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사건은 일단 당사자의 개인 문제다. 하지만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너무 크다. 그 자신과 범행 피해자의 피해보다 국가 사회의 피해가 더 크다. 그를 임명한 사람의 권위와 신뢰성에 입힌 상처가 무엇보다 큰 피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누구에게든 뭔가 마뜩치 않은 느낌이 들 때마다 국민의 마음에는 "저놈도 윤 아무개 식으로 임명된 거 아냐?" 하는 생각이 스쳐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많은 인사권을 쥔 자리다. 인사권 행사 방식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폐쇄주의와 공개주의로 갈라진다. 양쪽 득실이 엇갈리고, 폐쇄주의는 능률 측면에서, 공개주의는 안전 측면에서 장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지나친 공개주의는 불필요한 논란이 일어날 틈을 만들어 인사권의 적정한 행사에 지장을 줄 염려가 있다. 적절한 인물인데도 말이 너무 많다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낙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폐쇄주의의 심각한 위험성에 비하면 공개주의의 폐단은 가벼운 것이다. 윤창중 사건의 피해가 큰 것도 이 폐쇄주의 때문이다. 그의 기용이 공론에 합당한 것으로 사회에서 인식되고 있었다면 임명자의 책임과 그에 따른 피해가 그토록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용이 너무나 자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책임과 피해가 큰 것이다.
폐쇄주의의 유혹은 권력의 극대화에 있다. 여론에 구애받지 않음으로써 인사권자의 의지를 최대한 관철한다는 것이다. "소경 제 닭 잡아먹기"와 같은 환상이다. 당장은 권력자 마음대로 하기에 편할지 모르지만, 신뢰의 상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실이 더 크기 마련이다. 더구나 개인의 신뢰 상실보다 시스템의 신뢰 상실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이런 유혹에 약한 권력자는 공인의 자격을 의심받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승만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놓고 본다면, 그가 인사권을 쥐게 되었을 때 폐쇄주의로 빠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사권의 첫 행사인 국무총리 임명에서부터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당시 사람들은 대통령의 권력이 국회를 압도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헌법을 대통령 중심제로 갑자기 바꾸기는 했지만, '제왕적 대통령' 관념은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총리 지명도 국회 세력 분포에 따를 것으로 기대했고, 한민-독촉-무소속을 대표하는 김성수-신익희-조소앙이 물망에 올랐던 것이다. 7월 23일자 <경향신문>의 "난중난(難中難), 총리 적재(適材)-김성수-조소앙-신익희 씨 등 외 이윤영 씨 아연 물망에" 기사에는 "국민 일반 일치된 관점"이라 하여 두 가지 전망을 내세웠다.
* 한민당 인물이 나오면 어떤 의미로 보면 강력한 내각이라고 볼 수 있으나 반 한민계 측의 반정부 운동이 대두되고 따라서 정부는 불안한 가운데 있게 된다.
* 한독당계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국내 여론은 수습하게 되나 정부 운영상 세력 대립으로 일대 지장이 있을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국회의장 자리를 확보해 놓은 신익희를 제외하고 김성수와 조소앙을 놓고 저울질한 것이다. 한민당이 이승만과 협력해 온 자취를 보면 김성수가 나설 경우 정부의 결속력이 강하겠지만 반대 여론이 거셀 것, 반대로 조소앙이 국무총리가 될 경우 여론은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이승만과 보조 맞추기 힘들 것을 내다보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제4의 인물로 이윤영을 지목했다. 이승만이 그를 "지명할 기색이 농후"하다고 했다. 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이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을 거론했었는데 그가 이북에 있어서 안 됐으니, 대신 이남에 와있는 부당수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기용하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임명이 국회에서 통과될 전망에 회의를 표했고, 이윤영 이야기는 7월 27일까지 다시 나오지 않았다.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1890~1975년)은 신탁 통치 문제가 터져 나온 직후인 1946년 2월 월남해서 조선민주당을 군정청에 등록하고 계속 부당수로 활동했다. 이남에 세력 근거가 없는 만큼 독자적인 힘을 가질 수 없었고, 독촉 부위원장 등의 위치에서 분단 건국 추진 세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북 주민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5·10 선거에서는 김성수가 출마를 양보하고 지원해준 덕분에 종로갑구에서 당선되었다. 이북 우익을 대표한다는 간판 덕분에 대접을 받아왔을 뿐, 국정을 이끌 경륜이나 정치력은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7월 27일 오전 제35차 국회 본회의에 출석한 이승만은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음을 밝히면서 대한민국정부공고 제1호를 공개했다.
"헌법 제 69조에 의하여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대한민국 30년 7월 27일에 임명하였음을 공고함." 대한민국 30년 7월 27일 대통령 이승만
이 정부공고 제1호는 며칠간의 국무총리 서리를 임명하는 효과에 그치고 말았다. 이윤영 임명 발표 직후의 국회 상황이 7월 28일자 <경향신문> "총리 재지명은 누구에? 승인 부결까지의 35차 국회 경과" 기사에 이렇게 그려져 있다.
이때 의장(議場)은 폭풍 전야와도 같이 공기 험악하여졌으며 각 의원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의아한 낯으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돌연 정준 의원이 발언을 청하여 "너무나 돌연히 듣는 일이라 결정을 짓기 곤란하니 이로써 오전 회의를 일단 휴회하고 신중한 심사를 한 다음 오후 회의에서 이를 결정하자"는 동의가 있자 뒤를 이어 이원홍 의원이 "즉석에서 표결로 결정하자"는 개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 동의와 개의를 표결한 결과 즉석에서 무기명 투표로 표결할 것을 가결하고 11시 30분부터 무기명 투표를 시작하여 12시 5분 투표를 완료하고 개표한 결과 이윤영 씨 총리 인준은 부결되고 말았다.
인준 여부를 토론 없이 즉각 표결하자는 이원홍의 제안은 재석 194인 중 찬성 133표, 반대 26표였고, 인준 표결은 재석 193인 중 찬성 59표, 반대 132표였다. 이원홍의 즉각 표결 제안은 "말도 안 되는 후보니까 토론해도 입만 아프다"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이 제안에 찬성하고 인준에 반대한 132~133표는 대략 한민당과 무소속의 범위로 보인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독촉은 고립되었을 뿐 아니라 전술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윤영 임명에 관해 독촉계 의원들과도 의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윤영의 하마평이 언론에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의원들은 설마설마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윤영 임명의 이유로 남북통일을 내세웠는데 노일환 의원은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반박했다.
"이 대통령의 처사는 잘못된 줄 생각한다. 대통령은 남북 통일의 정신에서 이 의원을 총리에 임명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의원이 이북을 대표한다는 말인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동 임명은 민주주의 상도(常道)에 배치된 줄 아니 제 의원의 숙고를 촉구한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8일 "이윤영 씨 총리 인준 요구 132표로 부결")
5·10 선거로 구성된 국회는 당시 정치계의 정당 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정당 중 좌익의 남로당은 물론이고, 우익의 한독당과 중도 우익의 민주독립당, 중도 좌익의 근민당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당 세력 그대로 국회에 진입한 대 정당은 한민당뿐이었고, 정당 형태를 취하지 않고 있던 독촉계가 또 하나의 큰 세력이었다. 그리고 한독당, 민주독립당 또는 근민당 노선에 공감하는 의원들이 무소속구락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3대 세력이 적어도 원내에서는 정당정치를 전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5·10 선거를 치르고 정부를 수립하는 노선에 한민당과 독촉계가 협력해 왔다. 정부 운용에 있어서도 두 세력이 연합을 계속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예상되는 진로였다. 한민당 역시 이 진로를 기대하고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구상을 지지하면서 국무총리 자리는 자기네에게 줄 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승만이 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진로는 무소속을 포섭해서 한민당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앞에 인용한 7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의 전망처럼 여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은 강력한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척결을 기대할 수 있는 진로이기 때문이다. 허울로나마 민족주의를 표방해 온 이승만 입장에서 선택이 가능한 길이었다.
조소앙의 존재가 이 가능성을 뒷받침해 줬다. 조소앙은 당시 우익 정치 이념의 표준으로 부각되던 삼균주의의 제창자였으며 한독당 제2인자로서 나름대로 일관성 있는 자기 길을 지켜온 인물이었다. 독촉계 중에서도 그에 대한 반감이 약했다. 현실적 힘을 가진 김성수와 폭넓은 명망을 가진 조소앙이 유력한 총리 후보가 된 것은 국회 내 독촉계-한민당 또는 독촉계-무소속의 연합 가능성을 배경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상식적 전망을 벗어나 인준 부결이 확실한 이윤영을 임명하고 인준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인준 부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것이었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방 일기'에서 당시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지만, 이런 일을 놓고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참고해서 설명을 좀 보충해야겠다.
이승만은 '독재'를 원한 것이었다. 자기가 차지하는 대통령 자리를 견제할 만한 다른 자리가 없게 될 것을 그는 획책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부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큰 권위를 가지는 자리로 부통령과 국무총리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을 맡도록 이끌었다. 명망은 높지만 정치적 세력을 갖지 않은 노인을 앉힌 것이다. 이시영이 참다 참다 못해 1951년 사임하자 어쩔 수 없이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 뒤에는 역시 노령인 함태영(1872~1964년)을 앉혔고, 1956년에는 추종자 중에도 평판이 나쁜 인물인 이기붕을 내세웠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부통령 자리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4·19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 선거 역시 주목적이 이기붕의 부통령 만들기에 있었다.
국무총리 자리는 임명권을 통해 권위를 죽여 버렸다.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으로 없앨 때까지 다섯 사람이 국무총리 자리에 앉았다.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는 열 차례 임명되었다. (그중 네 차례가 이윤영이었다.) 이 시기 국무총리들의 능력과 인품을 도매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정부 수립 당시 국무총리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여망과 거리가 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승만이 국무총리 선택에 있어서 국정 수행 능력보다 자기 권력에 대한 위험이 없는 인물 위주로 선택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범석, 장면, 장택상, 백두진, 변영태가 정식 국무총리를 지냈고, 이윤영, 신성모, 백낙준, 허정, 이갑성, 백한성이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를 지냈다.)
대통령의 독재를 일컬어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을 흔히 쓰는데,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 이전 군주제 시대의 진짜 임금은 무책임한 독재자가 아니었고, 전근대시대의 군주제를 모두 비민주적 전제정치로 보는 근대인의 통념은 현실에서 벗어난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군주제는 공공성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고, 비록 상하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갖는 상당 수준의 민주적 원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모가 큰 사회는 소수 집단의 전횡을 억제하는 공공성의 원리를 가진다. 이 원리 없이는 내부 질서의 유지도 어렵고 다른 사회와의 경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근대와 전근대의 구분 없이 국가란 공공성의 원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조선 후기 권력의 과도한 사유화로 인한 공공성의 증발을 조선 망국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왕과 신하가 모두 '분수'를 잃고 권력에만 집착하던 풍조가 유교국가의 원리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일본 침략에 관계없이 왕조 멸망의 조건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일본 지배에서 해방되어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공화(共和)'의 원리가 필요했다. 국가 사회에 대한 시대의 요구를 순조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위치의 사람들이 각자 공헌할 수 있는 '협력'의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경쟁'의 대상으로서 권력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행정부 안에서조차 국무총리가 자기 권위를 갖고 자기 몫의 공헌을 하도록 놓아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10여 년간 대한민국 역사가 어둡고 괴로운 길을 걷게 되는 데는 물론 많은 요인이 뒤얽혀 작용했지만, 이승만처럼 공공성 의식이 없는 인물이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중 중요한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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