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로부터 18년 후인 1980년 어느 날, 한 늙은 남자가 시장에서 클레어비우스의 누이였던 안젤리나 나르시스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안젤리나의 가족만 알고 있는 클레어비우스의 어릴 적 별명을 댔으며, 급기야 자신이 18년 전에 죽었던 바로 그 클레어비우스 나르시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대낮의 시장, 오래 전에 죽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혀져버린 남자가 갑자기 산 자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놀라 자빠질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을 누이에게 그는 황당한 주장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남자의 주장에 의하면, 토지 상속의 문제로 형과 다툼을 벌였는데, 화난 형이 동생인 그를 좀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병원에서 사망진단을 받고 무덤에 묻힌 산송장 신세가 된 것이다. 이 남자의 말을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할까.
기막힌 사연은 계속된다. 몇몇 남자들에 의해 무덤에서 강제로 꺼내진 그는 이번에는 아이티의 북쪽으로 끌려가 2년간 다른 좀비들과 함께 노예로 일했다는 것이다. 주인이 좀비들에게 살해당하자 주술이 풀린 그는 형을 피해 16년간 아이티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형의 죽음을 확인하고 누이를 찾아왔던 것이다. 도대체 클레어비우스 나르시스의 황당무계하고 기기묘묘한 이 이야기는 진실일까 거짓일까. 거짓이 아니라면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민속식물학을 공부하던 호기심 많은 하버드 대학원생 웨이드 데이비스는
▲ <나는 좀비를 만났다>(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김학영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메디치미디어 |
그래서 책의 어느 대목에 이르면 작가가 흥미를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 사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을 고의로 몰래 뒤섞는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또한 마치 인디애나 존스처럼 식민 통치자의 오만과 허세를 적당한 겸손과 관용으로 감출 줄 아는 서구 문명인이, 아이티의 좀비와 부두교에 들어있는 다분히 이국적인 취미를 자극할 만한 '야생적 사유'(레비스트로스)에 대해 보내는 호기심어린 시선이 동반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도 갖게 만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식물학과 독약을 묘사하거나 서술할 때는 과학자적인 정밀함을 선보이는 한편으로, 아이티의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할 때는 꽤 급진적인 탈식민주의적인 관점에 충실하다. 내가 읽어본 바로는 <나는 좀비를 만났다>에서 서술하는 아이티의 역사는, 세계 최초의 노예 독립 공화국인 아이티의 역사를 담은 고전인 C. L. R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1938, 한국어판 우태정 옮김, 필맥 펴냄, 2007)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아이티의 부두교 및 좀비 주술은 그들이 겪었던 식민과 탈식민의 유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1899, 한국어판 이상옥 옮김, 민음사 펴냄, 1998)의 서술자처럼 <나는 좀비를 만났다>의 저자 데이비스는 빽빽한 밀림과 구불구불한 강, 뜨겁고도 습한 열대의 기후와 위험천만한 동식물을 헤쳐 나가는 한편으로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적의와 호기심 모두를 드러내는, 가난하지만 자신의 문화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보이는 아이티인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클레어비우스 나르시스를 좀비로 만들었던 아이티의 문화와 관습의 비밀이라는 '암흑의 핵심'과 마침내 조우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방인인 자신 또한 망아지경(忘我之境)의 밀교의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말이다.
저자의 탐사는 호기심이라는 돌이 던져진 잔잔한 호수에 이는 끝없는 파문(波紋)처럼 동심원적이다. 데이비스 또한 처음에는 나르시스를 좀비로 만들었던 독약과 제조법, 밀교의식에만 관심을 보인다. 거기서 흔히 복어의 맹독으로 알려진 테트로도톡신이 사람을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드는 독임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그 독을 중화시키거나 그 반대의 작용도 하는 다투라라는 독초의 정체도 알아낸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독약 제조를 맡는 '호웅간'이라는 부두교 사제집단의 일원과 개별적으로 접촉하면서 멀쩡한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진짜 원인은 맹독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데이비스는 부두교 사제집단 배후에도 아이티 정부의 묵인을 통해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비밀조직 '비장고'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비밀조직이 서구인들의 착취에 시달렸던 노예들이 대다수였던 아이티의 해방과 투쟁의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그 명맥을 유지해왔음을 깨닫는다.
데이비스가 수차례 머물렀던 1980년대 초반의 아이티는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통치하던 독재국가였는데, 그의 아버지였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부두교 의식과 사제집단을 공적으로 승인한 의사이자 인류학자였다. 호웅간, 비장고라는 아이티 전통 문화의 조직은 독재자의 승인 아래 사회적 일탈과 제재를 받을 만한 인물을 겨냥해서 '좀비'로 만드는 일을 공개적으로 자행했다.
아이티 소작농이었던 나르시스는 형과의 재산 다툼으로 가족에게 해를 끼치는 등, 영원히 노동하는 좀비가 되어야 마땅한 사회적 말썽거리였다. 그러니 그의 좀비화는 비단 독약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좀비화라는 현상은 아이티의 역사와 전통 문화, 독재와 공포정치가 착종된 '암흑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독약의 성질과 배합, 복용의 정도가 아니라 권력과 부를 독점한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의 양상과 수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말해왔던 좀비화는 아이티의 전통 문화적인 의례와는 무관한, 한낱 환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글쎄, 그것이 그토록 궁금하다면 <나는 좀비를 만났다>의 대단원을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바야흐로 좀비 시즌이다. 브래드 피트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인류를 좀비의 습격에서 구원할 처방전을 마련하는 영웅적 주인공으로 나서는 영화 <월드워 Z>(2013)는 지금까지 430만 명 가까운 한국 관객을 끌어 모았다고 한다. <월드워 Z>의 원작으로, '좀비 아포칼립스 계의 셰익스피어'(?)로 급부상한 작가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2006, 한국어판 박산호 옮김, 황금가지 펴냄, 2008)도 다시 도서 베스트 순위에 진입했다.
▲ 영화 <월드워 Z>의 한 장면. |
이뿐만이 아니다. 국제정치에 좀비를 외삽한 결과를 가늠하는 정치학 서적, 소설과 매뉴얼을 결합한 국내판 좀비 생존 매뉴얼, 국내외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소설들도 앞 다퉈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모래인간의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2011~13)와 같은 국내 좀비 웹툰도 한창 연재중이다. 좀비 아포칼립스 드라마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미드 <워킹 데드> 시즌 4는 올해 10월 중순부터 방영된다고 한다. 그간 주로 B급 호러영화를 통해 미국산 글로벌 괴물로 알려져 왔던 좀비가 바야흐로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도 뿌리내릴 때가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좀비의 역사와 유래를 좀 더 배울 필요가 있겠다. 웨이드 데이비스의 <나는 좀비를 만났다>는 피지배자들의 억압된 역사에서 탄생한 이 괴물의 잊히고 만 원산지, 끊어진 고리를 연결하려는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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