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근하는 일이 쉽지 않은 우리네 삶에서, 대통령 선거의 열기가 무르익어 가던 지난 여름에 한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하여 세인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저녁에도 밤에도 직장에 묶여 있는 삶은 우리를 고달프게 한다. 젊은이들은 데이트하고 취미 활동을 할 시간이 빠듯하고, 부부들은 아이들과 대화하고 함께 놀 시간이 거의 없다. 주중에 뼈 빠지게 일하느라 지치는 까닭에 주말에는 그냥 집에서 잠자고 TV 보며 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주중에 바빠서 못한 쇼핑을 위하여 주말에 한꺼번에 대형마트에 가서 구입하는 것이 편리하니, 그 소중한 여가 시간은 대형마트에 가서 소비되어 버린다. 이렇게 과중한 근무 시간, 출퇴근 시간에 지친 대도시 맞벌이 부부들에게 "대형마트가 아닌 동네 슈퍼를 이용하는 윤리적 소비"를 권장하는 진보 세력의 주장은, 한가한 사람들의 한가한 이야기로 들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평균 약 2300시간을 일한다. OECD 가입국 중 연 2000시간 이상을 일하는 나라는 한국과 그리스밖에 없다고 한다. 심지어 체코처럼 우리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훨씬 적은 나라의 국민들도 우리보다 훨씬 적게 일한다. 그렇게 적게 일하니까 가난하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 우리보다 잘 사는 네덜란드인들은 일주일에 37시간, 연 1390시간을 일하는데, 거의 우리의 절반가량 밖에 일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네덜란드와 독일, 스웨덴 등의 직장인들은 월요일에서 목요일은 하루 8시간 근무 후 칼퇴근을 하고 주말인 금요일에는 오전까지만 근무한다. 우리처럼 아침 9시부터 밤 9시, 10시까지 근무에 주말도 후딱 지나가기 일쑤인 사람들의 눈에 이 정도면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 읽은 책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로버트 스키델스키·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부키 펴냄)는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기획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두 저자인 로버트 스키델스키와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다. 아버지인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3부작으로 된 두꺼운 케인스 전기를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정치경제학자이다. 아들인 에드워드 스키델스키는 철학과 신학, 정치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케인스가 꿈꾼 잠정적 유토피아
▲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로버트 스키델스키·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박종현 감수, 부키 펴냄). ⓒ부키 |
따라서 많은 이들이 유토피아를 비웃는다. 게다가 현실 경제에 대한 온갖 분석으로 가득 찬 경제학자들의 머릿속에 유토피아 같은 단어는 자리 잡을 곳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처럼 경제학과 철학이 서로 만날 때, 즉 케인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알프레드 마샬과 플라톤, 마르크스와 인도 철학이 서로 만날 때, 경제학은 철학자들이 꿈꾼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세속적 무기가 되고 철학은 경제학이라는 현실적 기반을 획득하게 된다.
천년왕국과 공산주의가 역사적 실재성이 없는 궁극적 유토피아라면, 저녁 6시에 칼퇴근하는 세상, '저녁이 있는 삶'은 실재로 역사 속에 존재했던 가능한 유토피아이다. 1930년대 이래 최고 수준의 복지 국가를 만들어낸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가인 비그포르스(Wigforss)는 이러한 의미에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스웨덴과 네덜란드 등에서는 실제로 노동 시간이 주당 35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시장 경제와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면서도 복지 국가를 만들고 노동권과 인권을 대폭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케인스 역시 그와 유사한 잠정적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스키델스키 부자에 따르면, 경제학자 케인스는 192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부생들 앞에서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자본주의 경제에 환멸을 느낀 대학생들이 갓 태동한 레닌의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인류의 희망을 보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개최된 강연이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개선된 자본주의는 일종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공산주의에 비하여 자본주의가 훨씬 더 효율적인 유토피아적 기획이라는 것이다. 2년 뒤 강연 내용은 수정을 거쳐 같은 제목의 짧은 에세이로 출판되었다.
당시의 통계 자료를 활용하면서 케인스는 자본 축적과 기술 진보에 의해 100년 뒤 선진국의 생활 표준은 4배에서 8배까지 높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어 인류는 처음으로 경제적인 걱정거리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남아도는 여가 시간, 자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삼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케인스가 내다본 2030년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7년 뒤이다. 그런데 경제 통계에 근거한 케인스의 예상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실제 영국인들의 1930년대 초반 일인당 평균 국민소득은 5000달러였는데 오늘날은 5만 달러로 10배 증가했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지금까지 영국의 경제 성장율 역시 케인스가 예측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성장했다.
그렇지만 노동 시간만큼은 케인스의 예측이 거의 틀렸다. 1930년대 영국의 직장인들이 대략 일주일에 50시간 일했다면 오늘날의 영국인들은 대략 40시간 일한다. 국민소득은 10배로 성장했는데, 근무 시간은 불과 20퍼센트만이 줄어든 것이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는 케인스의 이 빗나간 예언을 분석하는 책이다. 저자들은 왜 케인스의 예언이 빗나갔는지, 그 원인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간다. 왜 국민소득이 늘고 따라서 물질적으로 '충분해' 지는데도 케인스의 예상과 달리 사람들의 삶은 과거에 비해 그리 여유롭지 않은 것일까? '좋은 삶'을 이루는데 도대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하다는 건가?
좋은 삶, 좋은 세상이란 무엇인가?
스키델스키 부자는 주류 경제학의 관심사는 '효율적인 삶'일 뿐, '좋은 삶'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주류 경제학자들이 다루는 주제는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인 경제를 만들 것인지에 있을 뿐, 그러한 경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살던 아테네 시대에서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중세의 유럽,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고대 중국, 브라만 종교가 탄생하던 고대의 인도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던 엘리트들이 추구하던 궁극적 이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처럼 돈벌이에 대한 끝없는 추구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숭앙받는 것은 인류 역사 전체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고대와 중세의 지배 엘리트 계층에게서 가장 숭앙받은 가치는 '좋은 삶'이었지, '부유한 삶'은 아니었다.
"유럽과 인도, 중국과 같은 오래된 문명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모두들 상업은 정치와 명상 아래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고, 동시에 상업이 다른 활동을 종속시켜 자신을 목적으로 섬기게 만드는 능력을 인식하고 또 우려했다. 모두들 돈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하나의 예외적인 현상으로 간주했다. 각기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이 세 가지 거대 문명이 이러한 점에서 공통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대와 중세의 훌륭한 가치인 '좋은 삶, 좋은 세상'에 대한 추구가 왜 오늘날에는 그렇게 약해졌을까? 그것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이고, 정신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과 신고전파 경제학 때문이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승리를 거둔 두 가지 운동의 사상이 있었는데, 그 둘이 한데 합쳐지자 공정함과 반칙이라는 단어 자체가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운동 중의 하나는 근대의 자유주의 이론이며 또 하나는 신고전파 경제학이다. 이 두 운동이 힘을 합쳐 공적인 논의의 장을 사실상 독점했으며 과거의 윤리 전통을 주변부로, 반문화적인 위치로 밀어냈다."
자유주의 및 신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그와 결합된 근대 철학의 특징과 한계를 보여주기 위하여 스키델스키 부자는 애덤 스미스와 맨더빌, 맬더스와 알프레드 마샬, 존 스튜어트 밀과 케인스, 마르크스 같은 경제학자들의 사고 속에 어떻게 '좋은 삶'에 관한 관념들이 사라지고(스미스와 맨더빌), 혹은 살아 숨 쉬는지(마샬, 케인스, 마르크스)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경제 사상의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또한 저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공자, 벤담과 베이컨, 칸트와 헤겔, 그리고 현대의 마르쿠제에 이르는 철학자들이 노동과 여가, 자유 시간과 복지, 욕구(wants)와 필요(needs)라는 일상생활상의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관해, 철학을 보는 새로운 시각도 제공한다.
행복 경제학의 한계
그뿐만이 아니다. 이 책은 이른바 '행복 경제학'의 성과와 함께 그 한계도 잘 지적해준다. 기존의 행복경제학에 따르면, 일인당 국민소득이 지난 수 십 년간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복지수는 별로 증가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행복 경제학은 관심의 초점을 국내총생산(GDP)이 아니라 국내총행복(Gross Domestic Happiness, GDH)으로 옮기라고 주장한다. 실제 영국 집권당의 캐머런 총리는 2010년 전통적인 거시경제적 지수를 보완하는 새로운 '웰빙 지수'를 발표했다. 이제 행복은 진지한 정치 문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행복 경제학자들의 상당수는 행복이 매우 주관적인 심리적 요인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들 주장의 주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소득의 재분배를 통해 가난을 개선하고, 동시에 여가 시간을 늘리는 것 같은 객관적 요인에 대하여 그들은 잘 언급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행복한 삶'에 대한 관심일 뿐,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키델스키 부자가 행복 경제학의 한계를 비판하는 부분은 신랄하다.
"만약 행복이 잘 사는 것과 내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그저 사적인 기분에 불과하다면, 소마나 두뇌 자극술이 가장 값싸고 효과적으로 행복을 달성해 줄 수단임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왜 우리의 관심이 '좋은 삶'에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행복은 스스로를 돌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가?"
'행복한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이 국정 목표
박근혜 정부는 '국민 행복 시대'를 국정 키워드로 제시했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이냐를 묻게 되면 백인백색의 답이 나온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취향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좋은 삶'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에서부터 오늘날의 도덕철학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기준들이 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안전한 삶이며, 개성과 인격이 존중되고 사회적으로 평화로우며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또한 그것은 우정과 사랑이 넘치는 삶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객관적 조건은 넉넉한 여가 시간(자유 시간)과 그리고 (이미 충분할 정도인) 일인당 평균 국민소득의 '보다 평등한 분배'다. 국가는 이렇듯 '좋은 삶'을 모든 국민들에게 보장할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만약 개인의 제1목표가 자신의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국가의 제1임무는 능력이 닿는 한에서 모든 시민의 좋은 삶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때 "능력이 닿는 한"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건강과 우정은 다분히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 이에 비해 개성과 존중, 여가는 부분적으로 개별 주체에게 달린 문제이지만 국가는 이런저런 좋음들이 번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고도 정당한 역할을 맡는다."
"사실 최근까지 서방 세계의 공공 정책은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암묵적으로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관한 이념들의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념들 실패할 운명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정치 투쟁에서 패했을 뿐이다. 그 이념들 중에는 공적 생활의 표면 아래에서나 주변부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살아 있는 것들도 많다. 정치적으로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좋은 삶'과 '좋은 사회'라는 이념을 중심부의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기본소득'을 보장하라!
이러한 고찰을 거쳐 스키델스키 부자는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충분치 않은" 탐욕에 맞서려면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한 일곱 가지 기본재(basic goods), 즉 건강과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7가지 기본재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첫째, 일하라는 압력 줄이기이다. 이것은 주당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법정 휴일을 확대하며, 일자리를 나누는 것을 통해 달성된다.
둘째는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이다. 우리나라에도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그 기본소득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니, 기본소득론은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영국의 자유주의자들과 미국의 제퍼슨 민주주의자들(미국의 '리버럴'들)이 주장해온 것으로 이미 2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320쪽). 스키델스키 부자는 영미의 진보적 자유주의(사회적 자유주의)의 전통 속에 있는 기본소득 개념을 더욱 심화시켜 적용하기를 바란다.
▲ 한국에도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운동이 확산되는 중이다. ⓒ기본소득네트워크 |
그리고 셋째, 소비와 쇼핑을 즐기는 심리적 압박감을 줄이기 위한 조치도 필요하다. 그것은 먼저 누진 소비세인데, 예컨대 일인당 7500달러 이상의 소비에 대해서는 모두 누진세율을 적용하자는 제안이다(333쪽). 저자들에 따르면 누진적 소비세 역시 영미의 진보적 자유주의의 전통 속에서 논의되어온 것인데, 이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에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할 듯하다.
그 밖에 광고의 제한과 세계화의 속도 조절, 자본 도피 통제와 핫 머니의 통제 등도 필요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충분함과 만족을 모르는 무한 경쟁의 쳇바퀴를 중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인문학 서적
이 책의 서술 방식은 편안하고 쉽다. 헉헉거리는 근무 시간에 짓눌린 삶에 대비되는 여유로운 삶, 넉넉한 소득과 쪼들리는 소득 등 우리의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책은 정신적으로도 재미있고 내용이 깊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공자와 인도철학, 헤겔과 마르쿠제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사상, 그리고 스미스에서 리카르도, 마르크스와 케인스, 아마르티아 센과 니콜라스 칼도어에 이르는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관련시키면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재보다 더 의미 있는 삶, 더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경제학에 대해 잘 모르는 철학도 등 인문학도들, 그리고 역으로, 철학과 인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경제학도들에게 큰 감명을 줄 것이다. 스키델스키 부자의 노고에 치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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