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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흥건, 뇌가 섹시해지는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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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흥건, 뇌가 섹시해지는 SF?

[김창규의 '기계 나비의 꿈'] 그렉 이건의 <쿼런틴>

극단적이고 노골적으로 편을 들어보자면 SF는 상상력의 극단을 가장 빈번하게 건드리는 장르다. 여기서 상상력의 극단이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신의 존재 증명을 세우고 깨뜨리는 여러 철학자들의 정신활동과 비슷한 수준을 가리킨다. 상상은 뇌의 활동이고, 뇌가 '세계 전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어떤 상상도 결국은 세계의 일부이다. 이렇게 단정을 지어 놓으면 상상력이 세계의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되어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정은 사실 '세계'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와도 같다. 따라서 극단적인 상상력은 세계와 세계 인식의 너비를 재는 줄자의 끝이 되는 셈이다.

▲ <쿼런틴>(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펴냄). ⓒ행복한책읽기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지 10년, 작가가 발표한지 21년이 된 <쿼런틴>(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펴냄)은 시간만 놓고 아주 엄밀하게 분류한다면 슬슬 고전의 반열에 끼워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가인 그렉 이건을 별도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렉 이건은 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본인의 홈페이지 첫 화면에 밝힌 바에 따르면 SF 작가이자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다. 국적은 호주이고, 휴고, 로커스, 존 캠벨 기념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SF 관련 컨벤션 등 외부 행사에는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도 자신의 모습이나 약력이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리는 걸로 보이는 인물이다.

거기에 더해 그렉 이건은 자타가 인정하는 하드SF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과학적인 깊이가 대단한 것으로 유명하며, 소재나 관심 분야 자체도 인식론, 첨단 이론 물리, 인지과학 등 일반인들은 교양 과학 서적 한두 권으로는 따라잡지도 못할 영역들이다. 가장 최근작인 Orthogonal 3부작은 시간과 공간의 법칙이 우리 우주와 다른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단편들도 해당 분야의 지식이 전무한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짐작도 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인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넓히는 데에 일조하는 작가라는 얘기다.

다행이라고 봐야겠지만 <쿼런틴>은 그의 작품 가운데 이해가 쉬운 편에 속한다. 작품 속의 인류는 나노머신으로 뇌의 기능을 개조하거나 확장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별빛까지 차단하는 거대한 '거품'이 지구를 둘러싼다. 아마도 외계인의 소행인 것 같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주인공은 감시가 삼엄한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증발'한 여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독자는 그의 활약상을 함께하면서 '모드'라고 불리는 뇌의 인공기능들을 지겨울 정도로 접하게 된다. 이 모드들은 사람을 무감동 상태에서 행동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아내의 추억과 대화를 나누도록 해주며,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따라서 조지 오웰의 <1984>보다 더 효율적인) 충성심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보편적인 인간성과 자유의지를 맹신하는 독자라면 대략 이쯤에서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추적과 추리 끝에 실종 사건과 거품의 본질에 접근한다. 그 본질은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와 직결된다. '모드'에 간신히 적응한 독자라면 여기서 다시 한 번 한숨을 쉴 것이다. 양자역학의 개념 자체가 일상적인 상식에 반하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양자역학 해석과 거품은 단순히 미래의 사립탐정물처럼 보였던 소설을 단숨에 경이감의 제단에 올려놓는 계단 역할을 한다. (완독할 수 있었다는 가정 하에서) 만약에 이 소설의 결말이 열린 구조라고 한다면, 아마도 인류의 다음 모습을 다룬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거대한 규모로 열어놓은 구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 책을 덮고 나서, 감탄과 한숨이 잦아들었으면 머리를 흔들어서 뇌를 환기시킨 다음 다른 곳을 보자. 그러면 <쿼런틴>의 두 축을 담당하는 '모드'와 '거품'의 의미가 전적으로 독창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의 경이감은 후반부에 밝혀지는 비밀에 모조리 들어있기 때문에 내용을 미리 누설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드'는 <쿼런틴>이 발표되기 훨씬 전부터 여러 SF 작품에 등장했던 개념이고,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은 이미 50년대에 활발하게 논의되던 이론이다. 물론 어떤 SF에 등장하는 이론의 가치란 그 근원보다는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달려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쿼런틴>이 제시하는 우주의 본질이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어려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미국 마블 코믹스에는 <엑스맨>이라는 시리즈가 있다. 우리가 영화로 접하기도 한 바로 그 엑스맨이다. 엑스맨에는 마그네토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의 후손 중에는 <쿼런틴>에서 보여 준 인간의 능력을 거의 그대로 발휘하는 아이가 있을 정도다. 앞서 <쿼런틴>이 비교적 쉽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굳이 저울을 들이밀어 본다면 그렉 이건은 이야기꾼이 아니라 상상꾼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과학적인 상상력을 어떻게든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에 녹여보려는 땀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매우 성공적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렉 이건은 그 공백을 조밀하고 촘촘한 추론과 놀라움으로 메운다. 개연성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는 과학적 상상력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주는 쾌감보다 몇 십 배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영어권 SF 작가들 중에서 그런 면으로 그렉 이건과 우열을 겨룰 만한 작가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땀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할 때 느끼는 묘한 쾌감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것이다. 만약 그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지성을 건드리는 자극이라면, 작가가 뿌려놓은 씨앗과 결말이 악수를 하는 순간이 샤워라면 어떻겠는가. 그렉 이건의 작품들은 종잇장처럼 얇은 인물과 울퉁불퉁한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바로 그런 느낌을 선사한다.

발표한 지 2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뇌를 혹사시켜주는 <쿼런틴>. 그 고생이 끝났는데도 무언가 충족되지 않은 느낌이 남는 사람에게는 그의 다른 작품들도 권한다. 그리고 강조하건대, 그의 어느 작품이든 손에 잡으면 반드시 '끝까지'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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