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고쳐 잡고 <여행에 미치다>(이화자 지음, 이숲 펴냄)를 뒤적거렸다.
여행은 혁명 같은 것.
어제의 나를 허물고 새로운 나를 짓는다.
▲ <여행에 미치다>(이화자 지음, 이숲 펴냄). ⓒ이숲 |
흐르는 시간을 거역할 수 없으니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도 나는 계속 새로운 내가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은 공간을 이동시키는 행위를 함으로써 시간을 따라서 고요히 흐르기만 하던 자신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다. 덩달아 시간도 뒤틀려 버리니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은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후폭풍과 여진을 생각하면 나를 끊임없이 허무는 행위도 여행이고 새롭게 짓는 행위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물길을 뒤바꿔놓은 혁명적인 여행이 내게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런 여행이 아니더라도 나는 틈만 나면 세상 구경을 다니곤 했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은 병치레를 하느라 여행을 자주 다니지 못했다. 사실 그냥 떠나면 되는 것이었지만 그럴 여유와 용기를 내기 힘들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시민천문대를 찾아가서 별도 보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만나는 일종의 천문대 순례를 하려는 것이다. 천문학자가 되기 전에 내가 겪었던 아마추어 천문가 시절의 나의 감성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다. 별을 모면서 가슴 벅차하던 그 느낌을 다시 공감하고 싶어서다.
오래도록 책장에 꽂아만 두었던 <자오선 여행>(쳇 레이모 지음, 변용란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을 꺼내들었다. 천문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을 꼭 한번 읽고 싶었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도 0도의 본초 자오선을 따라서 여행을 하면서 쳇 레이모가 쓴 여행기다. 사실 그의 개인적인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을 핑계 삼아 쓴 과학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2003년 가을, 나는 영국 남동부를 가로지르는 경도 0도의 본초 자오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내가 그리니치 자오선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본초 자오선은 전 세계의 공간과 시간을 측정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1675년 찰스 2세가 세운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 자오선은 1884년 이후 모든 지도와 시계의 표준이 되었다. 또한 본초 자오선은 과학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다른 수많은 지역을 놀라울 정도로 가깝게 지나간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있는 아이작 뉴턴의 연구실은 바로 본초 자오선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링컨셔에 있는 그의 생가 또한 마찬가지다. 켄트 주 다운에 있는 찰스 다윈의 집은 자오선에서 불과 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더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인간의 호기심에 얽힌 이야기다. 그토록 주렁주렁 매달린 산책로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 <자오선 여행>(쳇 레이모 지음, 변용란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
그리고 쳇 레이모의 발길은 드디어 경도 0도의 본초 자오선을 지나는 그리니치 천문대에 도달했다. 그가 그곳을 먼저 들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본초 자오선을 따라서 걸었다는 것도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떤 지식은 다른 지식보다 더 믿음이 간다. 이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른바 성장이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여행을 통해서 그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고 그 느낌을 내가 공감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에서 찾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다른 대안보다 믿음직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다.
그래서 <자오선 여행>은 쳇 레이모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여행기가 아니라 현대 과학을 완성한 과학자들의 지적인 성장 과정을 그린 성장 에세이기도 하고 그 여정을 헤쳐 갔던 용기 있는 선각자들의 자취를 따라가는 우리들 자신의 여행기이기도 하다.
천문대를 찾아나서는 내 여행은 누구의 이야기가 될까.
사실 <여행에 미치다>가 배달되어 오기 전까지는 다른 여행기를 읽고 있었다. 이 책을 받아서 훑어보면서 문득 <자오선 여행>이 떠올랐고 읽고 있던 책을 물리고 두 권의 책을 같이 읽기 시작했었다.
<자오선 여행>의 옮긴이의 글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좋은 책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디지털 세상 속에서도 아날로그 형태의 감수성을 무엇보다 잘 느끼게 해 주는 종이책의 소중함과 가치가 가능한 한 오래도록 이어지질 바라는 사람으로서, 또 다른 책에 대한 독서욕을 일으키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김소연 시인이 어느 날 트위터에 날렸던 글이 생각났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시에는 좋은 시와 나쁜 시가 없다. 다만 나에 관한 시와 그렇지 않은 시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고쳐봤다. '여행에는 좋은 여행과 나쁜 여행이 없다. 다만 나의 여행과 그렇지 않은 여행이 있을 뿐이다.' 또 이렇게도 고쳐 적어 봤다. '여행기에는 좋은 여행기와 나쁜 여행기는 없다. 다만 나에 관한 여행기와 그렇지 않은 여행기가 있을 뿐이다.'
<자오선 여행>은 객관적인 면면을 따져보자면 좋은 책이다. 충실한 내용도 그렇지만 본초 자오선을 따라서 걷는 여행기라는 아이디어도 좋았다. 쳇 레이모의 문장은 취향의 차이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겠지만 기본적으로 탄탄하고 가독성이 높다. 이만하면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라 할만하다.
그럼 내 천문대 여행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자오선 여행>을 읽으면 이 책을 내 여행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내가 막 시작하려는 여행이 거대한 천문학의 역사를 더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내밀하고 은밀한 내 자신으로의 여행이었으면 한다. 그것이 용케도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그들의 여행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여행기도 결국은 내가 사랑하는 천문학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예감은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자오선 여행>이 아니라 <미국 횡단기>였어도 쳇 레이모가 과학을 마음속에 품은 채 책을 썼다면 또 다른 버전의 <자오선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내 여행도 내 여행기도 그것이 천문대 여행이든 유럽 배낭여행이든 내가 우주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한 그것은 별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한편 <여행에 미치다>는 개인의 은밀한 여행기다. 물론 이화자는 이 책 곳곳에 자신을 충분히 노출하고 있다. 그녀는 세상의 온갖 곳을 돌아다녔고 온갖 것을 봤고 온갖 이야기를 써놓았지만 그것은 결국 그들도 사람이었다는 보편성 찾기 놀이처럼 보였다. 자신의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사랑과 연민을 찾아내서 그들의 그것과 맞대어보면서 더 큰 연민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여행에 미치다>에서는 여행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먼저 보인다. <자오선 여행>에서는 쳇 레이모가 보이지 않고 과학의 역사 보였는데 말이다.
여행.
그것은
인문학,
철학,
과학,
의학,
예술,
체육,
가정학,
여성학,
심리학을 모두 아우르는 최고의 학문이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여행에서 배웠다.
한마디로 여행은 그녀의 모든 것이라는 말 같아 보인다. 일부 동감하지만 내 여행은 어떨까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아직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따라서 나의 천문대 여행은 그냥 놀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조망하다 보면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 하나의 일에서 다음으로 이동할 때 여행을 떠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얼마 전에 두 달 동안 미국 LA에서 뉴욕까지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한 후 귀국한 지 며칠이 되지 않은 사람을 만나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도 십 수 년간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여행을 떠났고 귀국한 후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내가 만났을 때 그는 새 일터에서 불과 닷새를 보낸 상태였다. 또 내 여행은? 하고 반문해 보았다. 역시 그냥 놀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는 책 한 권과 같다.
여행하지 않는 것은 태어나서 책의 한 페이지만 읽고 죽는 것과 같다.
여행을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는 것은 진부하지만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는 한 여전히 효과적인 비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그냥 그렇게 여행 없이 책을 읽지도 않고 그저 세월을 낭비하면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역시 내 여행은 그녀의 여행만큼 절실하지 않아 보였다.
뭘 위해 싸우는지, 뭘 원하는지 모를 때
나는 여행으로 돌아간다.
여행은 좋은 도피처이고 안식처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물론 혼자만의 여행이나 그런 시간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시공간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립고 절실하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이동시키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나는 매순간 여행을 하고 산다. 그냥 딴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딴 세계로 솟아오르기도 한다. 여행 갔던 어느 시점과 어느 곳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생각하면서 흐뭇하게 미소를 짓기도 한다. 아마 나의 이번 여행도 그리운 나의 그 마음으로의 회귀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간격의 미학이다.
고민이 깊은 만큼 멀리 가야 한다. 필요한 만큼 멀리 가야 한다.
내가 찾던 구절이다. 낯설지 않으면 여행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여행이라고 하더라고 시공간의 변화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새롭고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면 이화자와는 다른 의미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이 구절을 썼다고 가정하자면) 나는 이 구절에 동의한다. 멀리 가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여행의 진짜 마법일지도 모른다.
여행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가장 잘 맞는
속도를 찾아가는 작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진짜 찾고 있었던 문장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여행은 (앞 구절은 글쓴이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거두절미하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선언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을 내 멋대로 곡해해서 그저 그냥 놀이로서의 나의 천문대 여행을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내 여행이 <자오선 여행>처럼 별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또 그것이 고향을 찾아가는 연어의 여정 같은 회귀 여행이 되리라는 것을, 또 그 여행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리라는 것을, 또 새로운 거리의 간극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애써 그냥 놀이라고 외면하고 싶은 이상한 나를 붙잡아줄 바로 그 한 마디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오선 여행>과 <여행에 미치다>를 읽으면서 한바탕 내 여행의 시뮬레이션을 한 기분이 들었다. 예방주사를 맞고 난 날 밤 시름시름 그 열기에 시달리던 바로 그 기분도 들었다. 이제 예비 여행은 끝났고 나의 여행만이 남았다.
물론 나는 그들이 갔던 그 여행길을 따라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나만의 여행을 나설 것이다. 여행이 끝난 후 나는 결국 그들의 여행길 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냥 놀이라고 우기면서.
그냥 그렇게 여행을 떠나볼 속셈이다. 여행이 끝난 다음에 여행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왜 여행을 떠났는지 정산해 볼 생각이다. 지금은 그냥 막무가내로 소비해볼 생각이다. 망나니가 되고 싶다. <자오선 여행>과 <여행에 미치다>를 이번 여행에 결코 가지고 가지 않을 생각이다. 벌써 저 멀리 던져버렸다. 책꽂이에 꽂아놓아야겠다. 모든 여행은 유일하고 새로운 것이므로. 그들과 작별하고 이제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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