

3. 박쥐나무

산속을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저런 나무 만나면 어찌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으랴. 그리하여 나무 이름을 잘 아는 어떤 분이 앞장서서 걷다가 "야, 저기 박쥐나무!" 소리치면 진짜로 박쥐 수십 마리가 매달려 있는 듯 박쥐나무가 숲에 의젓하게 서 있는 것이다. 동굴 속의 박쥐라면 오금이 저릴 법도 하겠지만 이것은 순하디 순한 식물!

아무런 주저 없이 가까이 가서 잎을 보면 정말 박쥐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양이다. 박쥐는 시방 머리는 어디에 감추었을꼬? 그리하여 어느 날엔 운이 좋아 이처럼 박쥐나무 꽃을 보기도 한다.

꽃은 색상이 그리 요란한 것은 아니지만 그 형태가 단연 독특하다. 꽃 花. 이 한자(漢字)는 꽃잎 8장이 슬기롭게 조화를 이루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일진대, 박쥐나무 꽃은 그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디자인인 것이다.

노란 수술은 아래로 길게 늘어지고 하얀 꽃잎은 바깥으로 똥그랗게 말린다. 박쥐가 어두컴컴한 천장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천의무봉하게 허공에 매달리는 박쥐나무 꽃잎을 보라!

▲ 박쥐나무. ⓒ박상무

4. 꼬리진달래

영월의 녹천중학교에서 운교산으로 오르는 뒷산은 그야말로 깔딱고개였다. 가볍게 생각했다가 큰 코만 다칠 뻔 했다. 겨우겨우 한 능선을 밟았는데 그 나무가 있었다. 전체적인 수형(樹形)은 진달래와 너무 흡사한데 꽃은 확연히 구별이 되는 나무. 흰 꽃이 가지 끝에 다닥다닥 뭉쳐 있고, 수술은 꽃잎보다 도드라지게 뾰쪽하다. 꼬리진달래였다.

오르기도 어렵지만 내려오는 데도 그만큼 땀을 쏟아야 했다. 녹천중학교 운동장 수령 360년의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캔 맥주를 따다가 퍼뜩 알아차렸다. ㅆ ㅆ ㅆ ㅁ ㅁ ㅁ ㄹ ㄹ ㄹ. 지금 귀를 찾아오는 이 손님은 올해 처음 듣는 매미 소리가 아닌가.

모가지를 잡아 째듯 시원하게 한 모금 넘기는데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7)의 하이쿠 한 소절이 떠올랐다.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 꼬리진달래. ⓒ이굴기

5. 정금나무

정금,이라고 부르면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 가시내 이름 같기도 하지만 정금, 이라고 중얼거리면 입에 침부터 먼저 고이는구나. 어느 석박의 능선. 물이 잘 빠지는 거뭇한 바위 틈에서 정금나무는 잘 자랐다.

소 먹이러 갔을 때 후두둑 후두둑 깜보랏빛으로 익은 열매를 따먹었다. 어느 땐 익기를 기다리지 못해 띵띵한 초록의 설익은 열매를 먹기도 했다. 그때 퍼지는 알싸하고 시큼한 냄새. 정금나무의 키는 그리 높지도 않아서 내 어깨에 내 팔을 더하면 아주 따 먹기 좋은 위치였다.

정금나무의 잎은 털이 빽빽하고 가장자리엔 붉은 핏빛이 감돈다. 그 꽃을 몇 십 년 만에 보았다. 먹을 것만 탐하던 나의 눈엔 그동안 열매만 들어왔던 것일까. 꽃은 마치 작은 종처럼 가지런히 아래를 향해 달려있다. 소 턱 밑에 달린 작은 워낭처럼. 정금나무의 꽃을 톡 건드리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려나오고 그 소리를 따라가면 내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을까.

도감을 보니 정금나무는 진달래과. 내 이제사 알겠다. 참꽃이라 하여 그 꽃을 참 많이도 따먹은 진달래와 늘 사이좋게 가까이 어울려 있던 연유를!

▲ 정금나무. ⓒ박상무

6. 나뭇잎 한 장

나무 아래에서 나뭇잎을 관찰해 본다. 잎자루가 가지에 딱 들러붙어 있는 떡갈나무 같은 것도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대부분 가는 잎자루에 잎이 둥글게 달려 있다. 되도록 햇빛을 많이 쬐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작은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손잡이가 가늘고 길쭉할수록 부채가 바람을 잘 생산하듯 잎자루가 가늘고 길고 잘록해야 나뭇잎은 잘 흔들린다. 아시다시피 나무는 잎의 뒷면에 난 기공을 통해 숨을 쉬고 신진대사를 하는데 잎이 잘 흔들려야 이들의 순환이 잘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무가 잎을 살랑 흔드는 것은 우리가 유리창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는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한편, 잎자루가 잘록하고 그래서 나뭇잎이 잘 흔들리도록 설계된 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봄, 여름, 가을을 거쳐 흔들릴 대로 흔들린 나뭇잎. 이제 그 잎이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떨어지고 싶을 때. 서슴없이, 간단히, 아주 쉽게. 어느 순간 툭, 가볍게 떨어지기 위해서이다. 미련도 없이, 상처도 없이.

나뭇잎을 쳐다보다 모가지가 아파 고개를 아래로 떨구면 나의 몸에도 그런 장치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도 두 군데나 있는 것을. 그 중에서도 맨 아래쪽은 아주아주 잘록한 발목!

▲ 난티나무의 잎. ⓒ이굴기

7. ……그리고 열매

가로수 사이사이로 구멍가게가 있고 그 구멍의 입구마다 자판기가 서 있는 건 흔한 풍경이다. 그 아래로 누구나 와서 동전이나 지폐, 즉 돈을 넣으면 나온 건 동그란 종이컵이나 깡통. 돈은 원래 동그랗게 생겼고 깡통도 그런 형태였기에 떼굴떼굴 굴러 나올 수가 있다.

며칠 전 서울의 하늘에서는 무슨 쑥덕공론이 있었나 보다. 그것을 주재하는 둥근 태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큰소리가 났었다. 오후 3시 무렵. 멀쩡하던 대낮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그리고 우르릉 쾅! 쾅! 쾅! 동그란 물방울처럼 둥글고 둥근 소리들이 비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이제 둥글게 순환하는 계절에서 가을이 오면 그 소리와 비를 받아먹고 훌쩍 자란 은행나무는 그 둥근 것들의 자식인양 알알이 익은 열매, 은행을 동전처럼 들고 구멍가게 문을 두드릴 것이다.

▲ 마가목나무의 열매.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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