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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의 '선택'을 어떻게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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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홍명희의 '선택'을 어떻게 보십니까?"

[해방일기] 1948년 7월 31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1948년 7월 31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며칠 전 선생님이 당한 '망신' 얘기부터 하고 싶네요. 너무 우스워서요. 7월 22일 이화장에 갔다가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신 일 말씀입니다. 미리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면회가 안 되었다고 신문에는 나왔더군요.

안재홍 :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얘기 꺼내는 뜻을 알겠으니 솔직하게 대답하죠.

"미리 연락"을 한다면 내가 이 박사랑 직접 통화를 하겠습니까? 비서들 사이의 일이죠. 내가 이 박사를 찾아간다면 아무 연락 없이 불쑥 쳐들어가겠습니까? 당연히 "미리 연락"을 하죠. 연락을 했는지 안 했는지 무슨 증거가 있겠습니까? 설령 연락 사실이 그분에게 전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만날 만한 사람이 찾아와 있다면 못 만날 이유가 없죠. "당신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니야" 하는 뜻을 밝히신 겁니다.

그분은 면회 거절을 통해 내게 창피를 주려 한 건데, 나는 창피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나라 일이 걱정될 뿐이죠. 새 정부의 수반이 된 이제 사사로운 감정을 스스로 억누르며 여러 사람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할 그분이 오히려 득의양양해서 평소 감정을 저렇게 앞세운다면 많은 일에 지장이 클 겁니다.

김기협 : 신문 기사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보면 일부러 망신주려는 뜻이 분명합니다. 10시부터 와 있던 한민당 의원 몇 사람이 10시 반에 나가고, 선생님과 이청천 씨가 와 있었는데 이 씨만 만나고 선생님 면회는 거절했더군요. 달포 전까지 과도 정부 수반 자리를 지킨 선생님이 안 찾아온다면 청해서라도 만나야 할 이승만 씨가 찾아온 선생님의 면회를 거절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혀를 찹니다.

이승만 씨의 선생님에 대한 평소 감정이 어떠한 것일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짐작하는 것이지만, 그와의 관계에 대한 선생님 생각도 한 차례 듣고 싶습니다. 협력 관계와 적대 관계를 두루 거친 그 관계에서 그 사람의 정치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안재홍 : 3년 전 그분 귀국 때 나는 그분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성심껏 그분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분 지지 세력의 간판이 된 "독립촉성"이란 말도 내가 제안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분을 중심으로 추진한 비상국민회의에도 내가 준비 회장을 맡아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즉 민주의원을 만들 때 나는 빠질 생각을 했습니다. 민족 독립 운동을 위한 기구가 미군정 자문 기관 노릇을 한다는 것이 떳떳치 못하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내가 빠지겠다는 것을 만류하려는 그분 말씀이 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최고정무위원 자리가 머지않아 세워질 새 정부의 '대신(大臣)' 자리로 이어질 것이라며 유혹하는 그분 태도를 보며 존경심을 잃었습니다.

다시 몇 달 후 '정읍 발언'을 보면서는 민족 사회에 대한 그분의 공헌에 대한 기대보다 그분의 해악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습니다. 내가 역시 큰 기대를 걸었던 백범 선생께도 적지 않은 실망을 겪어 왔습니다만, 백범 선생께는 "좀 더 해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의 마음이라면 이 박사에게는 "저렇게 좀 안 해주셨으면" 하는 두려움의 마음입니다.

그분이 나를 원수처럼 미워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내 민정장관 역할 때문이죠. 자신에게 유리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그분의 온갖 부탁을 내가 물리쳤을 뿐 아니라, 경찰 개혁, 인사 개혁에서 미소공위 추진까지 내 모든 정책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그분은 생각했습니다.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을 지지해 온 중간파 노선도 물론 그분과 맞서는 것이었고요.

김기협 : 다들 '중간파'란 말을 쓰는데, 중도 우익에서 중도 좌익에 걸쳐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을 지지하는 노선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중간파'보다 '민족주의'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것도 같습니다. 극우와 극좌가 아니라는 뜻에서 '중간파'라는 것인데, 계급에만 매달리는 극좌나 반공에만 매달리는 극우와 달리 민족의 입장을 중시하기 때문에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을 하자는 것 아닙니까?

금년 들어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을 지지하고 나오면서 '협상파'란 말이 쓰이게 되었는데, 협상파 안에서 극우파, 즉 한독당과 중간파 사이의 단층이 많이 의식되어 왔습니다. 협상파를 단일 세력으로 보지 않고 두 세력의 일시적 연합으로 보는 거죠. 하지만 지금 결성되고 있는 통일독립촉성협의회(통촉)에 이르기까지 두 세력의 보조가 잘 맞춰져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두 세력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주의 세력'으로 통합하는 것이 민족 통일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더 강력한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안재홍 : 좋은 말씀입니다. 단정 추진 세력에서 '민족 진영'의 이름을 참칭하면서 반민족적 노선을 걸어온 것을 응징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 통일을 원하는 여러 세력이 조그만 차이를 접어놓고 '민족주의' 깃발 아래 뭉치면 그것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중간파의 한독당에 대한 의심을 해소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극우의 특징인 패권주의 성향에 대한 의심이죠. 나 자신 국민당을 한독당에 합당시켰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민족주의 세력이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 의심을 나 자신 거두지 못합니다. 남북 협상이라는 당장의 목표 때문에 세력을 통합할 경우, 중간파가 한독당에게 이용당하다가 자기 입지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기협 : 선생님은 한독당에서 나온 후 홍명희 씨 등과 함께 민주독립당(민독당)에 참여했습니다. 애초에 이끄시던 국민당과 성격이 비슷한 중도 우익의 민족주의 정당이죠. 대표를 맡은 홍명희 씨도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분일 뿐 아니라 정치적 입장도 아주 가까운 분으로 보입니다. 불후의 명작 <임꺽정전> 탄생에도 연재 초기에 선생님이 조선일보 경영진에서 힘을 많이 쓰셨죠.

그런데 홍 씨가 4월에 평양 회담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죠. 그곳에서의 행보로 보나, 가족을 모두 데려간 사실로 보나, 북쪽에 눌러앉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민독당을 비롯한 민련의 기본 노선은 남조선만이 아니라 북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에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 씨가 북쪽에 눌러앉는다는 것은 북조선 정부 수립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방조하는 결과가 됩니다. 정치적 입장을 많이 공유하는 선생님께서 그분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나요?

안재홍 :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고 가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북조선 지도자 중 김두봉 선생은 내가 무척 존경하는 분입니다. 투철한 민족주의자일 뿐 아니라 욕심이 없고 품성이 원만한 분이어서 지도자의 자격이 훌륭한 분입니다. 김일성 씨는 직접 알지 못하지만 김두봉 선생과 두터운 신뢰를 나누는 것을 보면 그 역시 민족주의자로 인정됩니다.

그들이 이끌어온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책을 보면 물론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노선이지만 민족주의 노선 또한 분명합니다. 민족 진영을 자칭하는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민족을 팔아 소비에트를 섬기는 반민족주의라고 선전하는데, 과장된 선전입니다. 공산주의자가 계급을 중시하면서 민족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일부 극좌 외에는 민족과 민족주의를 어느 정도는 존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 이북 지도부는 극좌 노선이 아니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통일 전선 노선으로 보입니다.

홍 선생이 한 개인으로서는 이북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합리적인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반민족적 파시스트 세력이 판치는 이남에서 뜻을 펼치기는커녕 생명의 위협까지 겪는 것보다 민족주의 이념 실현에 더 적합한 길일 수 있습니다. 이북의 통일전선 노선이 민족주의 이념에 더 충실하게 되도록 이끌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득실만으로 거취를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홍 선생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투항'입니다. 자기 길을 버리고 남이 열어주는 길로 뛰어든 겁니다. 협상파 민족주의자들은 남북의 단독 정부 수립을 막는 '최선'의 목표를 위해 어느 쪽에도 협력하지 않는 자세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선생은 이 최선의 목표를 포기하고 '차선'의 길을 고른 것입니다.

김기협 : 저는 홍명희 씨의 선택을 긍정하는 생각이 큽니다. 무엇보다, 여운형 씨의 불행을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좌우 합작과 남북 합작을 위해 불요불굴의 자세를 지키던 그분이 어느 날 테러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는데, 1년이 지나도록 그 책임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민족주의를 지키고 있는 분들 중에 누가 언제 그 뒤를 따르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남조선 상황입니다.

도처에서 대규모 검거가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아무런 범죄 혐의 없이, 남로당 당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내란 음모죄라도 되는 것처럼 공권력의 처단을 받고 있습니다. 극우 테러는 말할 것도 없고요. 미군정이 대한민국으로 바뀌면 이런 상황이 개선은커녕 더 악화될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한민당과 독촉에서는 벌써 중간파를 공산당 앞잡이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 신변부터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이승만 씨가 선생님 면회를 거부한 것도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신호 아닐까요?

홍명희 씨가 남조선 상황을 체념한 것이 냉철한 판단으로 보입니다. 망나니 같은 테러 위협 아래 가족들까지 고통을 겪게 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뜻을 펼 수 있는 길을 찾아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민족 사회에 더 잘 공헌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재홍 : 분단 건국을 가로막음으로써 당장 통일 건국을 이룬다는 최선의 목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도 합니다. 여운형 씨의 운명을 누가 언제 따라가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분단 건국을 가로막을 수가 정녕 없다면, 오늘을 사는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과 민족주의가 최소한 무시당하고 거부당하지는 않는 북조선 정권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홍 선생의 선택을 긍정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선택이 선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제(齊)나라 진항(陳恒)이 제 임금 간공(簡公)을 죽였을 때 공자께서 임금 애공(哀公) 앞에 나아가 진항을 정벌할 것을 청했죠. 임금이 들어주지 않자 물러나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아뢸 수 있는 데까지 아뢰는 것을 대부의 도리로 여긴 겁니다. 후세 선비들이 이것을 선비의 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홍 선생이 현명한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미련한 선택을 하렵니다. 공자의 뜻이 당장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도리를 다함으로써 후세에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분단 건국이 지금 내 노력에 관계없이 진행되더라도, 선비의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기록은 남겨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뤄지지 않는 일이 후일에라도 이뤄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홍 선생의 선비로서 자세를 내가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순국한 분의 자제입니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이 금산 군수로 있다가 경술국치 때 자결했다.) 홍 선생이 선친의 뒤를 그대로 따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그분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는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내가 내 길에서 겪는 괴로움을 그분도 동정할 것이고 그분이 그분 길에서 느끼는 상심을 나도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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