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억센 엉겅퀴에서 쭉 뻗은 대궁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보랏빛 꽃잎은 아주 부드럽다. 어릴 때 덮었던 붉고 부드러운 캐시밀론 담요 같다. 지리산에 꽃 산행 갈 때 금요일 일정을 마치고 혼자 밤 버스를 타고 함양으로 가야 한다. 함양읍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려 이용하는 단골 모텔, '엘도라도'의 침대 이불 같기도 하다.
지난달 진도 식생 조사 갔을 때의 일이다. 운림산방 뒤 첨찰산과 죽제산을 뒤지다가 예의 엉겅퀴를 만났다. 한창 핀 꽃, 이제 지기 시작하는 꽃, 이미 진 꽃. 같은 산에서도 엉겅퀴는 조금씩 다른 모습이었다.
한 개체의 엉겅퀴에서도 꽃의 운명은 다 달랐다. 뿌리는 같았지만 줄기의 키가 서로 다른 것처럼 같은 가지에서도 다들 달랐다. 한창 핀 꽃, 이제 지기 시작하는 꽃, 이미 진 꽃. 그중에서도 어느 것은 벌써 열매를 맺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려는 열매. 이제 엉겅퀴는 한 시기를 접고 또 다음 생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 하나의 같은 엉겅퀴에서도 운명은 서로 각각 다르다. 아직 피지 못한 꽃 옆에서 벌써 희로애락을 다 겪은 열매는 바람을 불러 멀리 떠나려는 찰나! ⓒ이굴기 |
그중 어느 한 엉겅퀴를 지나치는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폭신한 엉겅퀴 꽃잎에 벌이 앉아 있지 않았겠나. 유심히 보니 벌은 꿀을 따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더욱 유심히 보니 한 마리가 아니지 않았겠나. 한 마리 밑에 또 한 마리가 깔려 있었다. 벌은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엎드려 있는 게 아니겠나. 두 마리는 등을 보이고 나란히 포개져 있었다.
밑에 깔린 벌은 진저리를 치면서 엉겅퀴 꽃 속으로 파고들었고 올라탄 벌은 꼬리를 씰룩이며 엎드린 벌을 파고들었다. 두 벌은 다리로 엉겅퀴 꽃을 꼭 붙들기도 하였다. 김성동이 쓴 소설 <만다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벌은 지금 "이층을 짓고" 있는 중!
엉겅퀴의 보랏빛은 지금 벌들이 누리는 열락에 잘 어울리는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리호리한 엉겅퀴의 꽃대궁이 제공하는 탄력은 그 기쁨을 배가시키리라. 간판 없는 모텔, 엉겅퀴에서 두 마리 벌은 그야말로 밀회(密會)를 만끽하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둘은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온몸이 달아"(서정주의 '대낮') 있는 중!
그때 제법 덩치가 큰 벌 한 마리가 나타났다. 하필이면 엉겅퀴 모텔로 침입하는 게 아닌가. 어쩌면 인간 세상이라면 질투이거나 훼방이거나 둘 중의 하나. 치정에 뒤얽힌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날 법도 했다. 하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은 둘대로 둘만의 일에 열중했고 하나는 하나대로 조용히 옆에서 꿀만 따려다가 여의치 않자 훌쩍 떠났다.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처용가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 광경이기도 했다.
▲ 엉겅퀴 모텔에서의 밀회. ⓒ이굴기 |
▲ 엉겅퀴 모텔을 기웃거리는 벌 한 마리. ⓒ이굴기 |
두 마리 벌이 짓고 있는 "이층 공사"를 보는데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었다. 원로 시인 오탁번의 해학시(諧謔詩)이다. "항간의 음담인데 얼마 전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는 차마 웃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라고 시인이 창작 동기를 밝히는 시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입가에 웃음을 흘리게 하되 눈물도 고이게 하는 시. 얼핏 보면 음탕하고 노골적이되 흐뭇하고 건강함도 철철 흘러넘치는 시. 소쩍새와 개똥벌레와 베짱이도 찬조 출연하는 시. 여기에 그 첫 부분을 소개하느니, 궁금하면 나머지 부분은 찾아서 보시도록!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ㅡ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ㅡ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ㅡ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
▲ 한 바탕 벌들이 다녀간 후의 엉겅퀴 모텔. 엉겅퀴 꽃은 탄력도 좋아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세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있었다.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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