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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죽여라!" 맨얼굴 드러낸 일본, 그 속사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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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죽여라!" 맨얼굴 드러낸 일본, 그 속사정은?

[서남 동아시아 통신] 격차 사회의 약자들

3·11 당시 쓰나미가 발생하면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가족도 돌아보지 말고 각자 흩어져 높은 곳으로 피하라" "자기 생명은 자신이 지키라"는 <츠나미 덴덴코>의 전승을 계승하여 어린 학생들이 모두 살아남은 소도시 '가마이시의 기적'에 일본 전국이 감동하였지만, 이를 전국적 대피 매뉴얼로 보급하려 하자 '재해가 발생했을 때 약자를 돌보지 말고 도망가라는 말인가'라는 심리적 저항감에 직면하였다.

때문에 <츠나미 덴덴코>의 교훈은 '타인을 버리고 도망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타인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1초라도 빨리 자신의 판단으로 대피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대피도 유도해낼 수 있는 "솔선 대피자"를 격려'하는 데에 있다는 해명이 뒤따랐지만, 결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올라간 것은 (우리의 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안정 대지진 무렵 쓰나미가 밀려오자 볏짚으로 횃불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피난을 돕고 사재를 털어 방조제까지 쌓았다는 의인 하마구치 기헤이(浜口儀兵衛)의 오래된 사례였다.

교과서만이 아니었다. 3·11 이후 일본 사회의 기조는 '의인 하마구치 기헤이'에 다름 아니었다. 방사능 오염물질 누출의 공포로 핵발전소 인근 지역 농산물의 소비가 격감하자 '동일본을 먹어서 응원하자'는 국민 캠페인이 행해졌다. 방사능 오염물질의 역외 반출에 반대하면 혼자만 위험을 피하려 재해 지역에 상처를 주는 행위로 비난 받았다. 이념의 좌와 우를 막론하고 홀로 설 수 없는 약자를 끌어안고 가야한다는 대합창을 보면서,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의 한 축인 '근대적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전화하지 않을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른 한 축은 평화주의이다.) 전후 민주주의의 유지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경제적 안정에 기반을 둔 생활 보수주의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격차 사회가 진행되면서 '사회적 약자'를 어느 진영에서 어떤 논리로 끌어안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는 격차 사회의 불만을 국외로 돌리는 '불안형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하여 혐한 혐중 운동을 주도하는 풀뿌리 배외주의 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007년 조직된 '재일조선인의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들의 모임(재특회)'과 같은 조직이 전형적이다. 재일조선인이 일본의 치안을 어지럽힌다는 편견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재특회는 '재일조선인이 일본을 지배한다'는 음모론을 내세운다는 점이 특징이다.

▲ '조선 학교 무상 교육 반대'를 호소하며 시위를 벌이는 재특회. ⓒ후마니타스

거리에서 조선인을 죽이라는 과격 시위를 하는 이들은, 일상에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가상 거대 세력과 싸우는 상상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 말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는 부조리한 상황이 '일본의 복지에 무임승차하는 재일조선인'과 그들의 음모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스스로를 약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본 사회의 약자는 외부에서라도 원인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적 약자가 국민이라는 소속감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배외주의로 달리는 경향을 막기 위하여 여러 논의가 진행되었다. 전후 민주주의의 기반인 '근대적 개인'을 논의의 전제로 하는 페미니즘은 양쪽에서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보수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경쟁과 격차 사회를 비판해온 평론가 우치다 다츠루조차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의 '싱글 네트워크'를 강자들의 연합이라 규정하며 약자들을 보듬으려면 '가족이나 회사와 같은' 공동체의 부활에 답이 있다고 호소하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아직 '평화주의'비판에 집중되고 있는 듯하다. 중국, 한국, 북한 등 주변국에 대한 강경 발언과 아베노믹스를 내세워 '강한 일본'이라는 상징으로 일본 국내에서 지지율을 높이는 아베 정권도 '일본인이라는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역사 인식 퍼포먼스만을 거듭할 뿐 격차 사회와 사회적 약자의 문제는 뒷전으로 돌려버리고 있다.

오히려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저 현상 덕분에 수출은 증가하였지만 수입 물가가 상승하며, 사회 보장에 의지하는 빈곤 계층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재정 재건'을 위해 복지와 지방 교부금도 성역이 될 수 없다고 강조되면서 사회 복지의 주요 의제는 오로지 '부정 수급으로 인한 예산 낭비 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생활 보호를 정부에 신청하려면 가족의 부양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가족이 부양할 수 없었다는 증거를 제출하여야 했다. 빈곤은 1차적으로 노력하지 않은 개인의 책임이며 그 다음으로는 가족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국가는 최후의 단계에나 등장하였다.


공동체의 복원을 주장하던 우치다 다츠루가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칼럼 '무너져 가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화제를 부르고 있다. 자국민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국민 국가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일본은 정부가 '국민 이외의 존재'인 글로벌 기업을 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기업이란, 언제라도 일본을 버릴 수 있다는 협박을 통해 환경오염도, 핵 발전을 재가동할 때의 위험도, 글로벌 인재 육성이라는 요구도 모두 국민 국가에 떠맡기면서 이익만을 확보하려고 든다. 정부는 글로벌 기업들의 이익에 불과한 것을 '국익'이라 칭하여 국민에게 감내시키기 위하여 '국민적 일체감'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분주한다. 아베 정권이 한국과 중국에 끊임없이 외교적 도발을 거듭하는 이유는,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으로 '국민적 일체감'을 만들어 내어 일본 국민에게 글로벌 기업을 위한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치다의 주장에 많은 반론이 뒤를 이었다. 해외 시장 수출을 통해 성장한 일본이 이제 와서 불리하다고 글로벌 시장 경제를 포기하는 것은 '언페어'하다는 주장. 시장과 글로벌리즘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주장. 글로벌 기업이 배외주의의 원흉이라는 누명은 억울하다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치다의 의도는 '글로벌리즘 비판'이 아니라 '아베 정권의 내셔널리즘 비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포기하는 내셔널리즘은 '진정한 내셔널리즘'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화요일 동시 게재합니다. 원지연 전남대학교 교수(국제학부 일본학 전공)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0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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