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중에서
어린 시절 '예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창조하는 '천재'의 이미지였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천재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바로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모차르트 같은 어린이적 천재성이 아닐까. 모차르트의 진짜 성격과는 상관없이, <아마데우스>의 철딱서니 없는 모차르트의 이미지는 낭만적 천재의 전형으로 각인되었다.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만 같은, 미워할 수 없는 괴짜 예술가의 이미지. 어른다운 몸가짐이나 골치 아픈 윤리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창조를 심각한 노동이 아닌 신나는 놀이로 생각하는 무한한 자유로움.
▲ <창작에 대하여>(가오싱젠 지음, 박주은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더 오래가는 감동을 주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솔직히 뒤샹이나 앤디워홀보다는 고흐나 베이컨이 좋았고, 통통 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발랄한 소설들보다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진중함을 간직한 무거운 소설들이 좋았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보다는 '그저 내가 좋은 것'을 눈치 보지 않고 사랑하는 길이, 불편하지만 행복했다.
가오싱젠의 <창작에 대하여>(박주은 옮김, 돌베개 펴냄)를 읽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남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예술'의 압도적인 이미지에 좌지우지 당했는지를 깨달으며 부끄러워졌다. 가오싱젠은 '어린이의 천진함'보다는 '어른의 진지함'이 어울리는 예술가다. 그의 매력은 '중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아니라, 아무리 전 세계 언론의 극찬을 받아도 묵묵히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낡아빠진 화두를 끝까지 놓치지 않으며 '자기만의 심미성'의 기원을 찾으려 한 불굴의 투지에 있었다.
네가 선택한 것은 시대적인 한계 안에서의 최대한의 자유, 시장을 고려하지 않는 자유, 유행하는 예술 관념을 추종하지 않을 자유, 가장 하고 싶은 예술을 할 자유, 일개인일 뿐인 예술가가 될 자유,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일차적으로는 예술가를 향하여 발화하는 것 같지만, 사실 저 모든 문장은 평론가, 언론인, 대중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에 더욱 뼈아픈 질책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시장성이 최고의 가치로 추앙받는 시대에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트렌드나 대세나 첨단 유행이라는 코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무엇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예술, 가장 하고 싶은 예술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얼마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보았는가. 언론이 주목하는 스타 예술가나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예술가, 매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예술가가 아니라,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예술가'를 향해 얼마나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 보았는가. 우리는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고, 아끼는 법을 오래전에 잊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예술가들은 이제 예술로 철학을 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철학자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예술을 전복할 수 있었고 또 전복했다. 그런데 혁명이 언제나 적을 필요로 하듯 전복 역시 전복 대상이 될 만한 적을 끊임없이 찾아내야 했다. (······) 예술작품에 대한 심미적 평가 대신 새로운 개념 선포만 난무하게 되었다. (······) 앤디 워홀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오쩌둥을 광고 그림에 활용한 것은 독재정치에 대한 전복일까, 예술에 대한 전복일까. 누구도 '이것이다'라고 답할 수 없는 데 이런 책략의 묘미가 있다. 그의 중국인 제자들은 발 빠르게 그의 책략을 학습했다. 회화의 기교를 얼마나 익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중국대륙과 해외시장을 선점하여 판매진지를 구축하는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였을 뿐이다.
가오싱젠은 예술가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정치적 압력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 나아가 좀 더 잘 팔리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스타가 되려는 세속적 욕망과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변치 않는 사명임을 증언한다. 나아가 예술가에게는 언론이나 비평이 떠들썩하게 부추기는 '외부로부터의 미학'이 아니라 바로 예술가 스스로가 발굴한 '나만의 미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저마다 화려하고 세련된 예술이론을 떠들어대는 시대 분위기에 지친 사람들, '이것이 요즘 대세다'라고 외치는 저널리즘의 각종 광고 카피에 질린 사람들, 각종 이론과 비평의 대홍수 속에서 오히려 처절한 '미학의 폐허'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어떤 위압적인 대세에도 영향받지 않는, 예술에 대한 첫사랑, 첫 마음, 첫 설렘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분들과 함께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마치 아이가 장난감 다루듯이 창작에 임하고, 예술 자체를 놀이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이 각광 받는 시대다. 하지만 이런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에서 스스로 물러나, '예술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는, 창작의 사각지대'를 조용히 서성이며,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춤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관조하는 '어른의 예술'도 필요하지 않을까. 상상하고, 저지르고, 도발하고, 전복하는 예술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들은 관조하고, 음미하고, 성찰하는 좀 더 어른스러운 심미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지.
새로움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물론, 옛것에 대한 과잉된 의미부여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와도 변치 않는 자기만의 심미안을 천천히 키워나간다면, 예술의 창조자도 향유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요란한 트렌드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것은 끊임없이 낡아버리지만, 낡은 것은 결코 더 이상 낡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가오싱젠의 책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이 책을 이렇게 정리해보았다. 어린이의 창의성을 넘어, 어른의 포용력으로 예술을 창조하라.
더 이상 반대하고 전복할 것도 남지 않게 되자 예술은 일종의 사변, 일종의 명명으로 변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개인을 절대화하는 극한의 자아팽창이 있습니다. 문화가 왜 전복을 해야 하죠? 새로운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쓰면 됩니다.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앞 세대를 타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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