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이승만이 비운 국회의장 자리에 신익희가, 신익희가 비운 부의장 자리에 김약수가 선출되었다. 8월 5일에는 대법원장 김병로의 인준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20일 정-부통령 선거와 8월 2일 이범석 국무총리 인준안의 통과에 이어 새 정부 3부의 수뇌부가 모두 짜인 것이다.
정부 조직의 큰 틀이 짜인 뒤 국회가 첫 번째로 착수한 과제가 친일파 문제였다. 8월 5일 제40차 본회의는 민족 반역자 등을 처단할 특별법안 기초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했다. 헌법 제101조 실행을 위한 첫 조치였다. 각도에서 3인씩(제주도는 1인) 뽑아 28인으로 기초특위를 만들었고, 8월 6일 첫 회의에서 김상돈과 김웅진이 위원장과 부위원장으로 뽑혔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7일 "친일-반역자 처단의 날은 온다-특위 28명 선정")
8월 6일 이후 12인 소위원회가 6인 전문위원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검토하여 8월 12일 특위 전체회의에 보고했다. 친일파 처단 문제는 그 실행이 미군정에 가로막혀 있을 뿐 민족 사회의 가장 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걸려 있던 것이기 때문에 법안 작성을 위한 준비는 실제로 다 되어 있는 셈이었다. 1947년 7월 20일 입법의원에서 통과시켰으나 미군정에 묵살당한 "부일 협력자 등에 관한 특별법" 법안이 일차적 기준으로 고려되었다.
"직위 여하를 불문, 반민족 행위 처벌-친일 반역 도배 처단 법안 내용"
국회 특별위원회에서는 12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전체 회의를 개최하고 부일 협력자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한 법안의 최후적인 토의를 하였다.
동 법안 기초에 있어서는 그간 재경 위원들은 수차에 걸쳐 회합 토의한 결과 전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 통과를 본 그 안을 수정하여 채택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었으나 12일에 개최된 전체 회의에서 다시 토의한 결과 동 특별위원회 전문위원인 고병국 의원의 초안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채택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런데 동 법안은 전문 13조로 되어 있으며 부칙으로 특별조사위원회 및 특별재판소를 설치하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처벌의 종류로는 징역, 공직 추방, 재산 몰수, 공민권 박탈, 벌금형 등으로 구별되어 있으며 과거 입의 안과 같이 직위 도는 지위에 중점을 두지 아니하고 직위나 지위의 상하를 불문하고 반민족적 행동을 감행한 자는 전부 처벌하기로 되어 있는데 동 안은 내 16일부터 속개되는 국회 본회의에 정식 상정하여 토의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13일)
기초특위에서 8월 13일까지 확정한 본회의 제출용 초안은 3장 32조로 구성되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6일) 원래의 초안에서는 부칙에 들어가 있던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소에 관한 내용이 제2장 "특별조사위원회"와 제3장 "특별재판부 구성 및 수속"으로 확충된 것이다. 본회의에서는 약간의 수정만을 가해 9월 7일 통과시키게 된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8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처단 기준에서는 관대한 편이라는 세평이었지만,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재판부 등 강력한 실행 수단을 확보했다는 데 두드러진 성취가 있었다. 반민특위가 정권의 심한 비협조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업적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실행 수단이 법적으로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법치를 정면으로 뒤집는 조치를 거듭 취해야 했다.
해방 3년 만에 제정된 반민법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던가. 친일파 처단은 두 개 차원에서 의미를 가진 과제였다. 나쁜 행위를 응징한다는 정의 차원과 식민 통치 체제를 청산한다는 정치 차원이다. 정의 차원의 처벌은 형벌 불소급의 원칙에 저촉될 수 있다. 행위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법률로 처벌할 필요는 정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와 도쿄 등지의 전범 재판에서 소급 처벌의 정치적 필요가 확인되어 있었다. 법학자가 이 필요를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 필요는 매우 중대한 것이었다. 국가 규모로 일어나는 범죄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제정하는 법률이 충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선에도 친일파 처단을 위한 정치적 필요가 컸다. 일본의 식민 통치가 빚어놓은 엄청난 규모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소-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정법 차원을 넘어서는 혁명적 조치가 필요했다. 외세에 의지해서 민족 사회를 해치는 행위가 당시의 실정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실정법 체계라는 것이 일본에게 강요당한 것이며, 민족 사회의 기준으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친일파가 친일 행위를 통해 구축해 놓은 재산-학력-경력에 견제를 가할 실제적 필요가 있었다. 아무런 견제 없이 자유 경쟁을 펼칠 경우 친일파 집단은 조선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어 있었다. 친일을 통해 확보한 우위를 이 집단이 그대로 유지한다면 친일의 정신이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 집단 구성원들이 갖춘 '실력'은 활용하더라도, 그 집단이 똘똘 뭉쳐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서 활보하게 놓아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식민지배에서 정말로 벗어나려면.
당시의 일반인에게는 너무나 명쾌하고 단순한 과제였다. 지금까지 겪어 온 식민 지배라는 '나쁜 시대'를 벗어나 민족 독립이라는 '좋은 시대'를 맞으려면 나쁜 시대에 대한 나쁜 놈들의 책임을 따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엄격하고 너그러운 것은 둘째 문제였다. 따질 것 따진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일본인 섬기며 민족 사회를 괴롭히던 자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계속해서 거들먹거린다면 '해방'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군정 당국자들은 조선인을 해방된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인 대신 자기네들이 조선인을 지배하러 와 있는 것이었다. 일본인 잘 섬기던 자들은 자기네 섬기는 데도 솜씨가 좋았다. 그래서 3년간 친일파 처단을 극력 가로막았다. 일본 제국주의 추종자에 대한 처단이 세상에서 제일 철저하게 가로막혀 있던 곳이 남조선이었다.
1946년 말에 개원한 입법의원에는 미군정의 지원과 보호를 받는 친일파 집단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입법의원에서도 "부일 협력자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민심의 압력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세력 주류가 외면한 제헌국회도 친일파 처단을 향한 민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구성이었다. 그러나 민심이 워낙 압도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민법 제정을 첫 번째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반민법을 서명하지 않고 국회에 돌려보낼 기색을 보이다가 9월 22일에야 서명하고 공포했다. 그에 앞서 9월 14일 전 공무원을 중앙청광장에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승만의 훈시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내가 1945년 10월에 귀국하자 각 방면으로부터 제일 먼저 제시된 것이 이(친일파 숙청) 문제였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이런 문제는 외정 하에서는 해결키 곤란한 문제이니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에 우리끼리 해결 짓자고 말하여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일반은 이제 우리 정부가 섰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여론이 또 다시 있는 듯하나 친일 분자 처벌 문제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으니 그 문제를 해결 후에 하는 것이 좋을 줄 안다. 급한 문제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토대를 든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은 참은 김에 좀 더 참아주어야 하겠다." (<동아일보> 1948년 9월 15일)
"토대를 든든히" 한다는 것이 '반공'을 완성한다는 뜻일 텐데,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놓으면 든든한 토대에 안심하고 친일파 처단을 할 수 있다는 말일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로 시작해서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다가 결국 할머니까지 잡아먹었다는 호랑이가 생각난다.
김구가 반탁 운동에 집착한 것이 민족주의자로서 큰 실수였다는 의견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만큼 두드러진 일이 아니지만 민족주의자로서 김구의 자격을 더 깊이 의심케 하는 발언이 있었다. 귀국 직후 기자 회견에서 문답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문 : 통일 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에 대한 문제는?
답 : 통일 전선을 결성하는 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줄 안다.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므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
A+B = B+A. 수학에서 교환의 법칙이라 하던가? 수학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인간 사회와 같은 복잡계에서는 경로 의존(path dependency)의 법칙에 밀리게 되어 있다. 정부 수립 과정에 친일파의 참여를 허용하느냐 여부는 수립된 정부가 친일파 처단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크게 좌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족주의 태두로서 권위가 쌩쌩하던 김구가 이렇게 석연치 않은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친일파 척결이 좌익의 구호처럼 되어 버렸다.
이승만이 도덕성은 형편없지만 정치 감각만은 뛰어난 대중정치가로 평판을 누린다. 그런데 정부 수립 시점에서 친일파 처단을 바라는 민심에 편승하지 않은 것은 이 작업을 마무리하는 지금까지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장택상 계열의 악질 경찰을 앞세워 반민특위를 박살내는 대신 마음에 없는 민족주의 깃발이라도 열심히 휘둘렀다면 최대의 경쟁 세력인 한민당을 가볍게 누르고 최고 권력자의 위치를 더 편안하게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이승만의 도덕성만이 아니라 정치 감각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후 12년간 그의 정치적 선택을 보면 도덕적 기준만이 아니라 실용적 기준에서도 납득할 만한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12년간이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미국에게 다른 대안이 없어서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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