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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보다 중국이 우월? 아니, 지구를 구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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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보다 중국이 우월? 아니, 지구를 구하자고!

[프레시안 books]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지금은 그렇다 치고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이언 모리스 지음,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라는 제목만 보면, 서구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주장처럼 들린다. 그런데 원제는 "Why the west rules for now"다. 이 "for now"에 저자의 역사 인식이 담겨 있다. "지금 당장이야" 또는 "당분간은" 이라는 단서가 달린 셈이다. 당연히, '그렇다면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언 모리스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아편전쟁과 중국의 굴복이라는 1840~50년대를 기점으로 20세기 전체에 이르는 시기에 서구의 패권에만 주목한다면, 서구의 지배는 세계사에 대한 인식의 기본을 이룬다. 이에 대해 이언 모리스는 인종이라는 생물학적 요소나 애초부터 서구의 우월성이 보장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도리어 그것은 지리라는 우연적 요소와 사회 발전의 단계가 서로 어떻게 결합했는지에 달려 있다는 논지를 편다.

고고학자인 그의 이 책은 우선 문명사 전반의 흐름을 단숨에 포착하려는 독자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전체적 얼개를 방대한 두께의 책에 매우 흥미진진하게 기록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은 스탠포드 대학의 고전 역사학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중의 시선을 핵심적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마치 소설과도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영국이 중국의 허리를 치고 들어간 1840년 아편전쟁의 역사적 사실관계를 뒤집어 중국이 영국을 압도하는 반대의 경우를 상상으로 설정하면서 시작되는 그의 책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적 변화를 다시 성찰하도록 만든다. 분명 지난 200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양은 서양의 힘에 굴복 당했으나, 지금은 그러한 힘의 관계가 서서히 역전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미래적 관계

▲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이언 모리스 지음,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모리스는 서양 문명권에 고대 중근동 지역까지 포함시켜 설명하고 있고, 동양은 대체로 중국을 중심으로 그 역사적 발전 양상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야에는 아프리카, 인도, 중남미 그리고 동남아시아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위치에 있다. 서양으로 일컬어지는 유럽과 미국을 한 축으로, 그리고 동양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축으로서 중국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모리스의 관심 자체가 중국으로 세계적 패권이 이동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향후 인류가 어떤 태도를 취하면서 지구촌의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 책이 풀고자 하는 질문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문명권의 역량으로 인해서 통칭 서양의 위상이 선도적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에 반해 중국은 그보다 늦은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의 농경제국의 형성으로 동과 서의 지배 기반에 차이가 생겨났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체가 곧 동양의 장기적 낙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몇 차례의 역전과 재역전의 시기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서기 1100년 중국의 문화적 약진은 1500년대 서양의 르네상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도약을 가져왔고, 이러한 바탕 위에 17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동양의 우월성을 유지해왔다고 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간에 있는 1492년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는 그보다 앞서 이루어졌던 훨씬 큰 규모의 명대 정화의 대항해의 역사적 가능성을 넘어서면서, 향후의 역전을 가져오는 경계선이 된다. 물론 이것이 실질적인 지배 체제를 구성하기까지는 2~300년의 시간이 흘러야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이었던 요소는 "지리"라는 우연적 요소였다고 그는 지적한다.

지리, 사회적 발전 그리고 변방

가령 지중해의 변방에 속해 있던 에스파냐(스페인)나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과 이어지면서 생겨난 지리적 가치는 당대의 사회적 발전과 깊이 연결된다. 다시 말해 베네치아와 이슬람,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이 장악하고 있던 지중해 무역에서 밀려나 있던 피레네 산맥 이하의 지역이 이제는 바로 그러한 변방성, 후진성이 유리한 고지가 되어 새로운 시기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화의 경우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온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다. 이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이 향후 발휘하게 되는 지구적 차원의 정치경제적 가치를 중국은 획득하지 못했을 뿐이니, 서구의 지배는 애초부터 역사적 운명이라는 식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달리 말하자면 "서구의 지배"라는 것은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우월성 때문도 아니고 당연하지도 않으며 당시의 조건이 우연히 그렇게 들어맞아 그렇게 되었다는 것. 또 언제든 역전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5세기의 동양은 "그 사회적 발전지수가 서양보다 훨씬 높았고 (…) 서양인이 동쪽으로 가서 지상에서 가장 풍부한 시장에 접근할 경제적 유인이 충분했던 것이다. 반대로 동양인은 서쪽으로 갈 유인이 거의 없었다."

사실 지중해 체제에서 보자면 변방의 변방인 북아메리카가 이후 미국으로 그 사회 발전의 실체를 구체화하고, 상황을 압도적으로 주도하게 되는 과정만을 보아도 어떤 국가나 체제의 영속적 지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만 보더라도, "일본이 중국은 유린하고 미국이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동양 핵심부는 몽땅 파괴되었고, 그 결과 제2차 대전은 서양의 지배를 강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특정 국가나 문명, 또는 지배 체제의 역사란 엎치락뒤치락하기 마련이며, 이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1840년대 이래로 중국은 평화와 책임성, 유연성을 거의 누리지 못했지만 1990년대가 되자 세계질서에서 적절한 지위를 찾기 시작했다. (…) 1992년과 2007년 사이에 중국의 수출량은 열두 배 증가했고, 대미 무역흑자는 180억 달러에서 2331억 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08년이 되자 월마트 같은 미국의 할인점에서 중국산 제품은 일반적으로 상품진열대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 중국산 가격과 경쟁할 수 없는 회사는 망했다.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처럼 중국도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기에 와 있을까?

그래서 이언 모리스는 "20세기는 서양의 시대의 정점이자 동시에 그 끝의 시작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논의들은 사실 낯선 것은 아니다. 역사 지식이 없다고 해도 이미 이러한 국제적 패권의 변동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리스의 관심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어느 쪽이 우월한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이제 그런 질문들은 의미가 사라진 시대라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주장이 중요하다.

지난 시기 동안 치열하게 추구되었던 경쟁 시스템의 격화가 인류가 마주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명충돌론을 내세웠던 새뮤얼 헌팅턴이나 미국의 일방적 패권을 내세우는 논자들, 그리고 미중관계에 대한 전략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리와 궤를 달리 한다.

그는 강대국의 핵무기 감축, 지구온난화를 억제할 수 있는 에너지 정책과 재생 에너지 개발을 비롯해서 인류가 공동으로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모두가 파국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1945년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아인슈타인의 발언을 인용한다.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 정부의 창설에 달려 있다." 이 발언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적 과학자의 주장이라고 조롱을 받자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되받아 친다.

"세계 정부라는 생각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

한 고대 문명학자의 세계사에 대한 저서가 단지 역사 발전을 논하는 데 있어 학문적 논란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구적 차원의 협력에 대한 모색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가 단연 주목된다.

동과 서, 그 경계선이 사라지고, 남과 북

▲ 이언 모리스. ⓒstanford.edu
그는 "우리가 기존의 생명활동을 초월하게 될 때면 동양도 서양도 경계도 혈통도 출생도 없어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까지 해질녘을 연기할 수만 있다면 그 둘은 마침내 만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해질녘이란 역사가 멸절될 위기에 있는 상황이며, 기존의 생명활동이란 서로 지배하고 경쟁하는 문명을 말한다. 그는 역사가의 임무를 언급하면서 "역사가만이 인류를 나누는 차이점을 설명하고, 그러한 차이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인류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설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시야를 전 지구적으로 돌려 이렇게 인류의 생존을 고민하고 있는 역사가가 있다면, 지금 우리는 남과 북 사이의 역사적 차이가 우리 모두를 파괴하는 쪽으로 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동과 서가 만나 지구적 과제를 해결하는 세상을 기대하는 이언 모리스의 꿈처럼, 우리는 남과 북의 사회 발전과 역사가 서로 엎치락뒤치락해왔던 과거를 돌아보고 함께 공동의 과제를 풀어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 나라의 집권 세력은 지금 "왜 우리가 지배해야 하는가?" 식의 주장에만 몰두하고 있다. 변방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우리의 사회적 발전의 역량을 결합시킬 지혜를 구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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