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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도 아름다운 바다의 꿈을 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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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도 아름다운 바다의 꿈을 꾸었네

[내가 옮긴 책]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어느 미술관에서 넋 놓고 그림 한 점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적이 있다. 창살이 있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마당을 그린 그림이었는데……마당에는 아이가 있었던가? 가축 또는 애완동물이 있었던가? 그림 한 점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본 경험은 처음이었음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제목도. 그것이 그 미술관의 대표적인 그림이었는지, 옆에 놓인 미술관 소개 책자 표지에 그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훌륭한 인쇄 기술로도 원화의 색감은 표현해내지 못하는구나, 이래서 그림은 원화를 보라는 거구나, 하는 초보적이고 부수적인 깨우침을 얻었던 기억은 남아 있다.

▲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존 반빌 지음, 정영목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랜덤하우스코리아
그와 더불어 소멸해가는 과정의 어느 순간을 포착한 듯, 흐릿한 윤곽으로 묘사되어 있는 일상의 마당 풍경이 주는 어떤 느낌도. 화가의 눈에는 마치 꽃이 지는 과정을 빠르게 찍은 필름처럼 모든 존재가 빠른 속도로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데, 그 소멸의 한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 자체는 영원에 편입되어 있는 듯했다. 그 덧없는 일상의 한 순간이 곧 영원이라는 이 아찔한 모순이 빚어내는 묘한 느낌 때문에 그 그림에 그렇게 오랜 시간 붙들려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감명 받은 그림의 제목은커녕 이미지 자체도 또렷하게 기억 못하는 문외한이 수많은 그림 가운데 그 그림에 사로잡힌 데에는, 그림 자체의 힘도 힘이지만 그 그림을 그린 화가 보나르의 이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대 화가들 가운데 첫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화가가 아님에도 내 머릿속에 그 화가의 이름이 남아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내가 번역한 책에서 그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작가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원제는 'The Sea'인데, 좋은 결과를 낳든 나쁜 결과를 낳든 번역서의 제목을 결정할 때 번역자가 큰 권한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다)의 주인공이자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미술사학자 맥스가 연구하는 화가가 바로 보나르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그림이 내가 본 그림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주관적인 감상으로는,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를 읽을 때 받은 느낌과 미술관에서 그 그림을 볼 때 받은 느낌이 거의 일치했다. 보나르라는 화가를 작품에 심어 놓고, 그의 그림의 느낌을 글로 그대로 표현해 낸 존 반빌이라는 작가가 과연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는 그만큼 정밀한 세공품이었던 것이다.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는 2005년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은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5월에 나왔다. 이렇게 큰 상을 받은 중요한 작품을 출간하는 일을 출판사에서 뭉그적거렸을 리는 없으니, 1년이 넘는 시차가 생긴 것(우리의 일반적 관행에서는 꽤 늦어진 편에 속할 것이다)은 전적으로 옮긴이가 늑장을 부렸기 때문이다. 책이 어렵다 어떻다 변명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다음해 부커상 수상작이 발표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나오게 한 것은 사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기다려준 편집부를 생각하면 미안해서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렇게 느릿느릿 번역하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얻은 소득이 한 가지 있다면, 존 반빌이라는 작가 덕분에 감정적으로 닫혀 있던 어떤 부분이 약간 열리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그 전까지 소멸이나 상실 같은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감정에는 저항까지 느끼는 쪽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그런 감정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개방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서 생긴 결과겠지만, 아무래도 반빌이라는 작가의 역할이 가장 컸지 싶다. <라 트라비아타>의 통속적인 이야기가 예술이 된 것은 베르디의 힘이듯이, 소멸과 상실이라는 기본적인 인간 조건, 수다한 감상적 감정 과잉의 재료가 되어온 조건을 가장 냉혹하고 엄정한 방식으로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으로 나 같은 부류에 속하는 독자의 닫혀 있던 곳을 열고 공감을 끌어낸 것은 반빌의 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표지에 싸여 나온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는 안타깝게도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흔히 번역서는 잘 되면 원작 덕분이고 안 되면 번역 탓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평소에는 고깝던 그런 말마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떤 책이든 번역자로서 만족하는 책은 없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현존 작가 가운데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일컬어지는 존 반빌이니만큼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의 경우에는 더욱더 자신의 역부족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번역 원고를 늦게 넘기는 바람에 부커상 수상의 후광마저 제대로 입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도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만큼 대접을 못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그 뒤로 누가 내가 번역한 책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번역서", "애착이 가는 번역서" 같은 것을 꼽으라고 하면―바로 지금 이 자리처럼―거의 어김없이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를 꼽곤 했다. 그리고 거꾸로 그 책을 읽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의 뒷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기막힌―내가 보기에는―반전을 언급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역시 끝까지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가 보다 하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겨울, 어느 술자리에서 후배 번역가 한 분이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이야기를 했다.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례적인 덕담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후배는 아픈 상실을 겪고 고향으로 내려가 마음을 달래던 중에 이 책을 읽었다고 했다. 밤 새워 책을 읽는데, 울다가 읽다가 밖에 나가 서성이다가, 다시 읽다 울다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이 책만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고 흔들고 또 달래준 책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번역자로서 가장 민망한 경우가 원작자가 받을 찬사를 대신 듣는 것이지만, 이 날 밤만큼은 왠지 작가를 대신해, 그 책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조금이라도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물론 하지는 않았지만.

한편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나 자신은 그 후배만큼 아픈 상실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과연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라는 깊은 우물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이 책의 진짜 힘을 제대로 실감하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좋은 책이라고 떠들고 다닌 것은 아닐까? 그런 실감 없이 번역을 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번역일까? 반대로 그런 실감을 바탕에 깔고 번역했다면 더 나은 번역, 더 울림이 큰 번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자못 심각해 보이는 이런 의문들은 술기운과 함께 증발해 버리고 남은 것은 한 가지 결심뿐이었다. 그 후배의, 그러니까 한 독자의 곡진한 독후감을 들었으니 이제 됐다, 앞으로 이 책 이야기는 그만 해야겠다, 하는 결심이었다(이 자리가 정말 마지막이다!). 어쨌거나 그 후배가 이야기를 하던 밤에는 아마 바다 건너 존 반빌도 슬프고 아름다운 바다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옮기고 나서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존 반빌은 2005년 이 소설로 영국에서 부커상을 받았다. 옮긴이야 부커상이 영국에서 유명하고 중요한 문학상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 어쨌든 옮긴이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해도 이 소설에 한 표를 던졌을 것 같다. 경쟁작들이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경쟁작들을 안 보고도 그랬을 것 같다. 이만큼 좋은 소설이 1년에 두 편씩 나오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은 주로 소멸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일까? 소설 자체는 지극히 아름답지만,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소멸을 받아들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이야기한 것일까? 글쎄, 그것보다는 소멸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소멸할 것은 소멸한다는 이야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작가는 그런 무심함에 필적하는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의 과거를 본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서는 불교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끔 느끼는 서늘함이 느껴지곤 한다. 사실, 노년을 눈앞에 둔 주인공이 어린 시절 자신에게 결정적인 화인을 남긴 현장을 다시 찾아간다는 설정은 여러 면에서 질퍽거릴 소지가 다분함에도, 설령 주인공은 질퍽거릴지언정 작가의 시선은 그야말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가혹하다. 그렇다고 뭔가를 넘어선 듯 허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토록 엄정하고 담담하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푸른빛이 감도는 강철의 잿빛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바다 역시 결국 그런 빛깔 아니었던가―어쨌든 옮긴이의 머릿속에는 그런 빛깔로 남아 있다.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좋은 책을 좋다고 말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좋은 책이다. 뒤집어도 된다. 좋은 책을 권하고 싶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옮긴이는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가운데도 특히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정영목의 주요 역서

<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지음, 해냄 펴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 청미래 펴냄)

<로드>(코맥 매카시 지음, 문학동네 펴냄)
<프로이트>(피터 게이 지음, 교양인 펴냄)
<유럽 문화사>(도널드 서순 지음, 정영목 외 공역, 뿌리와이파리 펴냄)
<신의 가면 3, 4>(조지프 캠벨 지음, 까치글방 펴냄)
<그리스 사상과 아랍 문명>(디미트리 구타스 지음, 글항아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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