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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떳떳해진 제헌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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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떳떳해진 제헌절의 의미

[해방일기] 1948년 7월 17일

1948년 7월 17일

제헌절은 개천절, 한글날, 3·1절, 광복절과 함께 국경일의 하나다. '국경일'은 대한민국의 법률적 제도다. 1949년 10월 1일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그 근거다.

민족과 국가를 굳이 구분해서 따지자면 다섯 개 국경일은 모두 국가보다 민족의 경사를 대표하는 날이다. 그중 국가의 경사로서 큰 의미를 가진 것이 제헌절인데, 이것 역시 민족의 경사로서 의미를 더 크게 볼 수 있다. 한민족이 헌법을 갖고 입헌 정치를 누리게 된 것은 1000여 년 전 민족 국가를 갖게 된 이래 국가 제도 측면에서 가장 큰 성취임에 틀림없다.

근년 사회 일각에서 8월 15일을 광복절보다 건국절의 의미로 경축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치졸하고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는 제헌절에 담겨 있다. 8월 15일의 정부 수립 선포는 헌법 공포에 비해 비중이 작은 하나의 절차에 불과한 것이고, 수립 직후의 대한민국 정부도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치졸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1948년을 내세워 1945년의 의미를 뭉개려 드는 의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1945년에 끝난 일본 식민 지배는 한민족의 1000년 민족 국가 역사가 중단된 민족사 초유의 이민족 지배였다. 이민족 지배의 가장 비근한 예로 13세기 중엽 이래 100여 년간의 '몽골 지배'를 들 수 있는데, 일본 식민 지배와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의 간접 지배였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배' 대신 '간섭'이란 말을 굳이 쓰는 학자들도 있다.

나는 1945년의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했다는 문제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해방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외세의 억압을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가 1945년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까지 우리 민족 사회가 장래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조건을 거의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민족의 경사로서 의미가 큰일이었다. 그 뒤의 역사를 아무리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우리의 역사'로 볼 수 있게는 된 것이다.

'건국절' 주장에 대해 5년 전 이렇게 논평한 일이 있다.

뉴라이트는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자본 계급, 투기 세력에게만 소속감을 가진 자들이다. '건국절' 주장을 비롯한 그들의 대한민국 찬양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이간질일 뿐이다. 사람들의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을 헷갈리게 해놓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온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 기회를 얻으려는 교란 작전일 뿐이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현대 세계에서 제 발로 첫 걸음마를 뗀 계기였다. 서툴 때 고생도 많았지만, 피땀 흘려가며 여기까지 왔다. 오죽잖은 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도 그 동안 국민들이 잘 키운 덕에 이제 국가 노릇을 제법 하게 됐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해서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이 저절로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승만 시대의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것,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에 불만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대한민국을 더욱더 자랑스럽게 키워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35쪽)


한민족이 헌법을 갖게 된 것을 큰 경사로 여긴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헌법을 두 개 갖게 되었다는 것이 또 문제다. 7월 10일 북조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한 일을 그 날 일기에 적었는데, 이 헌법은 장차 구성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회의에서 9월 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란 이름으로 다시 공포되기에 이른다. 7월 10일의 공포는 북조선의 것이고 9월 8일의 공포는 전 조선의 것이란 주장이다. 이남의 7월 17일 공포 헌법 역시 전 조선의 헌법이란 주장이었다.

7월 10일 일기에서 이북의 헌법 제정은 이남에 비해 차분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남 국회에서 헌법 심의 과정을 서둘러 진행하는 이승만의 초조함은 7월 12일 심의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7월 13일자 <동아일보> "국회 여적"에 희화화되어 그려진 데서도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틀 동안을 휴회하였던 작일의 국회는 헌법안 제3독회를 열어 역사적 제헌의 성문을 완료하는 것이다. 국내외의 정세가 일각의 순준(巡逡)을 허락지 않는 긴박한 국면에 하루가 바쁜 정부수립을 앞두고 그 기초법인 헌법의 통과를 초조히 생각하는 이 의장, 이날도 몸소 사회를 맡아 의사 진행을 집무.

웬만한 것은 이론만으로 시간을 천연할 것 없이 빨리빨리 진행하기를 위주하는 이 의장과 호흡을 같이 하여 헌법안의 조문을 낭독하여 내려가는 기초위원장, 숨도 안 쉬는지 낭독의 음조 몹시도 빨라 좀처럼 수정발언의 틈조차 허락지 않는다.

(…) 제6조 '국방군'을 '국군'으로 수정하자는 동의와 제72조 제2항 즉 외국인의 지위에 관한 조항 등에 있어 약간의 의논이 벌어져 시간이 걸린 뒤 제72조 낭독이 끝났을 무렵에 이 의장, "오늘의 오전 회의는 30분을 연장하여 이 독회를 마치도록 한다. 여러분이 발언을 너무 많이 하는 까닭에 벌로써 시간을 연장한다."고 유모어 일석.

(…) 12시 20분 헌법안 제103조 전문의 낭독은 완료. 곧 전문을 그대로 통과할 것을 전원 기립으로 가결하자 엄숙한 성의(盛儀). 이리하여 헌법은 드디어 성전(成典). 이 나라의 기초는 이로써 완벽.

그런데 의원 총 기립 중 오직 유아독존(?)인가. 이문원 의원 의연히 그대로 독좌(獨坐). 헌법안 통과 그것을 마다고 함인가, 헌법안 내용에 불만이 있다 함인가. 엄숙(?)한 침묵에 그 의중을 짐작할 바 아니나 총 기립 중에 부화(附和) 않는 것만 가상타 할까.


익산을구 출신의 이문원 의원(1906~1969년)은 무소속구락부에서 활동하다가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전쟁 중 납북된 인물이다. 그는 헌법 심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6월 26일에는 33인 의원을 대표해서 헌법안 채택 의결에 국회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게 하자는 동의를 내놓았다가 부결되었다. 6월 30일 본회의에서는 이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초안을 전적으로 반대한다. 국회는 양원제이어야 하며 내각제로 할 것을 주장한다. 대통령은 직접선거에 의하여야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순이 어찌하여 생겼는가. 국가 만년대계의 원칙인 헌법의 제정은 법 이론에 입각하여야 한 터인데 이 초안은 너무 현 정세에만 구애된 감이 있다. 이 헌법은 조속한 독립을 원한다는 구실로 일부 간부가 자파 이익에 부합시켜 제정하였다고 본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1일)

이 발언 중 "일부 간부"란 물론 의장 이승만을 가리킨 것이다. 기초위원회에 대한 이승만의 개입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안의 내각 책임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바꾼 것이다. 그는 6월 15일 기초위원회에 임석해서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고, 기초위원회가 그에 따르지 않자 6월 21일 예정된 본회의 상정을 23일로 늦추면서 자기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렇게 직접 나서기까지 하지 않으면서 영향력을 이용해 초안을 자기 원하는 방향으로 만든 점이 많았을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문원이 이 문제를 지적하자 회의장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7월 1일자 <자유신문> "국회 기자석" 칼럼이 재미있다.

"모 간부 의식적 주장 설로 개회 이래 초유의 파란 야기"

헌법 초안에 관한 대체 토의란 중요한 것인데 날이 무더워서 그런지 의원 제공들은 신경이 과민해져서 가끔 인간의 일면인 감정을 노출하여 아는 사람에게는 국회 내의 3·1과 무소속구락부가 드디어 재작일에 합동을 하게 되어 그에 따르는 공기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게 된다.

이문원 의원의 헌법 통과에 있어서의 기본 태도 문제와 관련된 발언 중 "너무 정세론에 흐르고 있는 듯하여 어떤 간부 의식적인 주장 노력에 의하는 것 같다. 운운"과 이에 대한 변증은 결론도 맺기 전에 고함 노성으로 중지되었는데 과연 결과에 있어 파문은 커서 의원 중 체면불고하고 타인의 발언을 방해 억제하려는 것은 그다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이남규 서우석 이윤영 서상일 조헌영 제 의원이 격분하여 발언 취소 요청 또는 징계위원회 회부를 주장하는데 나용균 의원이 "기초위원회에 관한 문제로 과연 기초위원회가 어떤 간부의 의사대로 초안을 작성하였는지 우리 기초위원에게 물어봅시다."라 한 발언은 학(鶴)의 일성(一聲) 같다고나 할까.

국회법 제82조에 의하여 징계 운운이 연발되며 김명동 의원 의분을 느꼈는지 등단하여 국회법 제61조를 인용하여 이남규 의원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동의한 것은 이척보척(以尺報尺)에서 나온 일이라고 할까. 말인즉 의장이 발언 금지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10여 차나 언권 없이 발언한 것이 까닭인 듯도 하였다.

당시의 헌법 준비 과정을 굳이 비교하면 이남의 절차가 허술했다. 그 후 이남 헌법이 기구한 곡절을 더 많이 겪게 되는 것도 이 출발점의 허술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곡절 속에서 대한민국 헌법은 발전을 거듭해 와서 이제 헌법 자체는 어느 나라 헌법 부럽지 않게 훌륭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그에 따라 제헌절의 의미도 떳떳하게 되었다.

3·1구락부와 무소속구락부의 이름이 위 기사 중에 나온다. 국회 개원 무렵부터 무소속 의원들의 세력 형성이 '구락부'란 이름으로 시도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6월 1일 조봉암이 주도한 50여 명의 모임이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3일자) 6월 5일자 같은 신문 보도에는 조봉암과 김약수를 중심으로 한 6·1구락부와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3·1구락부가 거명되었다. 6·1구락부가 무소속구락부의 출발점으로 보이는데, 3·1구락부는 신익희가 독촉 일부의 독자 세력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3·1구락부 가담, 독촉 중요 간부 반대"

조선 독립 정부 수립에 중대한 역할을 띠고 전 민중의 기대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신 국회 내부에 구락부가 족출하여 신국가 건설의 기초가 될 헌법 제정을 비롯하여 제반 법안 제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함은 기보한 바 있거니와 최근 독촉 출신 신익희 의원을 중심으로 조직된 3·1구락부에 대하여서는 현 독촉 중앙간부진에서는 3·1구락부에 대하여 찬부 양파로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한다.

즉, 독촉국민회를 순수한 국민 운동 단체로 하자는 명제세 이윤영 양우정 이활 제씨들은 국회에서 구락부를 조직하는 것은 당파를 초월하여야 할 국회 내에 파벌대립 관계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독촉 출신 의원에게 구락부에 가담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발송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며 신익희 전호엽 남송학 제씨는 구락부 조직을 강조하고 있다 한다. 하여튼 독촉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된 3-1구락부원과 현 독촉 중앙간부와의 관계가 주목을 끌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1일)


6·1구락부와 3·1구락부의 통합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가 6월 내내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는데, 신익희 측에서 독촉에 대해 명분을 세우는 동시에 세력 확장을 꾀하기 위해 퍼뜨린 얘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5·10 선거의 무소속 당선자 80여 명 중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들어 있었으므로 일부가 한민당과 3·1구락부로 흡수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결국 50여 명이 무소속구락부로 남게 된다.

서산을구 출신의 김동준 의원이 1948년 6월 23일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무속 의원의 각오"가 무소속구락부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므로 길지만 옮겨놓는다.

금반 총선거에 당선된 국회의원을 소속정당 별로 분류해 보면 무소속 의원이 85명으로 단연 수위를 점하고 그 다음이 독촉계열과 한민당의 순위로 되어 있다. 총선거의 이 숫자적 결과로 추측컨댄 일반 국민이 기존 단체나 기존 정당에 소속된 의원에게보다도 정당적으로 아무 연계도 없는 소위 무소속 의원들에게 더 많은 기대와 촉망을 가지고 있음을 규지할 수 있다.

기존 정당들이 각각 정강 정책을 중외에 분명히 선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이 정당인에게보다 무소속 의원에게 더 많은 기대를 가지는 것은 무슨 이유이며 우리 무소속 의원들은 또 무슨 까닭으로 무소속을 표방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던가?

입헌 정치에 있어 정치적 활동을 강력히 전개하려면 그리고 또 정치인으로서의 영달적 야망을 만족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정당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한 인사들에게는 초보적인 상식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정당적 배경을 거부하면서 무소속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장래할 국회 의장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정치적 활동에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릇 정당이라는 것은 정강 정책을 같이 하고 또 이해(利害)가 일치되는 정치인사들의 규합체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해서 정당인은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소속 정당의 대변자적 역할을 띠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무소속 의원은 그러한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지공무사하고 공명정대한 정치적 공도를 걸어 나가기 위하여 무소속으로 나왔고, 일반 국민들이 무소속 의원들에게 격별한 기대를 부치고 있는 것도 또한 그 점에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여 마지않는다.

즉 환언하면 '무소속' 3자는 국회에 임하여 우리는 하등의 단체적 약속이나 정당적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진실로 초정당적인 입장에서 자율적인 태도로 멸사봉공을 다하겠다는 것을 일반 국민에게 서약하는 무언의 맹서였던 것이다.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국회의원 중에는 반드시 순수한 무소속만이 아니라 개중에는 당선의 영예를 획득하기 위한 기만적 가면을 썼던 인사가 전연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가면을 썼거나 어쨌거나 무소속 입후보자는 정치활동에 일체의 외적 구속을 배격하겠다는 묵계만은 있었고, 일반 국민이 신성한 한 표를 우리에게 던진 것도 그러한 약속 밑에서였다.

이에 85명의 무소속 의원들 간에는 일반 국민에게 무언으로 맹서한 내용이 동일함을 깨달을 수 있고 무소속 의원들의 공통된 정치이념이 여기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출마 당시의 유권자 제위와의 묵계를 배반하지 않는 이상 그 이념은 확고부동 영구불변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국회 내에는 국회의원만이 있을 뿐이지 정당인은 있을 수 없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돌이켜 생각건댄 도대체 정당이라는 것은 정치활동을 위한 단체요, 정치활동은 국회를 통하여 비로소 전개되는 것일진댄 의회에 있어서의 정당의 존재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총선거 이후 각 정당들이 무소속 의원을 포섭하려고 맹활동을 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을 무언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5월 31일 국회 개회 이래 각 정당에서는 무소속 의원 포섭에 다방면 다각적으로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심하면 무소속 의원이란 마치 필연적으로 어느 정당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될 부동(浮動)적 존재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일부의 무소속 의원들 자신까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무소속이란 일체의 정치적 연계를 배격하고 자유자재한 입장에서 정치적 활동을 실천할 것을 일반 국민에게 맹서한 지공무사한 존재일 따름이지 풍세에 맹종하여 우왕좌왕할 부동적 존재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무소속 의원은 국민에게 대한 공통적인 묵계에 따라 무소속 의원끼리 일치단결할 필연성은 잠재하여도 그 외의 어느 기존정당에 편승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만약 기존하는 어느 정당이나 단체에 가담한다면 가담하는 행동 그 자체가 이미 국민과의 약속을 배반하는 결과가 된다고 하겠다.

무소속 의원들의 이제부터의 거취는 지금 대다수 국민의 주시의 적(的)이 되어 있다. 우리들의 금후의 일거수일투족이 일반 국민의 신뢰와 실망을 직접 좌우할 것을 생각할 때 신체는 비록 개일일지나 우리의 쌍견에 부하된 책임이 중차대함을 자각하여 일시적인 개인 감정이나 개인 이해로 경솔한 행동을 취하지 않도록 심신(深慎)의 주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무소속 의원들은 의회활동에 있어서 앞으로 어떤 태도로 나가야 하겠는가? 이미 위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우리들 본래의 이념은 국정에 대한 일당전제를 견제함으로써 정치를 국민 본위로 운영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상의 좌우와 정당의 갑을을 막론하고 그 정책이 국가의 장래에 유익한 것이라면 용감히 이를 취하고 국민의 복지에 해로운 것이라면 결사적으로 이를 배격할 기동적 지반에 입각한 의원은 오직 무소속 의원들뿐이요, 그것의 승리를 위하여 최후까지 투쟁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무소속 의원들뿐인 것이다.

실로 무소속 의원들의 무소속다운 진면목도 여기에 있고 그 점이 무소속 의원의 공통된 임무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지상임무를 망각하고 일시적인 사정이나 일신상의 명리에 현혹된다면 우리를 무소속인 까닭에 국회 의장에 내보낸 유권자 제위를 후일에 무슨 면목으로 접대할 것인가?

이에 무소속 의원들은 각자 간에 공통된 지상임무의 완전 수행을 위하여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우리가 만약 금후로도 기왕과 같이 분산적인 태도로 나간다면 무소속 의원들은 공통된 이념 아래 공통된 임무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사명을 충분히 완수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현하 국회 내의 분위가 반드시 순조롭다고만 보기 어려운 형편이니 차제에 우리는 대동단결로써 행동통일을 꾀하지 못한다면 건국 대업에 천추의 유한을 남기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무소속 의원의 대동단결을 고조하는 것은 그러한 단결을 통하여 정당적 색채를 띠자거나 혹은 의회 내에 있어서의 세력체를 조성코자 함이 아니라 그 목적은 진실로 무소속 의원들 본래의 공통적인 사명을 다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애국적 지성(至誠)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결론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제 하에서 개회 이래의 무소속 의원들의 향배를 관망할 때 우리는 반성치 않을 수 없는 점이 반드시 없다고도 하기 어렵다. 무소속 의원의 단결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기에 이미 무소속 결합체로서 3·1구락부와 무소속구락부가 생겼다. 그러나 상기 두 결합체를 두고 볼 때에 마땅히 한 덩어리로 뭉쳐야 하고 무소속 의원들이 두 개의 결합체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분열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소속 의원의 결합의 의의가 공통 임무 달성을 위한 행동 통일에 있다고 할진댄 같은 무소속으로 두 개의 결합체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 어느 하나는 이미 진정한 무소속적 임무를 포기한 것이라고 보아도 그리 과오는 아닐 성싶다. 지방에 있는 유권자 제위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낙망할 것이며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원망할 것인가? 결합을 빙자하여 분열을 초래할진댄 차라리 각자각출로 개별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무소속 의원들은 공통 사명 달성에의 행동 통일을 위하여 대동단결하자! 도원의 결의를 맺어 나아가되 보조를 같이하고 물러가되 행동을 같이하자! 의회장을 우리의 결전장으로 알고 공생공사의 각오로 매진하자. 오직 그 길만이 우리 85명 무소속 의원들의 걸어갈 공도요, 또 그러는 것만이 신성한 임무를 다하는 유일한 방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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