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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자니 민망, 빼자니 섭섭한 그 '젓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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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넣자니 민망, 빼자니 섭섭한 그 '젓가락'

[내가 옮긴 책] 리처드 바크의 <환상>

'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나는 아직도 어디 가서 '번역가'라는 호칭으로 소개되는 일에 익숙하지가 않다. 십중팔구 경력이 짧기 때문이겠지만 내가 정말 제대로 된 번역가인지, 아니면 번역가의 탈을 쓴 편집자의 탈을 쓴 독자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체계적인 과정이나 경로를 통해 택한 직업이 아니다 보니, 이 직업에 수반되는 관습들 역시 무심코 답습한 것들이다. '역자 후기'도 그랬다. 당연히 쓰는 것인 줄 알았고, 빠지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야 역자 후기는 일종의 '필요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쓴 '역자 후기'는 작품의 내용을 설명한 '해설'과 저자의 감회를 서술한 '후기'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역자 후기를 쓰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항상 의문이 들어 있었다. '내가 지금 너무 주제넘은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사실 한 권의 책에서 가장 주목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저자'이다. 그에 비해 번역가나 편집자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고 봐야 맞다.(한때 정보기관의 모토였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말은 사실 번역가와 편집자 모두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하지만 번역가나 편집자도 때로는 남의 상에 젓가락을 올리고 싶은 '욕심'이 들게 마련이다. 특히 번역가는 뭔가를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무척이나 많이 갖고 있다.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마치 저자인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런 만큼 자기가 아는 것을 최대한 많이 풀어놓고 싶어 하고,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이럴 때 가장 큰 유혹이 바로 '역주'이다. 인용과 암시와 말장난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의도를 독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정말 좋은 장치이다.

하지만 역주가 과도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는 수준을 벗어나서, 심지어 번역가의 이해를 독자에게 강요하게 된다. 역자 후기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해설 대신 엉뚱한 이야기, 또는 무의미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역자 후기도 의외로 많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번역을 하다 보면 작품과 번역가의 궁합이 항상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작품이나 작가에 관해 번역가가 잘 모르는 경우, 따로 공부를 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매우 피상적인 설명이나 감상밖에는 내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 <모뉴먼츠 맨>(로버트 에드셀 지음, 박중서 옮김, 뜨인돌 펴냄). ⓒ뜨인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원래 역자 후기를 상당히 '튀게' 쓰는 편이다. <모뉴먼츠 맨>(로버트 에드셀 지음, 뜨인돌 펴냄)과 <지식의 역사>(찰스 밴 도렌 지음, 갈라파고스 펴냄)에서는 책의 주제에 관해 내 나름대로 조사하고 생각한 바를 상당히 길게 정리해서 일종의 보론으로 집어넣었다.(전자에 수록된 한국전쟁 당시 덕수궁의 비화는 나중에 TV 프로그램에서도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지음, 뜨인돌 펴냄)와 <남자가 된다는 것>(존 셰르카 엮음, 뜨인돌 펴냄)은 '용서'와 '유년기'에 관한 여러 저자의 글을 모은 것이어서, 나 역시 또 한 명의 저자로 자처하고 같은 주제로 한 편의 에세이를 써서 집어넣었다.

이런 역자 후기의 경우에는 종종 사적인 일화나 감상이 끼어들어갔기 때문에, 어쩌면 그 부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독자도 있었을지 모른다. 좋게 말해 '개성이 강한' 것이었고, 나쁘게 말해 '튀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그렇게 할 말이 많으면 왜 남의 책을 번역하느냐, 차라리 네가 한 권 쓰고 말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역자 후기를 최대한 짧고 차분하게 쓰려고, 심지어 가능하면 '안 쓰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때로는 역자 후기가 누락되어서 안타까운 책도 있는데, 리처드 바크의 소설 <환상>이 그랬다.

▲ <기계공 시모다>(리처드 바크 지음, 박중서 옮김, 북스토리 펴냄). ⓒ북스토리
이 책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사정상 애초에 계약한 출판사에서 내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다른 출판사로 원고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고 크게 기대했던 작품이라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는데, 막상 2년 만에 나온 책을 보니 표지도 제목도 내 기대와는 딴판이고 어째서인지 역자 후기도 누락되어 있었다.(출판사에서 정한 제목은 <기계공 시모다>였다. <반지의 제왕>이 그 출판사로 갔다면 <입양아 프로도>라는 제목으로, 호빗 한 마리가 반지 위에 걸터앉은 표지가 나오지 않았을까.)

<환상>은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의 후속작이며, 그의 작품 세계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갈매기의 꿈>이 흔히 '자기계발'이나 '명상' 서적으로 간주되는 것에 반대하여, 나는 이 작품 역시 '종교'와 '영성'의 문제를 우의적으로 다룬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즉 남보다 높이 나는 것을 원하는 갈매기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어느 초인의 우화란 것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현대 미국에 나타난 청년 예수를 소재로 한 사실상의 속편 <환상>이다.

리처드 바크라는 저자, 그리고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을 깨트려주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는 위와 같은 내용의 역자 후기를 꼭 싣고 싶었다. 그러니 역자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역자후기를 누락시킨 출판사의 조치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아마 출판사에서는 자기네한테 그런 별도의 원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출간 직전 6개월 동안 담당 편집자가 연이어 교체되었으니까. 이렇게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뀐다는 것 역시 출판계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다.)

이런 우여곡절 때문에라도 <환상>은 내가 지금까지 작업한 번역서 가운데 가장 아쉬움이 컸던 책이었다. 역자 후기를 왜 써야 하느냐는 의문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생겼던 것 같다. 그런데 하마터면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버릴 뻔했던 문제의 역자 후기를 이번 '프레시안books'의 제안으로 최초 공개하고 보니 기분이 참 묘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아마 내가 번역한 <환상>을 읽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 역자 후기를 읽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혹시 역자 후기가 마음에 드셨다면, 이번 기회에 소설도 읽어보심은 어떠하실지?

실리지 못한 역자 후기, <환상>

한 권의 책이 공인된 걸작이 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부작용 가운데 하나는 어째서 그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읽는 사람이 생긴다는 점이다. 일종의 의무, 또는 유행이 되다 보니 대부분 내용의 이해보다는 명성의 확인에만 연연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읽긴 읽었는데 남는 게 없는 책"이나 "생각보다 별로인 책"으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는 갖가지 고전이나 필독서나 추천도서나 스테디셀러나 베스트셀러가 대부분 그런 불운을 겪지 않나 싶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역시 그런 불운한 걸작 가운데 하나다. 1970년에 출간되었으니 이제는 현대의 고전으로 여겨질 법하지만, 가끔은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과연 무슨 느낌을 받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왜 사람들은 이 책을 읽는 것일까? 또 이 책을 읽고 무슨 교훈이나 감동을 얻는 것일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라는 유명한 구절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는 이 책을 일종의 자기계발서, 또는 실용처세서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종교소설, 또는 영적 각성을 위한 우화로 봐야 맞을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는 몰라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고 뭔가 유용한 교훈을 찾아내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인 갈매기처럼 그저 먹고 사는 문제 이상의 문제, 즉 더 높고 커다란 것을 향한 비상과 초월을 꿈꾸고 고민해 본 사람이라야, 그 소설이 뭔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바크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에 <갈매기의 꿈>과 반드시 나란히 놓아야 하는 또 다른 작품이 지금 여기 번역해서 소개하는 <환상>이다. 1977년에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판매되는 또 다른 현대의 고전인 동시에, <갈매기의 꿈>에서 이미 다룬 바 있었던 주제가 더욱 직접적으로, 또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루어진다는 점이 특징이다. 부제인 "메시아 노릇이 싫었던 어느 메시아의 모험"에 나타나듯, 이것이야말로 본격적인 종교소설인 동시에 반(反)종교소설이다.

종교소설인 까닭은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도널드 시모다가 노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며, 또 반종교소설인 까닭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제도권 종교에 내포된 한계와 경직된 사고방식을 통렬하게 꼬집기 때문이다. <환상>은 지금껏 나온 예수 생애의 현대적 각색 중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편에 속한다. 기독교에 관한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리처드 바크가 예수의 어떤 모습, 또는 어떤 매력을 강조하려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성경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을 일점일획도 고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아마 이 소설이 '뉴에이지적'이라고 질색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 속의 예수 역시 메시아에 대한 당시의 통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인해 경건한 유대교인에게는 도리어 비난 받았음을 기억해 보시라. 모르기는 해도 예수가 지금 이 땅에 다시 온다면, 제일 먼저 맞이하게 된 반응은 '이단적'이거나 '뉴에이지적'이라는 비판이 아닐까.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물론 <환상>에서 묘사된 메시아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일종의 환상으로 간주하고, 나아가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초월을 성취하라고 하는 것만 보면 오히려 불교라든지, 또는 다른 신비주의적 가르침을 떠올리게 십상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해석은 <메시아 핸드북>의 맨 마지막 문장처럼 어쩌면 모두 맞는 것인 동시에, 모두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해석은 각자의 자유일 뿐이다.

어쩌면 리처드 바크가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가치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런 '자유'인지도 모른다. 창공을 가르는 비행은 대표작인 <갈매기의 꿈>과 <환상>에서 최근작인 <꿈꾸는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에 반복 등장하는 소재이며 자유의 상징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나 붓다나 갈매기 조너선이나 도널드 시모다 같은 모든 위대한 영적 인도자가 추구한 궁극적인 길이 아니었을까.

중학교 때 한 친구에게서 처음 소개받아 애독했던 책을, 대학교 때 한 선배에게서 영어판 페이퍼백으로 선물 받아 갖고 있다가, 한참 뒤에 이번에는 사회생활 내내 도움과 조언을 제공해 주었던 또 한 선배의 제안으로 번역까지 하게 되었다. 작업 내내 그들 세 사람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문득 "같은 것은 같은 것을 끌어당긴다"는 책 속의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나올 수 있기까지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박중서의 주요 역서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빌 브라이슨 지음, 까치글방 펴냄)
<런던 자연사 박물관>(리처드 포티 지음, 까치글방 펴냄)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데이브 맥킨·그랜트 모리슨 지음, 세미콜론 펴냄)
<성스러운 침입>(필립 K.딕 지음, 폴라북스 펴냄)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해부학자>(빌 헤이스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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