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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 만에 저항을 포기한 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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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 만에 저항을 포기한 유엔

[해방일기] 1948년 6월 26일

1948년 6월 26일

로버트 올리버는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의 미국 내 홍보 활동을 긴밀하게 도와준 사람이다. 미국인 '심복'이라 할 만한 사람이다. 그가 1990년 낸 이승만 관련 회고록이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 이승만과 한미 관계>(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그 속에는 이승만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선거 직후 로버트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5·10 선거 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본다.

선거는 해결지은 문제보다 새로운 문제들을 더 많이 던져놓은 것 같았다. (…) 5월 14일 선거 결과에 대한 우리들의 기쁨이 산적한 새로운 문제들 때문에 근심으로 바뀌어가는 가운데 나는 리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키프링거뉴스레터와 데이비드 로렌스의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 지는 어느 쪽이나 모두 미국이 장차 한국을 소련에게 '포기'하리라는 내용의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사람들이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다만 이번 선거가 의미하는 바를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당지의 군사 지도자들 간에는 박사님이 '반미적'이라는 견해가 확고히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입니다. (…) 박사님의 전 생애가 친미로 일관해 왔음은 저도 알고 박사님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박사님의 일생을 통한 한국 독립 투쟁이 반드시 미국을 통하여 미국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과 또한 소련의 침공을 막는 데 있어서도 미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저와 박사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232~233쪽)


이승만의 걱정이 두 가지 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하나는 5·10 선거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는 것이다. 유엔위원회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조선을 얼마동안 떠나 있겠다고 할 때였다. 5·10 선거가 제대로 된 선거로 인정받을지 여부는 미국의 대조선 정책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이승만 측은 보고 있었다. 또 하나의 걱정은 이승만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임 문제였다. 이승만에게는 미국 요인에게 쫓아가 "얘는 뼛속까지 친미"라고 보증해 줄 형님이 없었던 것이다.

올리버는 6월 7일 이승만에게 편지 보낸 일과 함께 유엔위원회 상황을 적었다. 그와 이승만이 그 무렵 인식하고 있던 상황일 것이다.

유엔한위는 독립된 한국정부가 존재해야 하는가의 여부를 놓고 5대 3으로 갈라지고 소수파는 정부 승인 전에는 앞으로의 국가 통일 계획에 관해서 국제연합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있는 '대표 기구' 이상의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등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또한 김구와 김규식이 취한 입장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238쪽)

6월 7일은 유엔위원회 본진이 상해에서 서울로 돌아온 날이다. 그 무렵부터 위원회의 8개국 대표 사이에 5·10 선거에 대한 의견이 "5대 3"으로 갈라져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5대 3 중 어느 쪽이 5고 어느 쪽이 3인지 여기는 분명치 않은데, 5·10 선거를 비판적으로 보는 쪽이 다수였음을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의 인터뷰 기사 끝머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씨는 위원단은 5대 3으로 5·10 선거를 부인하였다 하는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서는 확답을 회피하고 "어떠한 단체에 있어서라도 만장일치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으며 상이한 의견이 제출됨으로서 더욱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라고만 대답하였다.

이승만이 6월 21일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유엔위원단 상황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다.

6월 21일 리 박사는 더욱 심난한 사태 진전에 대하여 적어 왔다. 유엔한위 위원들은 이렇다 할 공헌을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에 대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메논의 후임으로 의장직을 맡은 인도의 씽은 한국 사람이 아무도 협의를 위해 사무실을 찾지 않으므로 자기는 소설이나 읽으며 허송세월 하고 있노라고 불평이었다.

중국과 비율빈 대표는 5·10 선거의 정당성에 관한 유엔한위 보고서를 즉각 작성하고 싶어 했고 엘살바돌 대표는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여기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하였다. 대다수의 대표들은 보고서를 미리 내는 것은 남북 통일 회담 가능성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느끼고 또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늦추려고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김구, 김규식과 맞서고 싶지 않기 때문에 관망적 태도를 취하였다.

파리 차기 총회에서 국제연합이 선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들어 하지 장군은 리 박사에게 유엔한위를 비난하는 성명을 내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한국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리 박사는 왜 우리가 늦어지는 것을 반대하는지 설명하면서 "우리는 소련이 반공적인 사람들을 북한에서 몰아내려 하고 있으며 100석을 확보하기 위해 선거 실시를 제안할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떠한 연립정부도 한국을 또 하나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인도가 찬성에서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된 점에 관심을 나타내며 리 박사는 그 이유가 미국이 카슈밀 문제에 인도를 제치고 파키스탄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노라고 했다. "만일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이라면 국제연합은 작당하는 집단에 불과한 것이고 한국 문제는 이들에게 아무 뜻이 없을 것이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245~246쪽)


중국, 필리핀과 엘살바도르 대표는 미국이 원하는, 5·10 선거를 긍정하는 보고서를 빨리 채택하려고 일편단심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5개국 모두가 5·10 선거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레바논 대표는 확실히 부정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총회에서부터 '가능 지역 선거'를 분명히 반대했던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도 서울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조선에 와서 제2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각계의 조선인과 협의한 결과 소총회에서의 제1대안 즉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가 조선인을 위하여 현명한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음으로 호주는 제2대안 즉 협의체를 위한 대안을 제출하여 이 제1대안에 반대하였으며 캐나다 역시 반대하였고 시리아는 기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1대안이 소총회에서 채택이 되고 또한 이것을 위원단도 채택하였던 것이다.

본인도 그간 선거 준비의 경위를 관찰한 결과 선거를 감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전의 상태를 고려치 않고 단지 5·10 선거 그것만을 볼 때 그 선거는 비교적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3일, "5-10선거는 성공, 조선 문제 해결에 노력")



5·10 선거가 "비교적 잘 되었다고" 본다는 것이 내게는 불만스럽다. 현장을 다 다녀볼 필요도 없이, 신문 보도만 보더라도 그 선거가 '자유 분위기' 속에 치러진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5·10 선거의 자유 분위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을 내놓기가 각국 대표들에게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단독 정부 수립으로 흘러가는 사태 진행을 싫어하는 대표들도 선거 자체는 '비교적' 잘 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고, 그저 보고서 채택을 너무 서두르지 않고 남북 통일 회담의 가능성을 기다려주는 정도의 소극적 저항으로 수렴된 것 같다.

유엔위원단 대표들 입장을 생각해보자. 거의 모두 직업 외교관들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유엔 관계 일을 하면서 유엔이란 기구의 성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부터 고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들 맡는 일이 인류애와 정의감에 입각해서 처리되기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각자의 결단이 자기 나라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오지는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더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국에게 의존도가 높은 나라 대표들은 미국이 원하는 방향을 거스른다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비교적 의존도가 낮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대표들이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불만을 가진 시리아 대표가 가장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종적 결론에서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 미국이 어떤 구체적 조치를 취했는지는 밝혀낼 수 없지만, 당시 세계에서 미국이 점하고 있던 압도적인 경제적-군사적 힘만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유엔위원단은 6월 25일에 미국이 원하는 결정을 내리고 남조선 국회에 이를 통보했다.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위원장 유어만은 25일부로 26일 제18차 국회 본회의에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국회를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는데 이로써 항간에 유포되고 있던 유엔위원단 국회 불신임설은 완전히 해소되게 되었다.

"한국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 귀하 근계 본인은 귀하께서 1948년 6월 11일부로 발송하신 귀한 즉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회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에 선출된 귀국민의 대표자들로써 구성된 한국 국회가 1948년 5월 31일 서울시에서 성립되었다는 정식 통고를 접수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본 위원단은 1948년 5월 31일에 선출된 귀국민의 대표자들로써 국회가 성립된 사실을 인식하오며 이 대표자들이 조속한 기간 내에 귀국의 독립과 통일을 완성시키도록 노력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귀함은 1947년 11월 14일 국제연합총회와 1948년 2월 23일 소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바 본 위원단은 모든 일을 그 결의 지시에 의거하여 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관하여는 1959년 6월 10일 당시 위원장이던 지·에스·페타손 씨가 11월 14일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에서 명시된 본단 사명을 앞으로 실행함에 있어서 귀 대표자(국회의원)들이 요청하시는 대로 상의할 용의가 있음을 통고합니다. 1948년 6월 25일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 위원장 유어만" (<조선일보> 1948년 6월 27일)


6월 11일 이승만 국회의장의 공한을 받은 뒤 두 주일 만의 결정이다. 결국은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남북 협상파를 위해 두 주일 기다려준 것이다. 5월 초 평양에서 돌아온 남북 협상파가 가까운 장래에 서울에서 제2차 남북 회담을 열 전망을 보여줬다면 아마 더 긴 시간을 기다려줬을 것이다.

결국 유엔위원단이 체념하고 말 때까지 달포 동안 남북 협상파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줬는가? 곧 살펴보겠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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