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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펑펑' 대기업, 폭염에 죽는 독거노인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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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펑펑' 대기업, 폭염에 죽는 독거노인을 아는가

[프레시안 books]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나쁜 에너지 기행>

인간의 여러 활동 중 여행만큼 에너지에 전폭적으로 기대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에너지 측면에서만 보자면 여행은 낭비적이다. 우리는 온실가스를 직접 대량 배출하는 항공기를 타고 여행지에 가서 호텔에서 에어컨을 빵빵 틀어놓고 잔다.

에너지를 고민하면서 여행하면 어떨까? 취재 목적이긴 했지만 남태평양의 섬 투발루를 '여행자처럼' 다녀온 적이 있다. 워낙 섬이 작았기에 취재는 사나흘 만에 끝났다. 일주일 머문 그곳의 평화로움은 나에게 일보다는 휴식의 느낌을 주었다. 투발루는 참 평화로웠다. 하나 밖에 없는 호텔에서 나오는 음식은 참치 혹은 돼지고기뿐이었는데, 다른 음식을 사먹으려 나가봐도 시장이 없었다. 밤이 되면 전깃불은 꺼졌고, 경제는 자급자족으로 굴러갔다.

투발루는 기후 변화의 대명사다. 100년 만에 지구 평균 기온이 0.74도 오른 지구온난화 때문에 해수면이 차올라 수몰 위기에 처한 나라. 투발루는 1995년 교토의정서 이후 '기후 정의'의 절박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를테면 투발루의 연간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0.46톤이지만, 한국인 한 명은 투발루의 20배가 넘는 9.61톤, 미국인 한 명은 40배가 넘는 19.73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2004년 국제에너지기구 자료) 뭔가 불공평하지 않는가? 기후 변화의 주범은 산업국가인데, 피해는 온실가스를 배출하려야 배출할 수도 없는 저개발국가가 받다니!

2000년대 초중반 각종 유엔 회의에서 투발루와 몰디브 등 태평양 환초국가는 선진국에게 기후 변화의 역사적 책임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이 풍경을 보면서 우리는 처음 '기후 정의'라는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환경 분야에서 오염을 일으킨 당사자가 오염을 제거해야 할 '오염자 부담 원칙'이 있듯이, 기후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그때까지만 해도 '기후 정의'는 태평양의 해발고도 낮은 섬나라들의 권리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됐다. 덧붙여 기후 정의가 논의되는 곳이 있었다면, 기후 변화를 둘러싼 정상들의 회의장이었다. 온실가스 의무 감축량을 할당받는 국가가 되느냐, 면제받느냐로 기후 변화의 역사적 책임을 판단 받았다. 투발루는 좀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외교전을 벌였고, 우리나라는 신생 산업국가라는 이름으로 의무 감축 국가에서 빠지려고 했고, 미국은 아예 이런 논의를 깨는데 몰두했다.

자,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기후 정의는 국가적 차원에서만 실현되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도 기후 변화와 관련한 에너지 불평등은 존재한다. 기후 변화를 방지하기 위한 고통을 평등하게 부담하는 것, 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공평하게 보장하는 것이 기후 정의, 궁극적으로는 에너지 정의다.

에너지 정의는 여러 분야에서 논의된다. 필리핀 이사벨라의 플랜테이션 농장도 에너지 정의의 시험대에 서 있다. 정부와 대기업은 바이오에탄올을 생산하기 위해 기존의 농지를 밀어내고 여의도 37배의 땅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바이오에탄올은 도시 거리에 늘어선 주유소에 공급된다. 반면 이사벨라의 농부들은 땅을 잃고 직업을 잃는다. 한때 아시아 최대의 쌀 생산국이던 필리핀은 1993년부터 쌀 수입국이 됐다. 필리핀의 관심사는 에너지로 돈을 버는 것으로 바뀌었다. 2007년에는 '바이오 연료법안'을 통과시켜 바이오에탄올 생산을 위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개척하려 한다. 이 변화의 체제에서 이익을 보고 편리를 누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시골의 농부들인가? 아니면 에너지 기업과 자동차를 굴리는 도시의 부자들인가?

▲ <나쁜 에너지 기행>(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2009년 8월 세워진 에너지·기후 분야의 진보적 민간 싱크탱크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연구원 9명은 전 세계를 돌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에너지의 생산과 이용 그리고 기후 변화 시대에서 고통 분담이 평등하게 이뤄졌는가? 자칭 기후 정의 원정대는 필리핀, 라오스 등 아시아 5개국과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독일 등 모두 8개국을 여행하며 '기후 정의'와 '에너지 정의'를 성찰했다. 딱딱하지 않은 여행기 스타일의 에너지 견문록이다.

도대체 에너지로 인해 무엇이 불평등하단 말인가? 태평양 투발루만의 이야기 아닌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이 없고, 국민이 똑같은 전기요금을 내는 우리에게 에너지 불평등은 낯선 개념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에너지 불평등은 사회적 불평등의 중요한 축이다.

세계의 최빈국 중 하나인 라오스도 그러하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370달러이고 하루 1달러 정도로 생활하는 극빈층이 30퍼센트를 넘는다. 전기가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도시가 별로 없다. 수도 비엔티안뿐만 아니라 관광지 루앙프라방도 밤이 되면 어두워진다.

저자들이 방문한 메콩강 유역의 시골 마을들은 전기 구경조차 어렵다. 마을에서 아주 돈이 많은 사람들만 '다이남똑'으로 전기를 만든다. 이 시설은 상류의 시냇물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와 전기를 만드는 일종의 '초소수력 발전기'다. 냉장고는 쓸 수 없고 전등을 밝히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수준의 전기다.

이 마을들 주변에 자리 잡은 싸이냐부리에는 큰 댐이 생긴다. 그러나 댐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10퍼센트만 지역에서 사용하고 90퍼센트는 이웃의 '부자 나라' 태국으로 수출된다. 가난한 나라 라오스의 최대 수출품은 다름 아닌 전기다! 라오스는 1980년대 후반 시장 개방 경제로 이행하기 위해 매콩강 수자원을 이용하겠다며 자국을 '아시아의 배터리'로 천명했다.

▲ 라오스 메콩강에 건설될 대규모 댐은 유역 주민의 생활을 뿌리채 흔들게 된다. ⓒoxfam.org.au

물론 라오스 정부도 자국민의 전력난을 잘 알고 있다. 2020년까지 전 가구 90퍼센트에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대규모 수력 발전소 건설이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더 이상 대규모 수력 발전소를 짓지 않는다. 대규모 수력 발전소는 반환경적인 '나쁜 에너지'다.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을 만들고, 자연·문화유산을 수몰시킨다. 저자들은 말한다.

"(반환경적인 발전소를 짓는) 이런 전략은 원죄 없이 기후 변화의 최대 피해자가 되어버린 저개발국가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양날의 검이다. 우리가 '녹색성장'으로 핵 발전을 내세우는 것처럼, 산골 오지까지 전기를 보급하겠다면서 '수출용' 대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며 국제금융기구들의 대출 원조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2년 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25주기를 맞아 동유럽의 나라 벨라루스를 취재하다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도 당혹해 한 적이 있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때 상공의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었기 때문에 벨라루스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국토의 23퍼센트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됐다. 그런데 놀랄 일이 있었다. 아직 방사능 노출로 인한 피해자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벨라루스는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있다. 러시아의 차관으로 건설되는 원자로 2기는 2017년에 완공된다. 왜일까? 이렇다 할 자원이 없기 때문에 러시아의 차관을 들여와 '값싸게' 한꺼번에 많은 전력을 생산하는 원전을 선택한 것이다. 에너지 불평등의 피해국일수록 '나쁜 에너지'를 쓰게 되는 역설에 빠진다.

선진국은 기술 개발로 풍력, 태양열 등 착한 에너지로 이동하고, 저개발국가는 원자력, 대규모 수력 발전소 등 나쁜 에너지를 쓰는 경향을 보인다. 선진국의 공해 산업이 저개발국가로 이동하듯이 에너지 산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런 경향은 세계적으로 새롭게 형성될 '기후 변화 체제'에서 이를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 대상으로 이용하려는 '기후 변화의 정치학'과 무관치 않다.

저자들이 방문한 필리핀 케손시티의 파야타스 쓰레기 매립장도 이런 세계적 기후 불평등 체제의 일단을 보여준다. 파야타스는 과거 서울의 난지도와 유사하게 고층빌딩처럼 쌓인 쓰레기를 주워 날품팔이를 하는 사람들이 판자촌을 짓고 사는 곳이다. 2000년 7월 태풍과 폭우가 파아타스의 쓰레기산에 몰아쳤다. 최소 234명이 쓰레기 더미에 묻혔는데, 죽음의 원인은 메탄가스 질식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파야타스에서는 그 메탄가스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다. 총 200킬로와트의 전기로 관리사무소와 주변 가로등을 밝힌다. 이 발전 시설은 유엔 청정개발체제(CDM)의 인증을 받았다. 온실가스를 줄인 것으로 인정돼 유럽의 탄소 시장에 내다파는 것이다. 선진국은 빈민들이 죽어간 이곳에서 온실가스 배출권을 사들이고, 파야타스는 매년 6000만페소(약 15억 7200만원)를 벌어들인다.

저자들은 "부자 나라와 부자 기업이 파야타스에서 감소된 양만큼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CDM을 통한 배출권 거래는 오염 원인자인 선진국에게 합법적 오염권을 부여하고 개도국에게 오염을 처리하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윤리적 문제를 거래 수단으로 바꾸었다. 오염자 부담 원칙에 위배된다. 말하자면, 부자인 우리는 계속 팍팍 쓸 테니 가난한 너희들은 열심히 (탄소 배출을) 상쇄하라는 메시지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불평등은 없을까? 기후 변화 시대의 취약층은 산동네의 독거노인들이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선풍기도 켜지 않는다. 한여름 하루 이틀의 폭염으로 이들은 세상을 떠난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절전을 강요하면서도 기업에게는 전기요금을 할인해준다. 송전탑을 반대하는 경남 밀양의 주민들의 운동도 에너지 불평등과 관련한 문제다. 시골에서 원자력 발전소 등 전기를 만들어 대규모 송전탑을 통해 수도권으로 수송하는, 서울과 지방의 불공평한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지방은 전기를 만들고 서울은 쓰기만 한다. 지방은 위험 부담을 떠안고 농촌은 송전탑 등 환경 피해를 감수한다.

책이 보여주는 에너지 현실은 디스토피아다. 자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데 관심이 없다. 정의는 에너지 앞에서 멈춘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활동조차 에너지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자들은 국제사회가 에너지 문제를 빈곤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인간의 기본 권리에 포함하는 접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생활에 필요한 적당한 에너지를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보편론적 원칙이 확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에너지는 그동안 돈이 아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BP, Shell 등 에너지 기업들이야말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서있다.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에서는 실제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 대기업과 싸우는 민중들이 있다. 이미 1세계에 편입된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를 매개로 한 민중투쟁을 보기 힘들겠지만, 밀양 송전탑 문제에서 보듯 내재된 에너지 정의의 문제가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재밌게 읽힌다는 점이다. 여행자의 감성과 활동가의 비판적 시선이 조화를 이뤘다. 9명의 저자들은 어딜 가나 '전기'에 대해 묻는다. 사람을 붙잡고 집에 전기는 들어오느냐? 전봇대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주변에 발전소 없느냐? 수력 발전소가 있다고? 한번 가보자! 에어컨을 빵빵 틀어놓는 고속버스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휴양지에서 수영을 하려다가도 부자들의 빌리지를 지키는 사설 경호원의 총을 보고 에너지의 불평등을 떠올린다. '에너지'에 대해 더듬이를 세우고 다닌 여행자이자 연구자, 그리고 활동가의 감성을 가진 이들이 썼다. 세련된 문장이 없어 아쉽지만 투박함보다는 진솔함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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