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가장 흔히 만나는 식물은 무엇일까. 식물에 관한 한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를 벗어난 주제에 무식하게 용기 내어 의견을 밝힌다면 아마도 조릿대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조릿대는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나 무성하다. 산에 들어섰다가 조릿대 한번 안 보고 빠져나올 수는 도저히 없는 법이다. 그만큼 조릿대는 흔하게 발끝에 차인다.
사시사철 늘 푸른 조릿대. 어릴 적 시골 마을에서 뛰놀 때 참 흔하게 보았던 조릿대. 그저 작은 대나무라고만 알았던 조릿대. 어쩌다 숨바꼭질이라도 할랴치면 그 덤불속으로 작은 몸을 콩닥콩닥 숨기기도 했던 조릿대.
▲ 조릿대가 안내하는 길. ⓒ이굴기 |
솥단지 걸고 가정을 이루고선 아이들 데리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럴 때 어느 절이나 서원의 모퉁이를 돌 때 소슬하게 좁은 길을 안내하던, 그 어딘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어떤 길이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기도 하던 조릿대.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도 있다는 듯 저의 야위고 푸른 손바닥을 펴서 은근히 그 방향을 가리키던 조릿대.
내가 조릿대를 조릿대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2년 전 태백산 꽃산행에서였다. 천제단에서 내려와 단종비각을 지나 반재로 내려올 때였다. 예전의 기억이라면 우측 경사면으로 조릿대 숲이 광활하게 펼쳐져야 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항상 단단하고 야무지고 늘 시퍼렇기만 할 것 같은 조릿대가 모두 누렇게 말라죽지 않았겠는가.
▲ 죽은 조릿대. ⓒ이굴기 |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로 얼핏 이런 말을 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면 조릿대가 죽는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도 퍼뜩 생각이 났다. 근 60년 만에 꽃을 한 번 피운다는 대나무. 그 대나무에 꽃이 핀 다음 해에는 큰 기근이 온다고 했다. 그때 나는 이곳 태백산에서 가까운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흘러가는 낙동강의 딱한 처지를 떠올렸던가?
조릿대는 개체수가 많아 보이지만 지하에서는 모두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모두가 공동 운명체인 것이다. 그리고 일생일화(一生一花)이다. 평생에 딱 한번 꽃을 피운다. 평생에 걸쳐 딱 한 번 피운다는 조릿대의 그 꽃을 나는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조릿대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고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작년 가을. 지리산 아래 반선 마을에서 작전 도로를 따라 벽소령으로 오르는 길에서였다. 자벌레, 애벌레 등이 오미자 잎사귀에서 뒤집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오르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활짝 핀 조릿대의 꽃을 보았던 것이다. 큰 군락은 아니었고 호젓한 길가의 당단풍나무 옆에 조심스레 낑겨 피어난 몇 그루였다.
조릿대의 꽃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조릿대라면 무더기로 있어 끈질기고 강인하고 까칠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잎사귀만 하더라도 날렵한 단도처럼 달려있어 찌르거나 베는 데 안성맞춤인 인상을 주지 않던가. 그리고 그 잎들은 넌출넌출 아득히 경사면 아래위로 휙 돌아가지 않던가.
그러나 조릿대 꽃의 색상이 잎사귀의 그것을 전혀 닮지 않은 것처럼 꽃 또한 이제껏 본 것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것은 벼과 식물이라서 그런지 나락 알갱이처럼 혹은 굵은 땀방울처럼 여린 가지에 하나하나 달려 있었다. 그래도 보라색의 겉겨가 보호하는 가운데 노란 암술과 수술이 까끌까끌하게 수줍게 맺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꽃이라기보다는 이삭에 가까운 듯 했다.
조릿대 꽃을 지리산에서 처음 보았다는 인연이 작용한 것이었나 보다. 조릿대 꽃이 수명을 다해서, 그리하여 마르고 뒤틀린, 다시 말해 조릿대의 죽은 꽃을 본 것도 지리산에서였다. 그러고 보면 조릿대의 뿌리가 땅밑에서 하나로 이어지듯 조릿대의 생과 사는 땅 위에서 나를 통해 서로 연결된 것이었을까?
몇 발짝을 가는데 경주에서 오신 꽃동무가 잠시 멈췄다. 걸어다니는 식물도감이라고 하는 분이다. 그의 손가락이 생강나무 가지처럼 뻗으며 나의 눈을 덤불 속으로 데리고 갔다.
"저기 좀 보세요. 조릿대 꽃이 죽어 있네요!"
▲ 조릿대 꽃. ⓒ이굴기 |
▲ 조릿대 죽은 꽃. ⓒ이굴기 |
산을 오르고 내릴 때 울긋불긋한 꽃과 잎과 그 사이를 게으르게 돌아다니는 곤충을 보는 것도 황홀한 일이긴 하다. 나무의 겨울눈과 키를 재보는 것과 연두에서 녹색까지 현란하게 펼쳐지는 색의 프리즘을 만끽하는 것을 또한 말해 뭣하랴.
식물의 꽃과 잎, 곤충의 날개와 비행, 동물들의 똥과 발자국. 우리 땅의 풍경을 엮고 조립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연은 그것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슬쩍 한 발짝 떨어져 눈길을 내리깔았을 때, 조릿대가 어울려 휘돌아가는 길. 헐레벌떡 구비를 꺾어 돌며 숲으로 사라지는 길 하나가 공중에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 풍경은 우리 마음에 난 길과 어디 감쪽같이 접속하지 않던가. 탈속한 방향으로 가는 입구를 가리키는 듯한 그 길이 빠진다면 그건 온전한 우리 산하의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용운 선사는 절창 <님의 침묵>을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길은 길을 부르는 법이다. 차마 떨치고 가는 발길을 붙들기도 하면서 좌우에 빽빽한 조릿대. 지리산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를 때 마지막 깔딱고개를 올라서려면 조릿대는 목적지인 코재를 얼마나 아늑한 둥지로 만들어 주던가. 그리고 오늘은 만해의 후예라 할 나의 꽃동무들이 푸른 산빛을 깨치고 지리산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또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다. 조릿대와 어깨를 견주면서, 조릿대 잎에 옆구리를 찔리면서. 서걱서걱 '님의 침묵'을 깨뜨리면서!
▲ 화엄사에서 노고단 능선에 오르는 마지막 고비인 코재.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을 보면 조릿대는 공중을 아늑한 둥지처럼 만들어준다. 이제 몇 걸음 더 놀려 저 구멍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순간만이 남았다. ⓒ이굴기 |
▲ 조릿대 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꽃동무들.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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