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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던' 한국은 끝났다…월세방-대출 지옥에서 '청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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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올라가던' 한국은 끝났다…월세방-대출 지옥에서 '청춘'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한윤형·박해천의 '아파트 키드의 생애'

지난 7월 2일 저녁 정독도서관 시청각실, 한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처음으로 나온 질문은 "'막내'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담스럽지는 않은가"였다. 여기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이 강연은 지난 4월 출간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한윤형 지음, 어크로스 펴냄)의 내용을 토대로 기획된 세 번의 대담 형식의 강연 중 마지막 시간이었고, 저자 한윤형(<미디어스> 기자)과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 저자)이 대담자로 나섰다.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한윤형 지음, 어크로스 펴냄). ⓒ어크로스
'83년생, 01학번'인 한윤형은 안티조선 운동의 전사로 활약한 10대 시절부터 다양한 매체에서 '20대 논객' 중 한 명으로 호명된 2008년 전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자신이 속한 세계의 '막내'였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후배의 실종'이라는 글에서 그는 "대학에 들어왔을 때 대학의 운동권 조직, 소위 학정조(학생정치조직)는 완만하지만 뚜렷이 붕괴하고 있었"으며 그가 선택한 인터넷 기반 단체나 진보정당에서도 오랜 기간 후배를 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현재 글을 쓰는 정치평론의 장(場)에서도 대체로 그러하며, 이번 3번의 강연회에서도 함께 한 사람들은 모두 90년대 학번 선배 세대였다. (1회 <88만원 세대>(레디앙 펴냄)·<소수의견>(자음과모음 펴냄) 저자 박권일, 2회 경제평론가 이원재)

청년층의 정치적 관심이 소멸해 간 2000년대가 고스란히 읽히는 '후배의 실종'에서는 그가 속한 세대의 '앞으로'에 대한 고민도 드러난다. "어디로 가야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청년 좌파의 우울증을 목격하며 그는 "드디어 '영원한 막내'를 벗어나 '선배' 역할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청년 담론이 유행하던 시기, 청년 세대 입장에 입각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그이지만 그 결과물을 엮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회 어디쯤의 나'를 고민하기 시작한 후배들에 대한 사려 깊은 편지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 책의 주요 수신자가 될 이들-200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냈거나 입학해서 현재 보내고 있는 저자의 또래 혹은 후배-에게,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녹록치 않다. 고도 성장기나 고도 성장기의 '관성'이 유지되었던 시점까지 찾아왔던 기회, 가질 수 있었던 꿈, 걸 수 있었던 기대, 실현 가능했던 삶의 모습이 거의 다 사라질 거라 보아도 무방하다는 게 강연 파트너를 맡은 박해천의 조언이다. 이른바 '청년 문제'라 불렸던 실업, 등록금, 주거 문제는 그들이 일으켰기 때문에 '청년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켜켜이 쌓인 모순이 그들 앞에 무성의하게 '던져져' 있기 때문에 진정한 '청년 문제'가 된다. '세대론'의 쓰임새가 재발견된다면 아마 그 복잡한 매듭 앞에서일 것이다.


"청년 세대의 문제는 그들이 가장 힘든 세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의 사회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층(表層)이기에 문제가 된다. 등록금 문제와 청년 실업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 부모 세대의 고난이다. 또한 청년 세대는 자신의 미래가 위에 언급한 노년 세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7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실제로도 힘들며, 한국 사회 문제를 드러내는 표층이 되고 만 걸까? 그들을 둘러싼 시대, 그들을 만든 역사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다른 세대의 손길은 도움이 될 만할까, 아니면 뭔가 어긋나 있을까? '아파트 키드의 생애'라 이름 붙은 한윤형과 박해천의 강연은 이 물음들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준다. '프레시안 books'는 저자 한윤형이 속한 세대의 현실을 날실로,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이 천착해 온 한국 중산계급의 주거문화 역사를 씨실로 엮어 전개된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내려가는 사회'

▲ 한윤형(<미디어스> 기자). ⓒ프레시안(최형락)
한윤형 :
이번 책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저나 제 밑 세대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요. 3회로 기획된 강연에서는 모두 386 세대보다는 어리고 저보다는 선배인 90년대 (초중반) 학번이신 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런 상황도 한국 사회의 담론 지형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사실 90년대 학번 선배들은 공부를 참 많이 했어요.

지금은 대학원 진학이 마치 취직에 실패한 다음의 선택지로 여겨지는 감이 있지만, 10년 전인 90년대 학번 세대만 해도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를 계속해도 되는 상황, 공부해도 나중에 먹고 살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거든요. 어쨌든 저는 한국사회를 해석하기 위한 이론들을 다방면으로 공부한 세대가 90년대 학번들이라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이들이 정치평론 등에 분야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감도 있습니다.

오늘 주제는 청년 세대와 부동산 문제입니다. 박해천 선생은 아파트를 둘러싼 가상의 인물과 사물의 시선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명저를 쓰셨고, 한겨레에서 출간하는 월간지 <나-들>에 '아파트 키드의 생애'라는 꼭지를 기획했습니다. 이 꼭지에서는 제 또래들이 아파트 흥망사를 수기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그래서 박해천 선생을 만나면 저희 아버지 부동산 투기 성패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 것만 같아요. (웃음) 어쨌든 청년 세대와 부동산 문제를 엮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박해천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한윤형 씨야 워낙 글을 술술 읽히게끔 잘 쓰는 분이니까요.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1부였습니다. 1부의 글들엔 동세대들이 갖고 있는 감수성의 정곡을 살짝살짝 만져주는 부분들이 있어요. 특히 대구 사람인 자신의 아버지를 <대부>의 시실리 마피아 패밀리에 비유한 꼭지('그 남자와 그 가족')의 경우엔, 이것만 가지고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 글이 이 책의 지렛대 역할을 해 준 게 아닌가 싶고, 개인적으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대구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한편 이제 갓 서른을 넘겼는데 자기 개인사를 너무 드러낸 것 아닌가, 득도 있겠지만 길게 보면 위험한 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마치 록스타처럼 30대 이른 나이에 베스트앨범 내고 자신의 생을 반추하며 회고록을 낸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웃음)

한윤형 : 블로그에 썼던 글을 대폭 손봐서 쓴 게 1부입니다. 30대 초반에 인생을 반추해도 되느냐는 지적에, 반박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응답하라 1997> 같은 드라마의 성공을 보면, (이 추억을 향유하는 세대가) 불과 30대의 나이에 자신들의 10대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저는 이들이 굉장히 이른 시기에 자신의 전성기 지나버렸음을 직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거든요.

"부모 세대는 폐허와 공허를 물려받고 죽음에 직면할 정도의 고생은 했어도 '이 시대도 내 삶도 올라가는 느낌' 속에서 살아왔다. 반면 우리는 상승한 부모와 삼촌 세대의 축적된 부를 통해 소비 취향과 자의식을 물려받고 집중적으로 교육 투자를 받았지만 '이 시대도 내 삶도 내려가는 느낌' 속에서 살아왔으며, 살아가야 한다." (8쪽)

제가 책에서 쓴 '내려가는 사회'라는 표현이 이런 자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박해천 선생이 천착하시는 아파트, 부동산 문제와도 포개지는 부분이 있을 것 같고요. 사회학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이 '내려가는 사회'라는 수사가, 한국의 부동산 문제를 설명할 때 가지는 함의도 있지 않을까요?

박해천 : '내려가는 사회'라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부동산뿐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이 그래요. 돌이켜 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1971년생인 제가 20대였던 90년대~2000년대 초반이 마지막 불꽃같은 시기였던 것 같아요.

한국은 1967년부터 고도성장을 해 왔는데 그 '올라가던' 그래프가 내리막에 이르는 첫 번째 지점이 1997년의 IMF 외환위기 사태였어요. 그런데 거기까지 약 30년간 오르막을 올라왔기 때문에 1997년 이후부터 2007년까지 대략 10년간은 고도성장의 관성력이 작용해서 그 힘으로 버텼었던 것 같아요. 이후로 지금까지는 끈 떨어진 채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굴러 떨어지려고 있는데 뭔가 어거지로,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2007년 대선 이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시기부터 고도성장기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절이 펼쳐진 것 같고, 2012년 대선 이후, 그러니까 이제 막 펼쳐진 박근혜 정권 하에서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체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려감'을 특히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아파트인 거고요. 그래서 하우스 푸어라든가 20대 주거 같은 문제들이 지면 위로 하나둘 드러났었죠.

"부모님 세대는 사회 내에서 자신의 계층이 상승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자체가 상승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사회는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단 사실에 의문을 품은 바도 없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아이의 삶이 나보다 더 나을 거란 것도 그들에겐 명약관화한 진실이었다. (…) 하지만 이 세대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느낌'은 그와는 정반대다. (…) 친구 하나는 그랬다. "내가 불행한 것도 문제지만, 아이를 이런 세상에 낳기는 싫다"고. 옳든 그르든 지금 세대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다." (133~134쪽)

'아파트 키드' 제2세대

한윤형 : 20~30대 필자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주거사를 이야기하는 '아파트 키드의 생애'라는 제목의 연재물이 월간지 <나-들>에 연재되고 있죠. 이 기획의 원안자로 알고 있어요. '아파트 키드'가 정확하게 어떤 세대를 지칭하는지,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함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해천 :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열쇠소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고 아파트에 살아서, 목에다 열쇠를 걸고 등교해서 하교하면 제 손으로 열쇠를 따고 들어가는 애들을 가리켰죠. '아파트 키드'란 개념은 이런 소년들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어요.

▲ 박해천(디자인 연구자, 홍익대학교 강사). ⓒ프레시안(최형락)
40년대생 부모들(상당수가 지방의 명문 고교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 교육을 받고 경제 성장과 더불어 회사에서 승진을 계속하다가 강남에서 집을 마련하게 되는)이 70년대 중반~80년대 초·중반에 강남에 입성해 신 중산층이라 불리는 계층으로 성장하면서, 그 자녀들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성격의 문화적 경험을 시작하게 됩니다. 몇 가지를 들자면 일단 18~32평형의 아파트, 4인 핵가족이라는 새로운 형태 속에서 자라나고, 조부모의 영향을 이전에 비해 확연히 적게 받습니다. 또한 부모가 한국에서 미국식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고 신 중산층이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투자를 굉장히 많이 해요. 따라서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같은 소년 잡지, RC카 같은 완구 등 '어린이 시장'이 굉장한 속도로 팽창합니다. 시장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건 인구학적으로도 1968년~74년이 제2차 베이비붐 시대이기도 했거든요. 그 중에 1970년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출생 인구수를 보인 해이기도 했구요.

이 과정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과외 금지령입니다. 이때 자라난 세대는 그 혜택도 많이 받았어요. 사교육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들의 부모, 즉 40년대생 세대는 중산층 이상의 경우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조건이 그 이후의 50년대생들보다 더 나았다고 할 수 있지요. 말하자면 자녀를 90년대에 대학 보내신 분들과 2000년대에 보내신 분들의 사교육의 비중이나 부담 규모가 다른 거죠. 이런 상황에서 '아파트 키드'라 할 수 있는 첫 세대, 즉 그들의 자녀 세대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대중문화를 흡수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지리적 기반은 강남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서울의, 아니 전국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빨리 일본이나 미국의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플랫폼 역할을 강남이 맡은 거죠. 이를테면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뭐가 들어와 확산되는 통로가, 거의 대기업에 다니는 그들 아버지의 해외출장에 집중되었어요. 그들의 가방 속 물건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형성되고 강남 내로 확산되고, 그것이 누적되다가 시차를 두고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문화라는 건 한 번 원형이 자리 잡으면 그것이 특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성격을 갖는데요.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 어떤 문화가 형성되는지가 중요하고, 그 문화가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는가 없는가, 즉 '워너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역시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7,80년대 고도성장이 만든 강남이란 공간과 문화 이후, 그것과 유사한 형태가 80~90년대에 걸쳐 형성되어 나갑니다. 강남 아파트 키드 1세대의 문화가 이후에 목동, 과천, 상계·하계, 수도권 신도시에까지 모방과 복제를 통해 확산된 거죠.

<나-들>에 '아파트 키드의 생애' 연재를 기획할 때 제가 궁금했던 건 제가 속한 제 2차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 이후의 세대, 70년대 후반 이후 출생자들로서 가족과 함께 90년대에 아파트에 진입하거나 거기에서 태어난 청년들이었어요. 수도권 신도시의 경우는 기존 강남이나 목동의 주거·생활 문화와는 성격이 또 굉장히 다르거든요. 저는 아파트로만 만들어진 도시에서 성장한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성장했을까, 어떤 문화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까, 나아가 그들 자신이나 부모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지금' 그들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을까를 보고 싶었어요. 또한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의도도 있었구요.

여러분들 중에 지방에서 올라온 분이 있다면, 명절에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서울 내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어떤 곳은 2013년 현재를 살고 있는 듯하지만, 어떤 곳은 80년대 후반을 보는 것 같잖아요. 제가 대학에 다니던 90년대 초반에도 그런 격차가 잔존했었고요. 젊은이들이 따라하는 것, 주류가 되는 성향이나 트렌드가 번지기까지 서울과 지방 광역도시 사이에 약 5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그 시차가 상대적으로 줄고 있기는 하지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1부에서도 그런 시차가 느껴져서 재미있었어요. 그 글 자체가 시차를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인지에 대한 글이었다는 느낌도 받았고요.

어쨌든 <나-들>의 기획은 저런 관점에서 출발은 했는데 지금 정확히 그렇게 굴러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80년대생들이 아파트에 살았건 안 살았건, 지금 서울이란 공간에서 어떤 주거 형태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풀려나가고 있지요.

90년대 : 싼 아파트-수많은 대학생-IMF

▲ <콘크리트 유토피아>(박해천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한윤형 :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가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를 실현해 나가면서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이 되어버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원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서를 먼저 만들어 내고 그걸 신의 속성에 투영합니다. 가령 종교학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도시와 관료 사회를 만들기 전까지는, 즉 왕을 가져보기 전까지는 만신을 주관하는 '최고신'이란 개념이 없었다고 하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발전 단계에서) 후발주자이다 보니,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고 물신에 그 속성을 투여한 게 아니라) 서구에서 이미 실현된 아파트라는 모델을 이미지로 가져오는 형태가 되어버렸어요. 거기서 예측하지 못한 부수적 효과들이 나타났고 그게 지금의 여러 상황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앞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기의 과외 금지 정책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사교육, 대학 등록금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어 자산 축적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처럼 한국 사회의 계층 재생산에 있어 교육 문제는 부동산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학 진학률도 세대를 보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시기별 대학 진학률 통계 자료를 살펴보았는데, 70년대에는 20퍼센트쯤 됐고, 1980년이 되면 한 27퍼센트쯤 됩니다. 1990년이 되어도 33퍼센트 정도였어요. 보통 80년대부터 대학생이 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러다 9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2000년에 오면 66퍼센트로 치솟습니다.

박해천 : 김영삼 정권 시기부터 대학생 수가 급증하고, 노무현 정권 시기에는 등록금이 가파르게 인상되죠.

한윤형 : 그런데 이 대학생이 늘어난 90년대 초반에, 집값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박해천 : 그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예요. 노태우 대통령이 90년대 전반에 걸쳐 시행한 주택 200만 호 건설이 만든 효과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기의 중요 관료인 김종인 씨가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스탠스를 취해도 크게 반발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분이 청와대 수석이었을 때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막고 집값 상승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주택 200만 호 건설, 수도권 5개 신도시에 주택 30만 호 건설 등이었습니다.

사실 1987~88년까지만 해도 주택 문제가 굉장히 심각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은 군부 출신 정권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도권 신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이 효과가 90년대 내내 지속되고, 한윤형 씨가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집값이 내려가면 사람값이 올라가고 집값이 오르면 사람값이 떨어지는' 현상으로 나타나죠.

87년 민주화와 88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임금이 상승하고 이 경향이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집니다. 그 상승의 근본 원동력 중 하나가 88년과 95년, 7년 사이에 급격하게 성장한 한국의 경제 규모입니다. 89년에 1인당 개인소득이 5000달러를 넘어섰는데, 95년이 되면 약 1만 달러에 다가서니까요. 흥미로운 건 경제 규모가 그만큼 커지면 아파트 가격도 그만큼 올라야 하는데, 수도권 신도시 건설이 완충 장치가 되어 그 인플레이션이 부동산 거품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거죠. 물론 이미 87, 88년에 많이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노태우 정권 당시 평당 분양가상한제 조정을 받아 분당, 평촌에 아파트가 비교적 싼 가격, 그러니까 평당 180~200만원에 분양되었지요. 그 결과 베이비붐 세대 일부, 386 세대 일부가 그 수혜를 보았고요. 나름대로 중산층의 자의식은 있지만 그때까지 '내 집 마련'을 못 했던 사람의 상당수가 88년에서 94년에 걸쳐 분당, 평촌, 일산, 중동, 산본에서 매 분기별로 이뤄졌던 아파트 분양에 참여하게 된 거죠. 수도권 신도시의 아파트 수용 인구만 놓고 보면 100만 명이 넘었어요.

국가 경제 규모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부동산 열풍이 있었죠. 77년의 열풍 당시엔 굉장히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과 함께 그 인플레이션 상당 부분을 부동산, 그리고 아파트가 다 흡수했습니다. 87~88년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에 의해 누린 호황)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90년대 초반은 정부의 아파트 중심 주택 보급 정책과 맞물리면서 상대적으로 집값이 가장 안정적이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시만 해도 당시 명문대를 졸업해 잘나가는 대기업에 취직하면 초봉 수준이 1800~2000만 원 초반대였어요. 졸업과 동시에 취직하면 3~4년 안에 25평 이상 아파트를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가 있었어요.

한윤형 : 90년대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아파트와 대학생이 급격히 늘어나다가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는 거죠. (웃음) 아까 87년 이후 임금 상승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실제로 97년 이전까지는 대공장 노조가 파업을 해도 받아들이는 양상이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 시기엔 파업을 하건 안 하건 어쨌든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기업이 임금을 올리면, 거기에 준하는 비율로 다른 업체들이 임금을 올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만약 현대차가 파업을 해서 임금을 올리면 납품 단가에 그 부담을 전가하기 때문에 하청업체나 거기 속해서 일하는 비정규직들이 손해를 본다고 해요.

어쨌든 임금이 그래도 상승하고 집값도 안정적이었던 90년대가 진행되다가 IMF 사태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는데, 혹시 우리가 IMF 사태를 겪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 충격을 흡수했더라면 한국 사회의 여러 변동들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박해천 : 그건 불가능하죠. 돌이켜 놓고 보니 90년대는 아주 예외적인 시기였지 그 자체가 정상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심하게 말하면 한국 사회가 제게 안겨준 제일 큰 행운은 90년대에 20대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할 정도로요. 또 다른 행운도 세대적인 건데, 과외 금지 시기에 10대를 보냈다는 거죠. 학교 마치면 놀 수 있었고 놀다보면 심심해서 소위 '뻘 생각'이라는 것도 할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자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껏 누릴 수 있었고, 부모님은 사교육에 거의 지출을 하지 않으실 수 있었지요.

72년생인 소설가 정이현 씨는 "노력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던 세대였다고 쓴 적이 있어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느낌으로 살았던 거죠. (웃음) 4년제 대학을 다닌다면 취업 걱정을 안 해도 되었고, 덕분에 세상이 만만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한국이 정말로 유럽 선진국 어딘가에 가 있다는 건데요….

배는 오지 않는다

한윤형 : 마지막 불꽃 같은 시기였던 90년대에 제 또래는 10대 시절을 보냈고, 스무 살이 넘으니까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는 종류의 체험을 하게 된 거죠.

박해천 : 조금 더 구분하자면 같은 70년대생 사이에서도 체감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방금 말씀드린 예외적인 상황을 겪은 건 1968년~74년생까지고, 76년생 이후 출생자만 봐도 또 많이 다르거든요.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제 대학 가면 놀아야지' 했던 순간 IMF 사태를 겪었으니까요. IMF 사태라는 사건이 주는 사회적 변화가 한두 살 차이에도 미세하게 구별되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윤형 : 한두 살 차이도 그랬지만 순간의 선택에 따라서도 엄청난 '복불복'이 펼쳐지곤 했어요. 제가 아는 한 90학번 선배는, 대학 졸업하고 할일이 없어 벚꽃 구경하려고 여의도 근처를 서성이다가 KBS가 보여서 그길로 원서를 쓰고 PD로 취업을 했어요. 들어가자마자 IMF 사태가 터졌으니 정말 운이 좋다고 할 밖에요. 그분과 같은 학번이었던 다른 선배는 그분 취업 시기에 공부를 하겠다고 대학원에 갔는데, 나중에 KBS에 들어가긴 했지만 10년 후였던 거예요.

박해천 : 이명박 전 대통령은 30대 중반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고, 마포아파트 건설을 지휘한 장동운 중령이 대한주택공사 초기 총재로 부임한 게 30대 초반 정도였다고 해요. 사회의 여러 영역은 시차를 두고 새로운 세대가 유입되면서 발전을 겪게 되는데, 해당 영역이나 조직이 그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가의 여부와 맞물려서 어느 순간 진입 장벽이 급격히 높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상황이 사회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 게 IMF 외환위기 이후의 세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부동산 시장에서는 2002년부터 아파트 분양가가 빠른 속도로 오르기 시작하지요. 내 집 마련의 장벽이 급격히 높아지는 거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강남으로 떠나는 '노아의 방주'가 있었어요. 누군가는 타고 갔겠죠. 그분들은 이상한 모험을 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 안정적인 중산층의 생활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아파트 가격이 빠른 속도로 올라갔고, 때문에 근로소득보다 더 많은 소득을 부동산을 통해 얻게 되죠. 그리고 근로소득의 상당 부분은 고스란히 사교육, 여가 등 중산층의 소비활동으로 연결되었고 내수 시장의 규모를 키웠지요.

80년대 중반 이후, 또 하나의 방주가 떴어요. 이번에는 목동, 상계, 과천으로 가는 배였습니다. 40년대생 가운데 강남 진입을 못 했던 사람, 50년대생 중 일부가 그걸 타고 떠나죠. 87,88년 부동산 폭등기에 집값이 또 올랐고 '나도 드디어 중산층이 되었구나'라는 자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방주가 수도권 다섯 개 신도시로 떠나는 배였던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문제'라 하는 것들은 이 방주를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어요. 동시에 예전에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청년 세대들에게도 방주 탑승권이 주어졌지만, 2002년 이후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올라타지 못합니다. 대출을 받지 않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부모님으로부터 증여받는 것뿐이지요.

ⓒ프레시안(최형락)

세대가 이름을 갖는 방식

한윤형 : 요약해드리면 "이제 더 이상 배가 안 온다"는 얘기였고요. (웃음) 지금 우리의 90년대를 죽 이야기해 주신 셈인데, 돌이켜보면 90년대는 그 시대 청년들에게 처음으로 (외부에서) 이름을 붙여준 시기이기도 해요. 그들을 말하는 '엑스세대'는 386 세대보다도 먼저 자기 이름을 가졌었어요. 그러니까 80년대에 '운동'을 열심히 했던 세대와 구별되는 문화·소비 세대로서 엑스세대가 먼저 탄생했었던 거죠.

80년대 학번 운동권들은 청년 시절이 아니라 이들이 여러 영역에서 대세를 이루면서 사후에 '386 세대'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죠. 그래서 386이라는 이름도 한 세대를 아우르기에는 폭력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명문대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인데, 그 시기에 그런 사람들이 몇 퍼센트나 있었냐는 거죠. 운동권을 바라보는 시선의 격차는 있겠지만 그 숫자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적다고 들었거든요.

박해천 : 제가 기억하기로는 1998년인가 <조선일보>에서 처음으로 '386 세대'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아요. '광주 세대'에서 '386 세대'로 바꿔 부르게 된 변환의 지점이 '세대론의 쓰임새'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그 호명이 변환된 시점은 386이라 지칭되는 이들이 스스로 중산층이 되었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된 시기와 거의 일치해요. 집값은 많이 오르지 않았지만 IMF 이후 '바이 코리아' 열풍에 힘입어 주식이 많이 올랐거든요. 딱 그 시점인 98~99년, <조선일보>의 영리한 면모가 발휘된 거죠.

이런 사례를 보면 그런 생각도 들어요. 세대론이라는 게 해당 세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거나 조직화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끌고 오는 게 아니라, 10년 주기의 경제 호황, 정치적 격변, 아파트 건설을 통한 주택 보급 등의 사건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통과한 이후, 그래도 '내가 그래도 청춘이라는 시절을 보냈구나'라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판타지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한윤형 씨한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요. 한윤형 씨가 속해 있는 세대는 '삼포세대' '88만원 세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되잖아요. 그 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한윤형 : 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제 생각보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말씀해드리곤 하는데요. 사실 부르기 나름이란 거죠. 386 세대도 과대 대표된 호명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호명된 이유와 맥락이 있는 것처럼요. 제가 속한 세대가 정말 많은 이름으로 불렸는데, 10대 시절 붙은 'N세대'가 그 최초였어요. (웃음) 학교 컴퓨터실에서 음란물을 검색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인터넷 보급과 확산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시기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88만원 세대'가 와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이 이름도 약 10년 단위의 문화적 분절을 포괄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가령 9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제 또래는 입시에 억눌려 있다가도 대학에 가면 원 없이 자유를 누릴 줄 알았고 부모들도 그 환상을 제공했지만, 200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저보다 어린 세대는 대학에 가도 힘든 상황의 연속이란 걸 이미 알고 있거든요. 감상만 이야기하고 말았는데 어쨌든 이름을 정하는 건 제 몫은 아닌 것 같아요.

박해천 : 제가 보기에 세대론을 통해 뭔가를 이루고자 했을 때 그 유형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내가 놓인 세대가 이전 세대와는 다른 문화적 경험, 상징자본을 가지고 있다든지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하는데, 사회의 기존 가치관으론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담론의 장에서 자신이 대변인으로 직접 나서면서 자신이 속한 세대를 호명하는 방식이에요. 기성세대들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방식으로서의 세대론이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4.19 세대'가 그랬어요. 그 전의 '일본어 세대'와는 다른 교육을 받았다는 거죠. '광주 세대'도 이후에 '386 세대'란 다른 이름으로 '호명 당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불리든 그 무리 자체는 조직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은 지금까지도 여의도 현실 정치 속에서 인맥이나 정책 등 여러 갈래로 실제 작동하고 있지요.

반면, 호명 당하는 세대가 있어요. 이를테면 엑스세대가 전형적이지요. 90년대 초반부터 학생 운동권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거기에 이제 막 신입생으로 입학한 중산층 출신의 제2 베이비부머들은 10대 시절부터 대중문화의 단맛을 본 상태였지요. 90년대 대학가는 80년대식 민중문화와 90년대식의 대중문화가 기이하게 동거하면서 때에 따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딱 이 시점에서 모 광고기획사가 엑스세대란 말을 끄집어냅니다. '이들은 기존의 젊은 세대하고는 확실히 다르며, 이런저런 사회적 조건들이 맞물려 새로운 소비의 주체로 부상할 것이다'라는 예측과 함께요. 그 호명과 함께 92~93년에 걸쳐 압구정동과 홍대 앞이 젊은이들의 메카로 부상하고, 여기서 젊은이들이 즐기는 문화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죠.

결국 그들 스스로는 자기들을 조직화하거나 세대로 묶어 집단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는데, 외부에서 마케팅 등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 세대를 주목의 대상으로 불러낸 거죠. 그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 젊은이들은 모조리 개인주인자인데 '너는 엑스세대의 일원'이라 불리는 걸 좋아하겠어요? 사실 그 호명 안에 이미 모순이 들어있는 셈이죠. 물론 엑스세대라 불리는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했을 겁니다. 윗세대 중 일부는 그걸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나이로는 386 세대에 속하지만 386의 주류였던 '운동권 청춘 모델'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오히려 미국 대중문화에 친숙했던 사람들이죠. 일례로 어떤 60년대생 소설가들은 자기 세대가 아닌 신세대를 주인공, 독자로 한 소설을 쓰곤 했어요. 소설가는 60년대 초반생인데 소설 주인공은 70년대 초반생인 식이지요. (웃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제가 '88만원 세대'에 갖는 혐의도 비슷합니다. 엑스세대가 소비 차원에서 동원되었던 것과 유사하게, '88만원 세대'도 정치적으로 동원되기 위해 쓰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물론 이 개념 자체를 만들어낸 우석훈 선생이나 박권일 선생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요. 2000년대 이후의 세계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작동의 방식을 '세대론'이라는 형식으로 포착해내려고 했던 걸 텐데요. 그런데 이후 이 세대론의 '쓰임새'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어요. 특히 선거 국면에서 더욱 더 그랬지요. 이런 흐름을 보면 이 세대가 자기 스스로를 호명하지 못했다는 것, 호명할 수 있는 힘이나 집단적 의지가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20대 혹은 청년 세대 담론이 흥미로운 것은, 청년들을 규정해보려는 윗세대들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20대들의 철저한 무관심 혹은 소외 현상에 있다. 20대는 본인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다. 한편 윗세대들 역시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데 20대의 견해를 참고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견해를 참고해야 하는지를 정하지 못한다." (169쪽)

"(촛불 시위가 무력해진 이후) 나를 포함한 몇 명의 20대를 (…) 한 세트로 묶어서 담론 시장에 소개하는 문법이 나타났다. (…) 그것은 나로서도 황당한 경험이었다. 십 년 동안 인터넷에 비슷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연한 계기로 전혀 다른 글을 쓰던 사람들과 한 묶음이 되어 담론 시장에 진열된 것이다. 어째서 20대를 배척하는 10대들의 세대론과 20대 논객을 갈구하는 세대론이 공존하게 되었는가? 그보다는, 어째서 그런 식의 세대론의 삐걱거림이 있었는데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 세대론의 본질이 어떤 논리적인 범주가 아니라 '386 이후'를 기약한다는 심정적 갈망에 있기 때문이다." (197~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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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멸종의 시대

한윤형 : 지금 하신 지적에 대체로 동의하고,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약간 돌려 말한 대목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해 보니 제 책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하나는 당연히 문자 그대로의 의미, 청년 세대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좀 더 들어가 보면 이제 더 이상 기성세대들이 바라는 '청춘'의 모델-진취적이고 겁이 없으며 세상에 맞서 싸울 자세가 되어 있는-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말하자면 '청춘 예찬' 할 수 있는 종류의 청춘이 없다는 겁니다.

가령 명문대 학생들이 공무원을 꿈꾼다고 하면 보수 언론에서는 개탄의 어조로 '꿈 없음'을 비판하죠. 그들의 시선으로 보면 명문대생들은 진취적으로 행동하고 누군가를 먹어 살릴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어야 해요. 그런데 경쟁에 지친 이들이 경쟁이 덜 한 직종을 선호하게 되면서 룰 자체가 바뀌어가는 상황인 거죠. 이런 과정을 보면 '청춘 담론'에 나오는 청춘은 더 이상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호명할 힘이 없다'라는 차원과는 좀 다르죠.

박해천 : 저는 평소에 글감을 찾기 위해 소설을 즐겨 읽는데요. 한국 현대소설을 보면 젊은 세대를 주 독자층으로 삼는 일군의 저자들이 청춘이나 성장이라는 테마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게 4.19 세대라고 볼 수 있어요. 김승옥으로 대변되는 40년대생들의 성장 소설과 청춘 담론이 있었지요. 50, 60년대생들도 각각의 청춘 소설이 있었고요. 그런데 70년대생 소설가들에겐 그게 없어요. 왜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 됐으니까요. 달리 말하면, 그 때 이미 한국의 젊은 독자들은 한국에서 청춘이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글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거기서 살아남은 게 김영하(68년생) 씨와 정이현 씨 정도입니다. 이들이 최근에서야 성장 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것 자체와 이전과는 다르죠. 이전 세대가 자기의 청춘을 실시간으로 썼다면, 이들은 아랫세대인 80년대생들의 이야기를 대신 써주고 있거든요. 이건 하루키가 취한 전략이기도 해요. 그는 자기보다 열 살 혹은 그 이상 어린 젊은이들의 성장 소설을 썼으니까요.

이렇게 놓고 보면, 청춘이란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낭만주의적 색채, 자유연애에 대한 판타지,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이란 해방감, 자아의 발견 같은 그 속성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이런 속성들은 지금은 청춘이 아니라 '중2병'이라 불리죠. '얘가 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구나'가 아니라 '얘 중2병 걸렸구나'가 되는 거죠. (웃음)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청춘'이란 호명 자체의 설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전 같으면 직장인이 되어서야 경험하기 시작했던 삶의 하중이 계속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면서 이제는 중학교나 초등학교 고학년을 다니면서부터 그 하중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청춘이라는 표현은 시대착오적인 언어유희, 실재하지는 않으나 마음속에만 남은 로망, '언젠가 가닿을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 속의 신기루가 되어버린 겁니다. 실제로 청춘을 누리지 못함으로써 이미 청춘을 누린 이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져 가고요.

사람이 사회에 진출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서 한 숨 돌릴 때쯤 되면, 젊은 날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때가 좋았지"라면서 사후적으로 자신의 '청춘'이라는 걸 재구성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요. '난 지금도 청춘이야'라고 말할 때의 청춘도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청춘은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반복강박처럼 불러들이는 어떤 기억의 핵심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럴 만한 기억의 핵심이 사회적으로 공유되기 어려워진 상황 같습니다.

한윤형 : '지금 굶지 않고 있어야 굶었던 시절도 낭만이 될 수 있다'는 얘기군요.

박해천 : 그렇죠. '그때 내가 그렇게 방황했기 때문에/방황했지만 지금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시기에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게 바로 청춘인 거죠. (웃음)

'세대 간 불평등'은 실재하는가

한윤형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은 2010년 엄기호 선생이 낸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와 대구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 윗세대가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양식의 청춘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제목을 쓰신 것 같은데요. 엄기호 선생도 91학번이라 박해천 선생과 비슷한 세대입니다. 이 책에도 지금 대담 내용과 관련지을 수 있는 재미있는 대목이 많은데요. 저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대부분이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는데, 20년쯤 뒤 본인이 직접 지방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와요. 독립할 생각이 없고, 오히려 집에서 자기를 쫓아내지 않는 게 고마운 겁니다. 이런 식의 감각 전환들이 일어나는 상황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어떤 세대에 속한 사람들)가 우리 세대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이와 관련된 여러 난점들 중에는 '세대 간 불평등보다 세대 내 불평등, 혹은 불평등 자체가 더 중요하다'라는 사회학자들의 비판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죠. 그래서 더더욱 세대론을 통해 누군가를 호출해내기가 어렵습니다.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서로 굉장히 분절화, 파편화 되어있거든요.

가령 제가 이 책을 낸 뒤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는데, 한 번은 어느 지방 대학교에서 훨씬 어린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청년 세대 문제를 이야기하면 분절화나 파편화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면 학벌 사회 이야기가 나오죠. 그런데 학벌 피라미드 맨 위에 있는 학교에 다닌 제가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더라고요. 게다가 그 학생들은 제 책을 읽지도 않았고, 절 궁금해 한 강사나 교수가 강연을 들으면 출석을 인정해주겠다고 해서 억지로 듣는 상황이거든요. 말하자면 세대 간 분절 외에도 세대 내부의 분절 역시 존재하기에,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박해천 : 저는 굉장히 다양한 분들 앞에서 강연을 하는데, 방금 말씀하신 그런 어려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누군가'하는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예요. 그리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거론하는 세대의 호명 대상은 기본적으로 대졸자, 어느 정도의 중산층 혹은 중산층 워너비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또 저는 사회학자가 아닌 디자인 연구자이기 때문에 계급적 접근보다는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빚어지는 세대 간 차이에 주목했던 거고요.

그래도 조금 흥미로운 건 박원순 씨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후 약간의 결집이 보인다는 거예요. 20대 후반~30대 초반 가운데 예전에는 정치에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사람들이 SNS 등을 통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리버럴한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요. 물론 그것도 소수이고,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 무관심이) 더 심해질 것 같지만요.

한윤형 : 정치적인 결집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청년 세대의 정치적 의식은 과거와는 다르게 발생하는 측면이 있어요. 가령 '20대 개새끼론'처럼 대학생들에게 정치의식이 없다고 핀잔했던 경우를 보면, 80~90년대 학번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대학 시절이 가장 진보적인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 대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화된 대학에서 정치의식을 가질 만한 탈출 공간이 없다보니 대학생일 때 오히려 더 자본 논리에 입각해서 살다가, 대학을 벗어나 취업 준비나 입사를 하면서 자신이 '을'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제 책 리뷰 중에서도 '대학교 다닐 땐 정치에 아무 생각 없거나 운동권들을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회사 7, 8년 다녀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라는 또래 분들이 있었어요. 대학생으로서 노동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제 세대는 오히려 자신이 직접 노동 현장에 나가서 그 문제들을 대변하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숫자는 많지 않죠. 어쨌든 공통의 지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식의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제겐 고민입니다.

박해천 : 집 없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어때요? (웃음) 아쉬운 부분들이 그런 거예요. 아파트 단지를 들여다보면, 주거자들이 여러 가지 생활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이 굉장히 잘 체계화 되어있어요. 부녀회나 관리실 등, 최소의 형태이긴 하지만 꽤나 효과적으로 작동하거든요. 차등적인 대우를 받는다든지, 뭔가 불평등을 인지했을 때 아줌마들이 모여서 행동하는 방식이 상당한 정치적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은 세대가 올라탈) 방주 자체가 떠나버린 상황도 있지만, 공통의 문제를 스스로 공론화하거나 해결하려는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세대 간 불평등'이란 표현도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 같고요. 이 세대가 '우리는 이러이러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불평해도 윗세대 상당수는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반응을 보이고 끝이에요. 즉 '내가 어려우니 나를 도와달라'는 호소 방식으로는 사실상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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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50대, 꼬리를 무는 부자(父子)

박해천 : 여러 지표를 봤을 때,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독립해서 원룸이나 자취방에 살고 있는 분들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그 '방'에서 탈출해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사실상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지금 서울이나 수도권 주요 도시의 아파트 가격이라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상은 그렇습니다. 물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2005년 전후, 그 이후에 떠나신 분들 상당수는 지금 하우스 푸어일 겁니다.

더 큰 문제도 있어요. 여러분들 부모님의 상당수가 50대 이상인데, 50대 자가 소유 비율이 60퍼센트 약간 넘습니다. 이 베이비붐 세대가 노후 생활을 영위해가는 데 필요한 최소 자산의 규모는 가구당 3억 6000만 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그 세대 전체의 24퍼센트밖에 안 돼요. 그리고 지금 가계부채가 1000조 원이라고 이야기되는데, 그 가운데 50대 이상이 진 빚이 그 절반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50대 이상 분들의 대부분이 제도가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사이에 경제 활동이 끝납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 부모님 세대의 상황입니다.

월세방에 거주하는 여러분들 중 일부는 여전히 '조금 더 기다리면 부동산 폭락이 올 거고, 그때 집을 구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폭락한 집의 집주인이 확률적으로 바로 여러분의 부모님, 친구의 부모님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베이비붐 세대의 자가 소유 비율(60퍼센트)과 가계부채 규모(400조 이상)가 이렇게 맞물려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경제 위기가 닥치면 가계대출이 몰려 있는 자가 소유자들에게 첫 번째로 피해가 가고, 그러면 갖고 있던 집들이 헐값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 불행의 핵심은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여러분들에게 좋은 게 여러분 부모들한테 좋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란 겁니다. 가령 최근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처럼 정년을 연장하면 부모님 세대는 수혜를 입고, 여러분들의 취업은 불리해집니다. 사회적 비용 면에서도 사람을 새로이 뽑아 훈련시키는 것보다 이미 훈련되어 있는 사람을 몇 년 더 노동시키는 게 나을 수 있으니까요. 이명박 정권 때 일자리 나누기를 한다면서 대졸 초임 임금을 삭감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많은 기성세대가 반색을 표한 게, 자기들 연봉이 깎일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어요.

평균 수명이 높아지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윗세대가 좀처럼 퇴장을 하지 않고, 따라서 젊은 세대가 사회로 진출하거나 자산을 증여 받아 소비를 하는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이는 또한 저출산 문제와도 맞물려 있어요. 지금 수도권에서는 순번표 받고 대기했다가 들어가는 어린이집도 있고 산부인과 간판들도 거리에서 눈에 많이 띄지만, 지방 중소도시의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특히 한국의 저출산 1세대(98~2002년 출생)가 대학에 진학하는 시점(2018~2012년)이 되면 수많은 지방 대학이 구조조정에 직면해야 할 겁니다. 90년대 내내 6,70만명이던 출생인구가 98년을 기점으로 꺾어졌다가 2002년을 기점으로 40만명대로 내려앉았지요.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쯤이면, 대학 정원이 학령인구보다 훨씬 많은 상황이 벌어지지요. 지금 어느 대학은 회화과를 없앤다, 어느 대학은 철학과를 없앤다 하는 뉴스가 나오는데, 저출산 시대에 대비하는 대학의 구조조정이라는 맥락에서 보실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 입장에서 보자면, 앞으로 여러분들이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게 될 무렵이면, 그만큼 20대 소비자들의 내수 시장은 축소될 것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구요.

어떻게 이 세대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해요. 그런데 지난해 대선 국면을 돌아보면, 문제의 세대가 직접 나선 게 아니라 15살쯤 많은 윗세대가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신해서 대변해 준 상황이 펼쳐졌어요. 만일 계속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 세대는 영원히 무간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부동산 문제만 놓고 봤을 때 제가 속한 90학번-70년대생들은 '세대'로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직접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껴요. 이들 중에는 (IMF 사태 이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를 짜임새 있게 보낸 '중간층'이라 한다면) 어떻게든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케이스가 있습니다만, 상당수, 특히 70년대 중후반생은 하우스 푸어이거나 세입자로 계층이 갈리고 그래서 정치적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세대 상황은 이보다 더 좋지 않지요. 아예 다른 상황일 수도 있구요.

지난해 대선과 맞물려 반값 등록금이 이슈가 되었을 때 제 친구가 '이제 386 세대 자녀들이 대학 갈 때 되니까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구나'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의 부모인 50년대생들은 자녀의 대학 등록금이 마구 오를 때 별 불만 없이 그걸 지불했어요. 99년부터 2007년쯤까지 아파트 값이 올랐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고 경제 성장률도 2~3퍼센트 대에 정체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체제, 이전의 기회, 이전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고요. 그리고 이 모든 모순들이 가장 강렬하게 맞물려 있는 시점이 바로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여러분들이 3,40대의 나이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지요.

이런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거기다 우리가 원했던 정치적 승리의 기억은 기껏해야 한 줌일 때, 어느 위치에 서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돌파할 것인지는 여러분 세대들 스스로 판단해야 해요. 저는 저의 이해관계가 있고, 여러분의 이해관계와는 달라요. 대안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거죠.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

한윤형 : 말씀을 듣다보니 장내 분위기가 안 좋아졌어요. (웃음) 사실 정치적 전망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었는데 살짝 언질은 주신 것 같고요. 세대론의 정치적 쓰임새에 대해 걱정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청춘 담론이 가진 특성 때문에 '어떤' 세대론은 여전히 남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서 한 작업은 거기에 개입하면서 사회적 문제들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생각하고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저에게도 대안이나 행동지침을 묻는 경우가 있는데, 정치평론가의 책은 애초에 좀 허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많은 책에서 서둘러 대안이라고 나오는 게 대체로 '약 파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저는 성격상 약을 팔지 못해요. (웃음) 구체적인 정책을 나열하면 그걸 누가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 즉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의 딜레마가 펼쳐지고요. 그래서 정치적 행동지침에 대해서는 일부러 피한 감도 있습니다.

박해천 선생이 '스스로 삶의 문제를 지각하고 요구를 던져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요구 투입을 위해서는 일단 자기 삶의 문제가 사회적 변화의 문맥에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조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구와 힘을 합쳐서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고요. 제가 이 책의 1부에 사적인 얘기를 많이 쓴 것도, 개인의 경험을 풀어놓는 것이 그 시대 속에서 자기 삶의 문제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은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합의해야 할 문제이지, 몇몇 사람이 던져줄 수 있는 종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 조망할 시선의 획득과 동년배에게 말 걸기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해천 : 여러분들은 지금 삶이 힘들고 우울하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더 우울하고 더 힘들 가능성이 높아요. 한윤형 씨가 '내려가는 사회'라고 표현한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맥락을 이해하면서, 그 안에서 개인으로서 누릴 행복을 고민하고 그걸 누리기 위한 정치적, 조직적인 의사 표현의 방법들을 직접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정권 교체 같이 커다란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 고령화-보수화가 맞물린 인구 분포상, 앞으로 여러분들 상당수가 원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요. 그래서 오히려 미시적인 부분들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박근혜 정부가 싫다고 해도 지금 정부나 집권 여당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뭔가가 있어요. 그걸 선택적으로, 최대한으로 취할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어 행복주택 같은 거죠. 노무현 정권 때 추진했으면 아마 난리가 났겠지만, 새누리당이 하니까 저항이 덜해요. 행복주택 건설에 대한 요구는 여러분들이 거기 들어가서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들어갈 확률은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과 비슷해요. 다만 행복주택이 해당 지역 전월세의 표준 시가와 같은 역할을 해주면서 가격을 하향 안정화해줄 가능성이 있어요. 그게 지어짐으로써 그 지역 아파트를 싸게 임대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각 구마다 부동산의 요충지라 불리는 곳에 행복주택을 더 지어달라고 요구해야 해요. 오늘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최저임금 인상도 여러분들이 힘을 모아야 하는 일이고요.

경제 자체가 '내려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거기에 걸맞게 여러분 자신의 욕망을 구조조정하고 새로운 일상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전환에 이미 '노아의 방주'를 타고 떠난 분들은 관심이 없죠. 여기서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해보셔야 할 거예요.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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