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이 테이블>(마이클 온다체 지음, 한유주 옮김, 다산책방 펴냄). ⓒ다산책방 |
<잉글리시 페이션트>(박현주 옮김, 그책 펴냄)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마이클 온다체는 실제로 스리랑카 출신으로 소설과 똑같이 11살 되던 1954년에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주인공은 작가와 이름도 같을 뿐더러, 똑같이 덜리치 칼리지를 다닌 것으로 나온다. ("내가 결말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후, 덜리치 칼리지 도서관에서 A.E.W. 메이슨의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135쪽)) 소년은 작가가 되었으며 현재 캐나다에 살고 있다.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이지만, 마이클 온다체 본인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허구임을 애써 강조한다.
"선장과 승객들, 배의 승객들 전원을 포함하여 화자 역시도 허구의 인물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배의 이름은 오론세이이지만 (사실 오론세이라는 이름의 배가 몇 대 존재한다), 이 배는 완전히 상상의 존재이다."(393쪽)
작가의 말을 믿자면, 배의 식당에서 가장 말석을 의미하는 "고양이 테이블"에 앉은 승객들은 작가의 피조물인 셈이다. 피아니스트 마자파 씨, 비둘기들을 운반하고 범죄소설을 읽는 라스케티 양, 원예가 대니얼스 씨, 재단사 구네세카라 씨, 배를 해체하는 네빌 씨, 그리고 마이클 또래의 두 친구, 거칠고 활기 찬 캐시어스와 철학적이고 몸이 약한 라마딘. 친구들에게 마이나라고 불리게 되는 11살 소년은 인생의 일등석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여기 고양이 테이블의 손님들에게서 얻는다. 그리고 소년들에게는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소녀들이 있기 마련이다. 마이나의 먼 친척인 에밀리,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호주 여자애, 귀가 들리지 않는 소녀 아순타.
전체 사건을 스틸 사진의 콜라주처럼 시적으로 묘사되는 장면들의 모음으로써 보여주는 마이클 온다체의 기법은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작가와도 딱히 닮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는 여러 영국 소설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폭풍이 몰아치는 갑판 위에서 무모한 모험을 펼치는 세 소년의 모습에서는 <15소년 표류기>를 포함하여, 전형적인 모험소설의 소년들이 떠오른다. 소설 내에서도 <정글북>이 언급되지만, 길을 떠난 소년이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에서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킴>(하창수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 언뜻 스친다. <킴>은 온다체의 다른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도 주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으로,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폭탄 해체반 킵은 식민주의적 속성이 있는 <킴>을 새롭게 쓰는 인물로 등장한다. 킵도 마이나와 공통점이 있다. 킵은 동양에서 배를 타고 먼 유럽으로 왔으며 소설 내에서 새로운 세계 속 자아를 깨닫고 성장하는 청년이다. 또한, 킵도 기숙학교 시절 온다체 본인의 별명이었으므로 마이나와 킵은 작가의 두 분신으로서 이란성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다. 또 사슬에 묶인 채 한밤에 갑판을 산책하는 죄수, 소년들의 호기심, 죄수와 가련한 곡예사 딸의 결말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 연상되기도 한다.
▲ <잉글리시 페이션트>(마이클 온다체 지음, 박현주 옮김, 그책 펴냄). ⓒ그책 |
소설에서는 이 실론에서 런던에 가는 항해와 마이클이 어른이 되었을 때 겪는 사건들이 영화의 교차편집처럼 펼쳐진다. 그가 항해에서 만났던 사람들, 친구들과는 필연적으로 이별하며 그들 중 어떤 이는 이미 세상에 없다. 열일곱 소녀가 사랑에 품었던 기대는 배반을 당하며 안전한 세계에 대한 믿음은 깨어진다. 굳건하고 믿음직스럽게 바다를 건넜던 배 또한 이제 어딘가에서 나무와 철로 해체되었으리라. 누구는 바닷속으로, 누구는 땅속으로 사라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괴로움을 겪고 심장이 약간씩 자리를 바꾸는 경험이다.
소설의 후반부, 이제 작가가 된 마이클은 고양이 테이블의 어떤 일원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소년과 소녀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어른의 편지이다. 그는 편지 끝 부분에서 사뮈엘 베케트의 말을 인용한다. "젊어서 절망하고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 이 말은 사뮈엘 베케트가 젊은 작가 에이던 히긴스에게 주었던 충고라 한다. 감정들을 직접 맞대면하지 않고 눈길을 돌려버렸을 때, 사람은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어른이 되는 항해의 목적은 젊어서 충분히 좌절하는 것, 그리하여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2001년의 여행 이후로 나는 후회하고 싶은 일들을 겪을 때마다 젊어서 충분히 좌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은 마음속에 숨겨둔 감정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여러 번 여행을 떠났어도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라는 것도 어른에게만 있는 감정. 길고 짧은 떠남이 아무것도 바꾸어 놓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고양이 테이블>에서 작가가 쓴 마지막 문장은 유도라 웰티의 <낙천주의자의 딸>(왕은철 옮김, 토파즈 펴냄)에서 나왔다. 이 문장을 번역본에서 따오지 않고 원문을 다른 방식으로 옮겨보면 이러하다.
"배가 물안개를 헤치고 나오자 그들은 배 위에 올라섰다.
인생에서 새로운 모든 것은 그처럼 다가올 운명이었다."
"The boat came breasting out of the mist, and in they stepped.
All new things in life were meant to come like that."
배에 올라설 때 인생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구도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배에서 저 배로 갈아타면서 항해를 이어간다. 마침내 어느 맑은 날, 후회가 없는 종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자료출처 : 마이클 온다체의 삶과 전기적 부분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어 마이클 온다체 엔트리와 (☞바로가기) 2011년 8월 <가디언>의 기사 "Michael Ondaatje: The divided man"에서 도움을 받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인용구와 관련한 부분은 <가디언>의 기사(☞바로가기) 및 <뉴욕타임스>의 기사 (☞바로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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