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 태국은 외국인 직접 투자가 물밀듯이 유입되었고, 국내 자본의 투자도 급증해 새로운 신흥 공업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과잉 투자는 버블을 만들었고 그 버블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태국 경제는 구조 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10년 동안 외형상 안정적 성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3년 전에 비해 태국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1990년 1480달러였던 1인당 소득은 2012년 5500달러로 증가했다. 상품 무역의 국내 총생산(GDP) 대비 비율은 1990년 63.5퍼센트에서 2011년에는 123퍼센트로 증가해 세계 경제 속에 더 깊숙이 편입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태국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문제는 전연 해결되지 않고 있고 그런 구조적 불균형을 만들어 냈던 원리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지금 벌어지는 쌀 가격 보장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다. 이 제도는 2011년 가을 수확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의 잉락 정부의 선거 공약으로 벼 1톤당 1만5000바트(한화 60만 원)에 정부가 수매하는 것이다. 벼 수매 가격 1만5000바트는 당시 시장 가격보다 60퍼센트 정도 높았다.
최저 가격제는 경제적으로 크게 두개의 문제를 만든다. 하나는 최저 가격이 시장 가격보다 높기 때문에 공급 초과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최저 가격 제도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지만, 제도의 운영 과정에서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부패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제학자들을 비롯한 시장주의자들은 초기부터 시장 기능을 왜곡시켜 경제적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이 제도를 비판했다. 정부의 포퓰리즘적인 쌀 가격 보증 제도 때문에 국가와 국민들은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비판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초과 공급만큼 수출을 하면 되지만 쌀 가격이 상승하면서 국제 시장에서 태국 쌀의 수출 경쟁력은 낮아졌다. 정부는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태국이 쌀을 비축하면 국제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쌀 소비국이 많지 않고 인도, 베트남 등이 쌀을 증산했기 때문에 태국 정부의 기대와 달리 국제 가격은 상승하지 않았다.
수출량은 2012년에 전년 대비 37퍼센트 이상 감소했다. 결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을 지출하여 전국의 2000개 양곡 창고에 1700만 톤의 쌀을 저장하고 있다. 쌀 가격 보장 제도에는 농민, 도정업자. 유통업자, 수출업자가 수직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농업부와 상업부 10여 개 기관이 관여하고 있다. 복잡한 유통 과정과 태국 정부의 투명성 수준을 고려하면 당연히 부패가 발생할 것이다.
마침 2013년 가을 수확기를 맞아 새로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이 제도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5월 쌀 가격 보장 제도 때문에 2011년 가을 수확기에만 2600억 바트의 손실이 났다는 재무부차관보가 위원장이 된 조사단의 조사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6월 말에는 정부가 2013년 가을 수확기 쌀 수매 가격을 1만5000바트(60만 원)에서 1만2000바트(48만 원)로 인하하겠다고 했다가 농민들의 반발에 다시 1만5000바트로 환원하기로 결정했다.
7월 2일에는 재무부 조사 책임자가 상원의 담당 소위에서 "모든 단계에서 부패가 있다"고 발언을 함으로써 소위 내부고발자가 되었다. 이에 수상이 발끈하여 증거를 대라고 나섰고 방콕의 언론은 재무부 차관보급인 조사단장을 영웅으로 취급하고 나섰다.
▲ 태국 정부의 쌀 수매 현장. ⓒkyominthai.com |
문제는 비판을 하는 측이나 비판을 받는 측도 장기적으로 태국 경제의 발전 방향에 이 제도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태국 경제는 지난 20여 년 동안 성장은 했으나 발전하지는 못했다.
공업화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의 65퍼센트는 여전히 농촌에 살고, 나머지 도시 인구 35퍼센트의 태반은 방콕에 거주한다. 전체 고용의 약 39퍼센트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제조업 고용은 14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제조업 생산은 GDP의 30퍼센트 이상이지만 농업 생산은 GDP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농업 노동자의 1인당 소득은 제조업 노동자에 비해 8분의 1 수준이다. 2011년 고용 조사에 의하면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사회 보장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는 고용이 전체의 62.6퍼센트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의 63퍼센트는 농촌 지역인 동북부와 북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65퍼센트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거나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결국 태국의 불균형 문제는 농촌의 문제, 낮은 농촌 소득으로 인한 교육 기회의 부족의 문제인 것이다.
일부 태국인들은 1980년대 말부터 "발전 없는 성장'에 대해 우려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는 기득권층의 성장 욕구에 의해 언제나 무시되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방콕의 중산층은 기득권층이 되었다. 이들은 같이 기득권층이 된 언론과 학계를 동원하여 시장 기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때로는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이유로 균형 정책을 비난했고 이들의 지원을 받은 정권들은 계속 성장 우선의 정책을 사용했다.
정책을 변경하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외환 위기가 어느 정도 안정되던 2001년 집권한 탁신 전 수상은 소위 탁신노믹스를 통해 경제 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탁월한 정치 감각에 기반을 둔 것이었지만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농촌을 개발하며,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 내수를 확대하여 대외 의존도를 줄여 삶의 질을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의료 보험 제도 등 복지를 확대했다. 그러나 그가 농촌이나 저소득층의 지지를 받을수록 파이를 나눠줘야 했던 기득권층이나 방콕의 중산층은 반발했고 결국 그는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시장 기구가 잘 작동하는 것은 경제 성장에 중요하다. 그러나 시장에만 의존한 경제가 균형 성장, 즉 경제 발전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태국의 소득은 증가했고, 대외 의존도는 증가했으나 경제적 불균형은 축소되지 않았다. 공업화에 의한 수출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조업의 고용 창출 효과가 낮고 경제는 성장하지만 그 성장의 과실이 농업과 농촌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방콕의 기득권층과 중산층은 시장을 강조한 대외 지향적 성장 전략의 혜택을 누렸고 농촌은 무시되었던 것이다.
쌀 가격 보장 제도는 농촌 소득을 개선하고, 내수를 확충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대외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태국이 지금처럼 초국적 기업 주도의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까? 방콕의 중산층으로만 국가 경제를 이끌고 갈 수 있을까? 쌀 가격 제도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어떻게 최소화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23년 만에 다시 보는 태국의 불균형 문제와 쌀 가격 보장 제도를 둘러싼 논쟁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있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화요일, 일요일 동시 게재합니다. 박번순 홍익대학교 초빙교수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2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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