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에 따르면, 학대는 통제, 특권의식, 무시, 변명, (피해자 탓하기를 포함한) 정당화 등의 재료가 어우러진 요리와도 같단다. 이 재료의 바탕 위에 신체 위협이나 폭력이 동반된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서 재료가 가감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다르지 않다. 또한, '정신적 학대에서 비롯한 상처는 주먹질 같은 신체 폭력으로 인한 상처만큼 깊고 오래 지속된다'고 한다. 언어폭력 역시 신체 구타와 차이가 클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행동의 뿌리가 같고 유사한 사고에서 비롯되며, 동일한 수준의 상처를 남기므로 같은 맥락에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 남자는 도대체 왜 그럴까>(런디 밴크로포트 지음, 정미우 옮김, 소울메이트 펴냄). ⓒ소울메이트 |
<그 남자는 도대체 왜 그럴까>에서는 '요구하는 남자, 물고문하는 남자, 훈련 담당 부사관, 미스터 예민, 람보, 피해자, 테러리스트' 등으로 학대 유형을 세분화해서 소개하고 있다. 또한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공포를 자아내는 고단수의 학대 유형도 보여준다. 그들의 심리와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행동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으므로, 혹 학대에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되거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은 관심을 가져 볼 만하다. 또한, 정신건강 전문가, 심리치료 인접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도 유용한 책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저자는 학대자 프로그램은 심리치료나 분노 조절 기법으로 대치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심리치료사들은 학대 행위를 충동조절과 같은 병리 문제로 접근하기 때문에, 학대자들이 악용할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더러는 그들의 욕구를 수용해줌으로써, 부정적 행동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열정과 공격성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잔인한 말싸움과 불같은 감정 폭발은 흥분되고 매력적인 관계를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는 잘못된 생각이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다. 인기 있는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는 때때로 이러한 잘못된 이미지를 강화시킨다."(61쪽)
열정과 폭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의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폭력을 행하는 이유는 사랑과 애정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마음과 동정을 이용할 뿐이다.
"배우자를 살해한 학대자들은 사랑과 학대를 혼동하기 때문에 사랑해서 살해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유감스럽게도 텔레비전 뉴스조차 그런 행동을 '치정에 얽힌 범죄'라고 묘사하면서 학대하는 남자들의 주장을 거든다. 하지만 만약 자녀를 살해한 엄마가 아이를 너무도 사랑해서 살인했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게 최선이 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자긍심과 독립심을 지지해 주면서, 그 사람의 인간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학대나 강압과는 양립될 수 없다." (108쪽)
저자는 '여성과 아이 살해를 미화한 에미넴의 노래가 그래미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여자를 구타하고 학대를 소재로 한 코미디언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의 공연에 관객이 빽빽하게 들어찬 일화를 소개하며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팬들은 '그냥 웃자고 하는 걸 가지고'라는 말로 몰아세우지만, "실상 유머야말로 문화가 가치관을 전승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 (433쪽) 라고 런디 밴크로프트는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불황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병원은 북새통을 이룬다. 학대와 폭력을 당하는 쪽이든 가하는 쪽이든 정신없이 쏟아진다. 오늘도 어머니 뺨을 때리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아들과, 여자친구의 변심을 견딜 수 없어 칼로 상해를 입힌 청년과, 성교육을 이유로 자녀가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성행위를 강요한 아버지를 치료실에서 만났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 '학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실수였다'거나, '감정 조절을 못 해서'라든가, '너무 사랑해서', '내 가족의 문화'라는 핑계를 대며 행동을 합리화할 뿐이다. 놀라운 일은, 당하는 쪽 역시 내 아들과 남편은 '학대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학대의 기준'은 무엇일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고, 가학적이고 잔혹한 내용을 자주 접하다 보니 예능 프로그램에서조차 '폭력'을 웃음의 소재 쓰는 걸 보면 상당한 거부감을 느낀다. "넌 좀 맞아야 해, 매가 약이죠"라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는 이들 속에서 혐오를 넘어선 공포도 느낀다. 더러는 농담인 줄 알면서도 발끈한다. 금세 '피곤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나, 피곤한 사람이 될지언정, 폭력에 무뎌지고 싶지 않다. 자신의 아픔에 예민한 만큼,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착취로 보상받으려는 이들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다면, <그 남자는 도대체 왜 그럴까>를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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