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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을 암흑 상태에 남겨놓고 물러나는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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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을 암흑 상태에 남겨놓고 물러나는 미군

[해방일기] 1948년 7월 22일

1948년 7월 22일

5월 14일 북으로부터의 송전 중단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군정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송전 문제 의논할 것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북조선의 통치권은 주둔 소련군에게 있으므로 그 밖의 어떤 상대와도 교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담의 격을 따지는 것은 회담을 회피하고 싶은 축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소련군 사령관은 진주 당시의 치스차코프 대장이 1947년 4월 코로트코프 중장으로 바뀌었다가 1948년 6월초에 메르쿠로브 소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계급장이 작아지는 것을 보더라도 주둔군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메르쿠로브 사령관 취임 후 송전 문제와 관련된 회답을 하지에게 보냈다.

"인위와 교섭하라-전력 문제에 대하여 소련 측에서 회한"

지난 달 14일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이 단절된 후 하지 중장은 누차에 걸쳐 전력 대금으로 지불할 물자를 준비한 것과 새로운 협정을 체결할 회의를 열 것을 소련 사령관에게 제안한 바 있었으나 하등의 소식이 없더니 지난 15일부로 대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한이 도착하였다.

"남조선에 대한 송전의 중지는 미소 당국의 전력 협정 불이행에 기인한 것이며 남조선의 선거와는 하등의 관련성이 없다. 북조선에서는 특히 전력 시설을 포함한 국유화 산업의 운용 권한이 인민위원회에 속하고 있으므로 동 위원회와 직접 교섭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9일)

6월말에는 주소 미 대사를 통해 소련 외무성에도 하지의 요구가 전달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일, "즉시 송전을 요구-남조선 단전에 주소 미 대사 항의") 그 직후 북측에서 상당히 친절한 제안이 들어왔다.

"소 측, 송전을 제안-단 전력대는 인위에 지불해야만"

2일 북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1947년 6월까지의 전력 대금을 지불하는 즉시로 미군 점령 지역 내에 전력을 보낼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하지 중장에 대한 소련 측의 제의는 미국이 북조선인민위원회에 그 대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군 사령관은 수차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승인 또는 이와 교섭하는 것을 거부하여 온 만치 금번 신 제안으로 인하여 즉시 남조선에 대한 송전이 재개될 희망은 박약하다. 공산주의자들은 하지 중장의 형용에 의하면 미군 점령 지역의 재건 사업에 지장을 주고 남조선 주민들을 공갈하기 위한 압박 공작의 일단으로 지난 5월 4일 이래 송전은 중지되었던 것이다. [조통 제공]

"전력대 지불하면 곧 송전-소, 인민위 대표 파견을 결정"

[주 서울 AP특파원 무어 제공] 북조선 소련 측은 만일 미국 당국이 전력대를 지불하기 위하여 미군 사령관이 수집하였다는 물자를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넘겨준다면 남조선에 대한 전력 공급을 부활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평양방송은 북조선 소련 사령 멜쿠로브 소장으로부터 하지 장군에게 보낸 서한 속에 동 제안이 포함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하지 장군은 동 서한을 아직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하등 비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전력 문제 해결을 미 국무성이 소련 외무성에 대하여 요구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6월 30일 발표되었던 것이다.

멜쿠로브 소장은 인민위원회가 전력 대상 물자를 받고 남조선에 대한 협정을 짓고자 그 대표를 서울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하였다. 하지 장군은 인민위원회와의 교섭을 거절하여 왔다. 1947년 6월 30일 이전에 사용한 약 600만 달러의 가격의 물자를 포함한 전력대금 지불에 관한 협정은 양 사령부 간에 행하여진 것이다. 그 후 사용한 전력 대금 지불 교섭에 수련 측이 참가하라는 그의 초청은 소련 측에 의하여 이는 인민위원회의 소관 사항이라는 제의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3일)

소련군 사령관이 보낸 편지에 들어있는 제안이라고 평양방송에서는 말하는데, 하지는 그 편지를 받아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7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미소군 사령부 승인 하 조선인 대표 협상 용인-미 측 태도"에 붙어 있는 "미-소 교(交)한(翰) 내용"을 보면 멜쿠로브 소장의 편지는 6월 25일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지의 답장은 7월 2일부로 되어 있는데, 이런 말로 시작한다.

"친애하는 멜쿠로브 장군, 7월 2일 나에게 전달된 1948년 6월 25일부 귀하의 서한은 확실히 받았습니다."

평양방송으로 멜쿠로브의 제안 내용이 발표될 때, 하지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날 편지를 전달받았다며 그 날로 답장을 보냈다. 내 짐작으로는 자기 사무실에 이미 와 있는 편지를 하지가 열어보지도 않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랬다가 평양방송에 나오니까 얼른 열어보고, 수세에 몰린 입장이니까 얼른 답장을 보냈을 것 같다. 이미 읽은 편지를 받지도 못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믿어주고 싶어서 하는 짐작이다.


7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모처럼 전력 문제에 돌파구가 생길 듯한 희망적 기사였다. 그런데 이런 기사가 "AP 특파원 제공"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또한 씁쓸하다.

[주 서울 AP 특파원 무어 씨 22일 제공 합동] 남조선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소 양 사령부에 의해 승인된 전력 문제 협상을 용인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소련 사령부는 종래 동 문제는 공산 괴뢰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소관사라고 주장하여 왔던 것이다.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이 단절된 5월 14일 이래 하지 중장은 미군 사령부는 송전 복구 문제에 관하여 인민위원회와 협의하라는 소련 측의 제안을 거절하여 왔었다.

그 발표 내용인즉 6월 25일부 멜쿠로브의 편지와 7월 2일부 하지의 편지뿐이다. 특파원이 물어보니까 이 편지 내용을 보여줬는데, 특파원이 보기에는 "조선인 대표 협상 용인"이라는 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으로 보여서 이 희망적인 기사를 만든 것 같다.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이 공포되고 7월 20일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로 정부 조직이 시작되었다. 몇 주일 내로 행정권을 이양해야 하는 시점에서 미군정의 잘못 중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이 송전 중단 사태였다. 이제 송전 협상의 남쪽 주체도 미군정 아닌 대한민국 정부가 될 참인데, 북측 대표로 조선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자세가 어색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소군 사령부가 지명한 대표라면 조선인이 협상에 나서도 좋다고 한 7월 2일부 편지 내용을 대단한 입장 변화라도 되는 것처럼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1주일 전에 보낸 편지를 아직 받지 못했다고 우기는 배짱이 참 대단하다. 7월 15일 딘 군정장관이 기자 회견 중 전력대책위원회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찾아온다 해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수준이다. "그들은 북조선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 만났자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딘은 말했다.(1948년 7월 15일 일기)

북측과의 적극적 협상을 주장해 온 전력대책위원회에서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원회는 7월 21일부로 딘 장관에게 공개 편지를 보냈다.

"가지가지로 불안한 중에 있는 남조선 사태는 전력 문제로 더욱 절박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이때에 각하의 구체적 방안과 그 성산의 유무를 듣는 한편 민의의 일단을 개진하려 함은 각하의 치하에 있는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인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이리하여 전후 다섯 번이나 배방하였으나 놀란 것은 7월 16일부의 각하의 담화였습니다. 면회하려 온 사실이 없다고 단언한 각하의 안하무인적 담력에 대하여 위선 경의를 표합니다.

각하는 우리를 가리켜 북조선 정책을 지지하고 미군정을 비판 반대하는 까닭에 만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각하께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발전선은 비용 과대로 유해무익입니다. 요컨대 남조선 단독 조치로는 해결의 길이 용이치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대북 해결의 일로가 있을 뿐입니다. 이 길을 생각하는 사상이 곧 공산주의요 북정(北政) 지지라 할진대 실로 전력에 지질린 남조선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자요 북정 지지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전력 문제의 해결 여하는 사상적 차이를 캐고 정략적 기교를 따질 성질이 아닌 것입니다. 내조한 미국 기술자들도 하등의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언명한 각하의 말씀은 너무도 무책임한 것으로 느끼어집니다. 우리는 예를 갖추어 언사를 삼가리다. 다못 바라는 것은 전력입니다. 철의 장막도 우리끼리라는 자주적 원칙 하에서는 통할 수 있는 것이니 연백의 통수(通水) 문제가 이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1948년 7월 22일)


전력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 이만종과 설의식의 프로필을 통해 위원회의 성격을 가늠한다면 좌익은 아니다. 이종만(1885~1977년)은 후에 월북하기는 했지만 광산업자이면서도 문화-교육-언론 분야의 공로가 큰 인물로서, 당시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을 맡고 <독립신보>를 경영하던 인물이었다. 설의식(1900~1954년)은 일제 시대 <동아일보> 명기자의 하나로 해방 후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으나 1947년 <동아일보>를 떠나 <새한민보>를 창간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들을 모두 '북정 지지자'로 만드는 판이었다. 공개 편지 끝의 "연백의 통수"란 7월 5일자 일기에 나온 연백평야 수리(水利) 문제 해결을 가리킨 것이다.

결국 미군정은 송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남북이 각기 정부를 세운 뒤에는 송전 문제가 다시 나오지도 않았다. 1948년 연말까지 남조선 사회가 전기 부족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칼럼을 하나 옮겨놓는다.

"해를 넘기는 과제 1-실명(失明)의 7개월간, 언제나 해결되려나"

"딱!" 5월 14일 정오 고압 전화로써 북조선 산업국장 이문환 씨와 과정 오 상무부장 사이에 통화중 전화는 끊어지고 북조선에서는 급기야 단전하였다. 그 후부터 남한에서는 날로 전력 사정이 악화되어 공업 농업 등 제 부문을 비롯하여 생활양식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영월 청평 당인리 인천 부산 등지의 발전소에서 발전하고 있는 전력으로 인하여 완전 실명의 위기는 면하였으나 이즈음 전력 사정은 석탄 부족과 수위 저하로 지난 15일 현재 4~5만 킬로와트를 넘지 못하는 형편으로 앞날이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단전 이래 7개월이 경(經)통(通)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전력 사정이 암담함은 당국자의 격별한 조치가 부족한 탓일런지 모르나 한편 노력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디젤엔진 수입 발전소에 대한 특수한 배려, 미인 전력 기술자의 초빙 등 제 조치를 열거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보아 신통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상임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로 말미암아 경제 민생에 미치는 악영향이란 더 말할 것 없을 것이다. 현재 남한에서 초소한도로라도 필요한 양을 13만 킬로와트로 추산한다면 방금 발전량은 그 4분지 1밖에 되지 않는 형편. 이러고서야 어찌 산업의 발전은커녕 복구도 꾀하기 힘들 것이다.

본래 북한에서 송전을 중단한 것은 대상 물자를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에는 좀 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5·10 선거가 실시되고 머지않아 국회와 정부가 수립될 것을 앞질러서 단전하였던 것이다. 이를 좀 시야를 넓혀서 본다면 냉정전의 한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정부 수립에 대한 소의 보복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미-소 냉정전 틈에 끼어서 시달리는 것은 우리뿐, 이제 대한민국도 들어섰으니 당국자의 좀더 적극적인 전력 시책이 긴급히 요청되는 바이다.

아! 전력문제는 해결을 짓지 못한 채 무자년을 보내고야 마는구나. (<경향신문> 1948년 12월 21일)


비교적 중립적 신문인 <경향신문>에 실린 글에도 송전 중단을 '소련의 일방적 횡포'로 보는 반공 선전이 투영되어 있다. 건국 반년도 안 된 시점인데, 남북 협상에 의한 전력 문제 해결은 말도 꺼낼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조선인끼리 해결하면 좋을 일을 해결하지 못하게 한 것이 미군정이었고, 미군정이 물러난 뒤에도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것이 분단 건국이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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