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위론'(1968)이 수록된 신쵸샤(新潮社) 판 문고본 <문화방위론>(1969)을 처음 읽은 것은 10년도 전 일이다.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고사카 슈헤이 외 지음, 김항 옮김, 새물결 펴냄)란 책을 번역하는 와중이었고, 도쿄대학교 고마바 캠퍼스 도서관을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맥락도 없이 읽던 때였다. 그때 <문화방위론>은 진행 중이던 번역 작업에 큰 도움을 주는 실용서이자, 미시마의 밑도 끝도 없는 과격함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뇌리에 각인되는 위험하고도 짜릿한 책이었다. <문화방위론>을 통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를 비롯한 패전 후 일본 지성계의 지도를 나름 그릴 수 있었고, 패전을 기점으로 한 일본 사회문화계의 세대 문제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후 미시마의 작품은 소설이든 희극이든 에세이든 팸플릿이든 모두 흥미로운 독서의 대상이었고, 그의 수려한 문체와 근대 일본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예리한 논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미시마 유키오는 매력적인 작가였다.
▲ <미시마 유키오의 문화방위론>(미시마 유키오 지음, 남상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물론 '인공미'란 표현에 오해의 소지는 있다. 그러나 미시마의 문체나 작품세계란 절제와 계산을 거듭한 위에 성립한 아름다운 탑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없으리라 본다. 일본 근대문학의 상징적 형식인 '사소설'이 외부의 자연을 개인의 감정과 처지로 끌어들여 풀어내는 기묘한 자연주의를 주된 기조로 한다면, 미시마의 작품은 <가면의 고백>(한국어판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펴냄)으로부터 <풍요의 바다>까지 철저하게 작가의 통제 속에서 세부 하나하나를 전체적 조형미 속에서 배치하는 기법을 보여준다. 미시마 문학이 일본 근대문학 속에서 고유한 빛을 발하는 까닭이다.
이런 그의 문학적 기질은 196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등장한 '정치적' 저작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이 시기 미시마의 정치적 글들은 문학작품에 비해 질이 많이 떨어진다고. 그러나 적어도 10여년 전 미시마의 '정치적' 작품들을 읽었을 때는 문학작품의 문체나 조형 원리가 그대로 살아 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미시마의 매력은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즉 문학작품의 절제된 문체와 계산된 세계가 현실에 개입하는 글에서도 고스란히 살아 있다는 일관성 말이다. 이런 일관성은 다른 작가들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물론 모든 작가들이 이런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시마는 현실에 개입하는 정치적 사유나 이념을 표현할 때에도 마치 문학작품을 조형하듯이 치밀한 계산 위에서 세부 하나하나가 전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배치되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을 뿐이다. 그의 육체, 복장, 몸짓, 액세서리, 심지어는 주거까지도, 그의 생활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인공적'인 배려 위에서 구성되고 있다는 놀라움이 미시마의 매력이었던 것 같다. 육상자위대 본부에서 맞이한 최후까지가 이 잘 짜인 극본과 연출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미시마의 일관성이란 매우 희귀하고 놀라운 것으로 보였던 셈이다.
이런 미시마의 삶과 표현 행위가 패전 후 일본, 더 넓게는 근대 일본에 대한 독특하고도 특이한 비판이자 풍자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군 최고통수권자인 천황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온 국민이 불충을 사죄하는(식민지의 인민들까지를 포함한 '일억 총참회') 데에서 시작한 일본의 패전 후는 미시마에게 그야말로 비극도 희극도 아닌 진공 상태의 텅 빈 '이후' 자체였기 때문이다. 미시마에게 느껴졌던 매력은 이 텅 빈 '이후'를 철저하게 무의미하게 살아가겠다는 그의 의지와 실천 때문이었는데, 미시마의 이런 입장은 패전 후 일본의 문화/사상계에서 확실히 특이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까닭은 이렇다. 전쟁 전의 주류 세력이 군복을 양복으로 갈아입은 천황을 가련한 군주로 표상하면서 아무런 반성 없이 메이지 근대국가의 질서를 회복했고, 그로 인해 메이지 근대화 자체는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채 견고하게 살아남았다. 마치 군부 파시스트들의 폭주가 훌륭한 조국의 근대화를 망쳐버렸고, 대다수 국민들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엘리트들은 희생자라도 되는 양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고 생활의 장을 폐허로 만든 전쟁은 제대로 직시되지 못한 채 일부 정신이상자들(군부 파시스트)의 일탈 행위로 손쉽게 정리될 수 있었다. 즉 전쟁으로 인한 파국과 폐허는 처절하고 진지한 반성과 성찰 없이, 마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처럼 국민 모두의 인내와 협력을 통해 재건되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여졌던 셈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패전 후의 상황과 마주하여 진정한 반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사카구치 안고(坂口案吾)는 손쉬운 인간주의나 문화주의에 기댄 전후 복구 담론을 비판하면서 더 철저하게 비참한 상태로 떨어져 인간의 한계지점까지 사유와 육체를 몰아넣자고 제안했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군부 파시스트란 결국 메이지 이래의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태어난 '정상적' 엘리트라 비판하면서 일본의 근대화 과정 전체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촉구했다. 이들의 비판과 제언은 근대 일본의 발자취를 발본적으로 비판하여 보다 근본적인 복구를 요청하는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시마의 특이성은 이런 이들의 입장을 철저히 비껴갔다는 데에 있다. 그에게는 이미 '진지한' 반성과 성찰 따위는 패전 후에 불가능했는데, 미시마에게 태평양전쟁이란 유럽에서 발원한 근대라는 무대 위에서 광대 노릇을 하던 일본이란 배우가 무대 바깥을 꿈꾸며 자기를 부정하고 파괴함으로써 찰나의 순간에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미학적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미시마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었더라면 에로스의 충만함을 안고 삶을 마감했을텐데'라고 회한에 잠겼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 숙련된 예술가가 패전 후의 일본 상황을 보면서 '삼등석에서 보는 연극' 같다는 느낌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 할복 직전 연설 중인 미시마 유키오의 모습. |
이것이 미시마의 '이후'를 사는 방법이었다. 10여년 전 미시마에게 느꼈던 매력의 정체는, 그런 의미에서, 연극이 끝난 후에도 무대에 남아 자기의 광대 짓을 자기 목숨까지를 내걸며 일관되게 밀고나간 어처구니없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금 미시마와 조우해보니 그런 매력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읽으면서 소비하는 시간이 더 신경 쓰이는 무의미한 말뭉치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정말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아무런 감흥 없는 독서는 오랜만이라 오히려 신기한 체험이었다. 왜일까? 아마도 2013년 시점의 세계가 미시마의 '이후' '이후'의 세계라 그런 것이리라. <문화방위론>에서 미시마가 주장하듯, 그의 광대 짓이 그나마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끈 것은 '핵무기'로 인해 세계가 다시금 파국과 폐허를 맞이할 수 있다는, 어떤 의미에서의 또 한 번의 연극이 가능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세계는 어떤가? 아마 어떤 파국과 폐허가 와도 놀랍지 않을 만큼 이미 충분히 망가져 있는 것 아닌가? 더 이상 세상에 어떤 파국의 가능성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할복 퍼포먼스로 막을 내리게 될 미시마의 <문화방위론>은 미시마가 패전 후 일본의 상태를 보며 말했듯이 '무해'하다. 9.11과 3.11을 겪은 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드라마틱하게 파괴하는 일은 이미 일상 속에서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아니 이 고약하고 비윤리적인 스펙터클의 사회는, 용산 참사나 크레인/송전탑 위 농성을 보도하는 미디어에서 보듯, 자신의 육체와 존엄을 내걸고 삶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고 있지 않은가? <문화방위론>까지 무해하게 만든 이 세계는 절망의 가능성까지도 빼앗아간 듯하다. 그래서 옮긴이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미시마의 퍼포먼스가 '돌직구'가 되기에는 이 세계가 너무 멀리 온 것 같다는 감상을 고백하면서 두서없는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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