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연재는 <낮은 한의학>(사이언스북스 펴냄) 책으로도 묶여, 시민과 소통하려는 한의사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련 기사 : 정조 독살은 헛소리! 홍삼의 불편한 진실!) 이상곤 원장은 '낮은 한의학' 시즌 2에서는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조선사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은 광해군입니다. 극단의 평가를 받는 광해군, 과연 그의 심신의 건강은 어땠을까요? (☞관련 기사 : 광해군의 건강학 ① 전쟁 후유증을 여색으로 치료? 로맨티스트는 없었다! ② 불편한 진실…"광해군은 미쳤었다!")
조선 최고의 침의 허임
즉위 10년 광해군은 "내가 평소부터 화증이 많은데 요즈음 상소와 차자(箚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가 번잡하게 올라와 광증(狂症)이 생겨 살펴볼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질병을 화증을 넘어 광증에 이르고 있다고 자가 진단한 것.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이후 6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는 불안증과 그릇된 질병관은 그의 심신을 괴롭혔다.
그래도 광해군이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까지 장수한 것은 침의 위력 때문이다. 그는 무속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한편 침구 치료에 매달렸다. 그의 곁엔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 허임이 있었다. 허임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과 더불어 분조 활동을 하면서 생명을 같이한 전우였다.
각 기록에 조선의 명의로 이름을 올린 허임은 선조를 침으로 치료한 공으로 상인 출신임에도 어의(御醫)와 부사까지 지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그 진가를 인정받는 <침구경험방>의 저자이기도 하다. 광해군 즉위 2년의 기록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침의였는지를 드러낸다.
"침의 허임이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데 위에서 전교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오만하게 집에 있으면서 명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군부를 무시한 죄를 징계하여야 하니 국문하도록 명하소서."
이뿐만 아니다. 광해군 6년에는 사간원이 아뢴다.
"어제 임금께서 '내일 침의들은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를 하였습니다.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자기 편리한 대로 한 죄는 엄하게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 차례 사간원의 요청이 있었지만 그의 행동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한술 더 떠 허임은 치료를 잘한 공로로 가자(嫁資), 즉 포상금까지 받는다.
조선 시대 불세출의 명의이자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허준조차 침에 관해서는 허임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선조 37년 허준이 임금의 물음에 답한다.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허준의 나이 58세, 허임의 나이 34세 불과한 점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칭송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초기에 궁중에 들어와 광해군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왕의 총애를 받은 허임 침구법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기록에 따르면 허임은 침을 놓는 기법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선조 37년 실록은 "선조가 편두통을 앓자 허준은 병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 자리를 잡았으며 허임은 침을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기록으로 미뤄 허임은 침 자리나 침에 대한 이론보다 침을 놓는 실제 방법을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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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살린 補瀉法
그의 침법인 보사법(補瀉法)은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이자 비법으로 '허임 보사법'으로 따로 분류된다. 그가 쓴 <침구경험방>의 서문에도 침에 대한 그의 생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불민한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의학에 몸담은 뒤로 (…) 환자를 치료하는 데 진료의 요점과 질병의 변화과정, 보사법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허임 보사법의 보법은 만약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환자로 하여금 숨을 들이마시게 한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이 내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이라 해서 보법이라 한다. 사법은 이와 반대의 방법을 쓰며 풍선에서 공기를 빼는 것처럼 자침한다. 특히 그는 "오른손으로 침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가 혈(穴)이라고 하는 침 자리의 특성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혈은 구멍이지만 피부로 덮여 막혀 있으므로 왼손으로 문질러 내면의 기를 활발하게 만든 후에 자침을 해야 한다는 것. 기가 활동하면 구멍이 열리고 기의 흐름이 더욱 활발해지면 그때 침을 놓아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이치다. 그의 침법은 천지인(天地人) 침법으로도 불리는데 세 번으로 나눠 2푼, 2푼, 1푼씩 상중하 차례로 찌르는 것에 기인한다. 그의 침법은 단순하지만 이처럼 본질을 읽어내고 임상이라는 실전에 적용한 비법이다.
나는 이 침법을 복원해 임상에 적용해보았더니 다른 질환에도 효과가 좋았지만 자기 몸이 일으킨 면역의 반란인 알레르기 질환에 특효를 보였다. 알레르기 비염은 꽃가루나 온도 변화 등 외부에 우리 몸이 필요 이상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나타나는 질환이다. 콧물이나 재채기도 이런 외부적 요인을 없애기 위한 자의적 반응일 뿐이다. 허임의 보사법 중 사법은 외부 자극에 대해 지나친 긴장감을 풍선에서 바람 빼듯 치료한다. 난치병으로 알려진 이명도 귀 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의 흥분을 진정시킴으로써 좋은 효과를 보았다.
조선 최고의 침의인 허임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즉위 15년에 사라진다.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난 바로 그해다. 광해군은 자신의 질환을 신하들에게 누설한 것에 분노해 그를 파직한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수없이 궁을 들락거린 그였지만 광해군이 유배를 당해 권좌에서 쫓겨난 후 다시는 어의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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