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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의 계약, 치명적인 미녀, 1만 번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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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의 계약, 치명적인 미녀, 1만 번의 키스!

[프레시안 books] 셀마 라겔뢰프의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그 시절에는 삶이 단 한 번뿐인 길고 긴 모험담 같았나요?"

마을의 영웅 전설을 들려주던 할머니에게 소녀가 이렇게 묻자, 할머니는 대답 대신 머리를 저으며 '일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달각거리며 돌아가던 물레, 베 짜는 소음, 분주하던 부엌, 헛간의 도리깨질 소리, 숲에 울려 퍼지는 도끼 소리 같은 것들을."(<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151쪽)

스웨덴의 소설가 셀마 라겔뢰프(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작가. 판타지물 <닐스의 모험>으로 잘 알려져 있다.-편집자)가 19세기 말에 쓴 데뷔작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강윤영 옮김, 다산책방 펴냄)에 나오는 이 일화에서 우리는 삶과 이야기에 관한 진실이 미래의 이야기꾼(이 소설의 화자)에게 전달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즉, "그 시절의 삶"도 하나의 긴 모험담이 봉합하지 못하는 일상이 엄연히 존재하는 삶이었으며, 어쩌면 그 일상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짜는 물레와 베틀이었을 수도 있다는 진실 말이다.

▲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셀마 라겔뢰프 지음, 강윤영 옮김, 다산책방 펴냄). ⓒ다산책방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 같은 표지 그림과 경이로운 '영웅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원제(Gosta Berlings Saga)가 주는 첫인상에 걸맞게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들을 잔뜩 갖고 있다. 젊고 잘생긴 '기사'인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미인들인 데다, 그들의 사랑은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격렬하고 치명적이다. 한 마을의 전설로 남은 주인공과 기사들이 겪는 모험은 악마와의 계약, 마녀와 요정의 저주와 주문, 귀신들린 사람들, 저주받은 성 등 환상적인 모티프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요소들은 기대만큼 소설 속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번번이 현실적인 맥락 속에 편입되곤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20년대 초 스웨덴의 베름란드 지방은 전근대와 근대의 경계, 즉 이질적인 사회적‧상징적 형식 및 이데올로기들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공존하는 이행의 시공간이다. 현재를 과거의 다양한 단계가 남긴 유물로 혹은 새로운 미래의 맹아로 인식하는 모순적인 시대인식이 양립하는 시공간에서는, 이 모순과 균열을 봉합하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공동체의 서사가 탄생하곤 한다.

소설의 화자가 어린 시절부터 마을 어른들에게 들어온 '예스타 베를링 영웅전설(saga)'도 일종의 그런 봉합 서사로, 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서사의 환상성과 낭만성 이면에 솔기(봉합선)가 드러나는 순간을 관찰하는 것이다. 가령,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의 시간 폭은 기사단이 악마와 계약을 맺는 1820년대 초 어느 해 성탄 전야에서 다음 해 성탄절까지 약 1년이다. 그 기간 동안 마을에선 삶의 인과적인 흐름이 단절되고 초자연적 힘(우연, 운명, 마법, 저주)이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소설의 악마가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진짜 악마가 아니라 악귀에 들린 사악한 지주라는 설정 때문에 이 서사 장치의 환상적 효과는 계속 의문에 붙여진다.

사실 본격적인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의 전사(前事)에 해당하는 프롤로그 두 장이 소설 전체와 이질적인 서술을 보이는 전체 소설 구성에서부터 이 서사의 봉합선은 그대로 드러난다. 예스타 베를링이 파계한 목사가 되어 걸인으로 살다 수치심에 삶을 포기하기 직전, 마르가레타 셀싱을 만나 영지의 기사로서 새 삶을 살게 되는 사연이 비교적 차분하고 중립적인 어조로 서술되는 프롤로그의 서사에는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요소가 거의 배제되어 있다.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단이 제공하는 최후의 정보는 기사가 된 예스타 베를링이 제 힘으로 생계를 꾸리려는 시도(노동자로 살거나 결혼해 사는 것)를 두 번 했다가 실패한 뒤, "기사로 사는 것 외의 다른 꿈을 포기했다"(34쪽)는 사실이다. 즉 주인공이 노동과 결혼이라는 근대적인 가치를 실현하기를 포기하고 시대착오적인 신분(기사)에 정착한 뒤에야 주인공의 '영웅전설(saga)' 서사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프롤로그의 서술자와는 사뭇 다르게 거창한 수사를 늘어놓고 감탄과 탄식을 연발하는 수다스러운 '이야기꾼' 같은 화자와 만난다. 이 화자는 공동의 기억과 전승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이자 마을 전승의 전달자임을 자임한다. 새로운 일화를 소개할 때마다 자신이 그 일화를 들은 맥락을 소환하고, 이야기 신빙성의 근거로 선배 이야기꾼의 목격담을 들고,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놔두는("옛이야기들이란 반쯤 시든 장미꽃과 같아서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너무 확고히 파헤치려 하다가는 꽃잎들이 죄다 떨어져 버린다."(321쪽))

화자의 태도는 사실, 이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구전을 거치며 공동체의 이념과 가치평가를 축적한 허구의 서사임을 독자에게 거듭 환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독자는 민간전승 특유의 과장된 관용구나 경구, 서사시나 기사도 로망스에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비유 등을 화자의 '인용부호 없는 인용'으로 읽는 다층적인 독서를 할 수 있다.

내밀한 심리 묘사로 서술이 진행된 프롤로그에서는 비교적 입체적으로 다가왔던 예스타 베를링 캐릭터는 공교롭게도 정작 본격적으로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런 '인용부호 없는 인용' 속에 묻혀 마치 태피스트리 속 영웅의 캐리커처처럼 얄팍하게 느껴진다. 종종 화자의 서술과 경계 없이 섞이는 그의 대사는 화려하지만 공허하다.

▲ 작가 셀마 라겔뢰프. ⓒwikipedia
이에 반해 여성 캐릭터들은 섬세한 심리묘사를 바탕으로 각자 뚜렷한 개성과 복잡한 내면을 가진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인물로 다뤄져 주인공과 대조를 이룬다. <파우스트>의 마르가레타처럼 악마와의 계약에 의한 첫 희생자가 되어 온갖 시련을 겪지만 결코 위엄을 잃지 않는 불굴의 여인 마르가레타 셀싱, 자신을 객관화하는 냉랭한 비판적 자아를 가진 마리안 싱클레어, 가장 극적인 내면의 성장을 겪는 에바 도나 등은 근대 소설 전반에서도 보기 드물게 활력 넘치고 현명한 여성 캐릭터들이다. 이런 여성 캐릭터들과의 조우를 통해 예스타 베를링이 근대 소설의 주인공다운 내면과 위상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이 소설을 읽어도 흥미로울 것이다.

예스타 베를링은 영원한 청춘과 낭만을 상징하는 '기사 중의 기사'로 칭송받는 한편, 파계한 목사, 일하지 않는 방랑자인 그를 "사랑하는 것도, 그에게 사랑받는 것도 여인들에게는 죽느니만 못한 치욕"(101쪽)이 된다. 이는 아무리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서사로 봉합해보려 해도 근대로 이행중인 시공간의 압박을 주인공이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시공간에서 몰락한 귀족, 퇴역장교, 이야기꾼, 철학자 등으로 구성된 기사단과 그가 겪는 모험과 사랑의 전말이 마냥 낭만적일 수는 없다. 발단과 과정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요소가 작용할지 몰라도, 그 결말과 뒷수습은 현실적이고 근대적인 인간으로서의 각성과 행위가 요구된다.

기사들이 마르가레타 셀싱을 내쫓고 영지를 차지하는 이 소설의 주요 사건 자체는 전근대적인 봉건 체제의 전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계기는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장치이며, 행위의 주체인 기사들은 새로운 지위에 맞는 의식과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자들로, 영지를 갖는 대신 '1년 동안 기사답지 못한 짓, 즉 뭔가 현명하거나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계약 조건으로 내세우는 위인들이다. 노동하지 않는 이들 탓에 영지는 물론 마을 전체가 불안과 혼란의 위기에 빠진다는 이 소설의 주요 갈등 구조는 새로운 체제의 전복 자체보다 개개인의 근대적 각성을 우위에 두는 작가의 계몽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근대적인 자아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세계 역시 미리 주어진 것이나 예정된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세계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의 인간적 노력으로 정초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노동은 인간이 사회를 변혁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개인의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행위가 시작되는 이상화된 가치로 인식된다. 노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예스타 베를링과 기사들은 마을의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선의와 노동이 가진 가치를 깨닫고, 전근대적인 장치('악마와의 계약')의 굴레에서 벗어날 해답을 노동에서 찾는다. 세계와 타협하지 않고 자살하는 낭만적 영웅 베르너의 미덕보다,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여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탐색해가는 빌헬름의 미덕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괴테의 세계관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결말이다.

하지만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말 자체보다는 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 기여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존재는 이 소설만의 차별점이다. 또한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에 내포된 풍부한 서사적 가치의 복원과 재조명에 이 소설의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전 시대의 가치를 구현하는 기사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다채롭고 생생하게 형상화하는 일련의 장들은 이 소설의 백미이자, "혹독한 땅의 혹독한 시절에 기쁨을 심기 위해 와준 늙은 신들과 기사들"을 호명하는 예스타 베를링의 마지막 연설처럼 옛 시대에 대한 송시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근대적인 캐릭터들과 상황이 환상적인 장치들과 모티프로 짜인 서사의 그물망 속에 다 봉합되지 않고 자꾸 빠져나오는 틈새에 있다. 옛날 이야기꾼의 어조와 수법을 도입해 이 서사의 허구성을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서술 전략은 이 틈새를 봉합하는 듯 오히려 드러내며 모순적인 가치가 양립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다양한 장르의 언어가 혼재하며 상호 조명하는 소설 언어의 특성을 적극 활용한 이런 서술 전략은, 유럽의 근대 소설이 맞닥뜨린 언어적·사회적 모순 상황을 생생히 반영하는 동시에, 다양한 서사 장르의 관습과 구승(口承) 전통의 유산을 소설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환상과 현실에 대한 비유를 이 서술전략에 적용하자면) "지금까지 다양한 서사 장르와 구승(口承) 전통의 유산이 커다란 벌들처럼 우리 주위를 내내 맴돌았다. 이 벌들이 어떻게 근대소설이라는 조그만 벌통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잘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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