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
낭만과 과학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글을 구상하며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듣는다. 늙수그레한 소리꾼의 읊조림과 천박한 듯 기품 있는 탱고 리듬이 참 잘 어울린다.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는 없어도, 평소 쌓아둔 생각은 적지 않아 절로 심호흡하며 허리를 세운다. 필시 근대성이라는 화두를 건드려야 할 모양이다.
마치 폭탄과도 같은 그 엄청난 화두에 일개 번역가가 이빨을 대는 것이 아예 터무니없는 짓은 아니지 싶다. 100여 년 전, 먼 바닷길 마다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배우러 나섰던 이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씩 번역가였던 셈이니, 번역을 업으로 삼은 내가 그들의 후예로서 근대성을 논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그들의 후예일까? 개명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선진 세계의 언어를 익혀서 그곳의 값진 문물을 척박한 이 땅에 들여오는 일. 과연 이것이 나의 번역일까? "첫 사랑 그 소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답할 질문이다.
▲ <경이의 시대>(리처드 홈스 지음, 전대호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일상을 벗어나 야생의 바람을 맞는 기분이랄까. 경이로움 앞에서 되찾게 되는 원초적인 바닥 상태와 뒤이은 온전한 몰입은 몹시 매혹적이다. 물론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아무튼 그런 낭만적 몰입은 결국 번역해놓으니 거의 800쪽에 달하는 이 책의 열쇠라 할 만하다. 수많은 주인공들이 생사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막무가내로 몰입한다. 경탄과 부러움과 더불어 불안을 자아내는 사람들이다.
경이로운 세상을 마주한 그들 시인과 과학자는 평온한 일상의 베일 너머의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건다. 그들의 시와 과학은 그들의 삶을 통째로 가마솥에 넣고 달여낸 탕약과도 같다. 그 탕약 속 진리는 상식을 벗어날 수도 있다. 기괴하고, 막막하고, 섬뜩하고,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밝은 빛, 청명한 하늘, 영원히 한결같은 천구의 운동, 정다면체의 완벽한 대칭성이 상징하는 계몽의 진리와는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에 가깝다. 그들 앞에 어른거리는 진리는 아프리카 내륙의 밀림을 헤매다 주저앉은 탐험가의 눈에 비친 광경을 더 닮았다. 그렇다, <경이의 시대>의 주인공들은 낭만주의자다. 이탈한 자의 허허로운 자유를 뼈저리게 만끽한다. 나는 유한하지만, 그래도 나를 이끌 길잡이는 나 자신뿐임을 알아버린 사람들. 유한한 내가 나에게는 어쩔 수없이 절대적임을 깨달은 사람들. 유한함과 절대적임이 맞물린 이 야릇한 진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경이의 시대>는 1768년부터 1831년까지, 이른바 낭만주의가 주류이던 시절을 다룬다. 이 시기는 칸트와 헤겔에 이르러 근대철학이 완성된 때로도 지목된다. 하지만 원래는 없던 요소가 추가되어 완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맨 처음에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를 제일원리로 삼을 때부터 이미 있었던 근대성의 또 다른 측면이 조명을 받아 전체 모습이 드러난 것이니, 근대철학이 드디어 자기 자신을 발견한 때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다. 근대성은 처음부터 계몽과 낭만이라는 서로 맞선 양면의 얽힘이었다. 생각해보라, 나 자신을 최고 권력으로 삼은 사람에게 확고한 자신감과 올곧은 전진만 있을 리가 있겠나? 그 이면에 불안과 방황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근대성의 양면을 따로 떼어놓고 한 면만을 본질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계몽, 합리성, 보편화,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은 근대성의 한 측면일 뿐인데, 또 다른 측면인 낭만, 무모한 열정, 개별화, 인간 이성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압도하곤 한다. 근대성은 뭐니 뭐니 해도 계몽, 부국강병, 개발이고, 낭만과 격정과 방황은 근대성에 낀 때쯤으로 취급된다. 이런 편견은 과학에 대한 통념에도 고스란히 들어있다. 개화기 이래 우리에게 과학은 근대성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경이의 시대>가 이야기하는 "낭만주의 과학"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과학은 무지의 안개를 말끔히 걷어내고 간단명료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던가. 과학의 빛이 드리우면 시끄러운 갑론을박은 영원히 종결되고 복잡했던 문제는 눈 녹듯 사라지고 영원불멸의 공식과 막강한 발명품이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거의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이것은 과학의 한 측면일 뿐이다.
물론 100여 년 전에 우리 조상이 이역만리에 나가서, 또는 외국인 선교사 곁에서 목격한 것은 틀림없이 이런 과학이었을 것이다. 하루빨리 과학을 배워 문명국의 증기선을 닮은 배를 만들고 문명국의 철도를 닮은 길을 놓겠다는 열의에 달아오른 그들의 눈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 과학의 이면이 들어왔을 리 없다. 과학자의 힘겨운 연구, 도발적인 문제제기, 냉엄한 비판, 민주적인 토론은 설령 눈에 띄었더라도 간단히 무시되었을 것이다.
20세기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과학이란 전문가들은 무식하다는 믿음이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곧 과학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파인만 개인이나 20세기 미국에 국한된 생각이 아니라는 점을 런던 왕립학회의 좌우명 "누구의 말에도 의지하지 말라(Nullius in verba)"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립학회가 창립된 1660년경에 채택되었으니 낭만주의 과학보다 한참 선배인 이 좌우명도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스스로 알아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 보다시피 근대는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는 선언으로 열린 시대다. 전통도 권위도 다 불살라버리고 오로지 나 자신의 이성에만 의지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진정한 과학자다. 요컨대 낭만성을 이탈한 개인의 허허로운 자유와 거침없는 몰입으로 정의한다면, 낭만성은 애초부터 근대와 과학의 본질적 요소다.
▲ 세카르 카푸르 감독의 2007년 영화 <엘리자베스 : 골든 에이지>. ⓒUniversal Pictures |
영화 <엘리자베스: 골든 에이지>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왕은 시녀의 아기를 품에 안고 제법 긴 독백을 하는데, 그 중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신이여 나에게 이 막강한 자유를 감당할 힘을 주소서(God give me strength to bear this mighty freedom)" 전통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불사르고 새로운 최고 권력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외톨이 여왕의 설렘과 불안이 밴 기도다. 바로 이 기도가 모든 각자의 기도가 될 때 비로소 참된 근대가 시작되고 민주공화국이 바로 선다고 나는 믿는다. 당신이 보기에 이런 기도는 잉글랜드 여왕에게나 어울리는가? 파인만 같은 천재니까 저런 발칙한 말을 하는 것이고, 왕립학회쯤 되니까 독불장군의 좌우명을 내거는 것인가? 우리는 개화기와 식민지시대의 모던보이들과 마찬가지로 해외 전문가의 말을 충실히 받아 적고 모방하는 게 상책인가?
나를 버리고 낯선 권위를 수용하는 방식의 개화가 애당초 근대화가 맞는가, 근대성이라는 것을 서양이나 일본에 가서 배워온다는 발상 자체가 과연 가당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절로 떠오르지만, 한걸음 물러나 아무튼 근대성 학습은 우리 역사에서 엄연한 현실이었고 지금도 상당한 정도로 그러함을 인정하기로 하자. 하지만 그래도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야 할 것 아닌가!
최고 권력자의 자유와 책임, 설렘과 불안이 우리 각자의 몫이라는 가르침, 권위에 대한 반항과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무모함이 과학자의 기초체력이라는 가르침, 각자 자기 자리에서 소박하고 또한 절실하게 나름의 삶을 사는 것이 순리라는 가르침…. 한마디로 근대성에 내재한 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낭만성은 왜 격하하거나 깡그리 무시하는가? 포를 쏘아대는 이상한 모양의 배를 처음 보고 화들짝 놀라서 하루빨리 그들을 닮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근대성 학습에 나선 우리 조상이야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참으로 놀라운 것은 지금도 여전한 우리의 통념이다. 과학을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깨비방망이로, 낭만을 사춘기 한때의 객기나 밤샘 술판쯤으로 아는 우리는 대체 무얼 배운 것인가?
과학과 낭만은 별개의 영역이기는커녕 불가분의 관계다. 허공으로 한걸음 내딛는 낭만주의자의 결기 없이, 무슨 독창적인 과학을 할 수 있겠는가. 경이감에 홀린 낭만주의자가 제 삶을 통째로 넣고 달여낸 탕약이 꼭 시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것은 과학일 수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시도 과학도 삶의 결실인데. 지금 여기의 삶이 배어있는 과학을 우리가 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면, 이는 큰 불행이다. 하지만 불행에 휩쓸려 진실마저 왜곡하지는 말자. 진짜 과학은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알아내겠다는 마음가짐, 곧 낭만적 결의에서 싹튼다. <경이의 시대>가 다루는 시기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라고 부른 기간과 대략 일치한다. 본디 과학에서는 혁명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번역가로서 나는 개화파 조무래기와 비슷한 활동을 하는 셈이다. 어쩌면 개화의 욕망에 빌붙어 생계를 꾸리는 하찮은 역관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이 땅에 없는 것을 들여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로 과학과 철학, 넓게 보면 정신의 삶, 곧 진리를 담은 글을 번역하면서 내가 늘 붙드는 믿음이 하나 있다. 그들의 진리가 정말로 진리라면, 그것은 여기에도 벌써 스며들어있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 없는 진리를 들여온다면, 그것은 참된 진리일 수 없고, 내가 참된 진리를 들여온다면, 그것은 이 땅에 애초부터 스며들어있는 진리다. 나의 번역은 외국어로 된 글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본디 우리말 안에도 자생하는 참된 진리를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소리꾼 최백호는 '낭만에 대하여'에서 "잃어버린 것"과 "다시 못 올 것"을 외쳐 부른다. 그러나 "짙은 색소폰 소리"와 "슬픈 뱃고동 소리"가, 아니 어떤 가사보다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소리꾼의 걸걸한 목소리가 우리를 데려가려는 곳은 정녕 그런 잃어버린 낙원일까? 우리의 낭만적 그리움은 "첫사랑 그 소녀"에서 날개를 접을까? 정말로 거기가 최종 목적지일까? 나는 아직 가져본 적 없는 낭만, 아직 오지 않은 낭만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므로 내가 구상하는 글의 제목은 "낭만을 위하여"가 적당하겠다. 낭만과 과학에서, 심지어 "도라지 위스키"에서 혁명의 냄새를 맡으며, 자, 이제부터 쓰자.
전대호의 주요 저서 및 역서
<가끔 중세를 꿈꾼다>(전대호 지음, 민음사 펴냄)
<성찰>(전대호 지음, 민음사 펴냄)
<경이의 시대>(리처드 홈스 지음, 문학동네 펴냄)
<위대한 설계>(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까치글방 펴냄)
<로지코믹스>(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알레코스 파파다토스·애니 디 도나 그림,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존 D. 배로 지음, 해나무 펴냄)
<우주 생명 오디세이>(크리스 임피 지음, 까치글방 펴냄)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궁리 펴냄)
▲ <경이의 시대> 도판 중, 존 보니캐슬의 <천문학 입문>(1811) 속표지 판화. 천문학의 뮤즈인 우라니아가 제자에게 새 행성을 보여주는 장면. ⓒ문학동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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