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주인공 킬러는 중간에 어떤 여자를 만나는데, 여자가 어느 순간 명확한 이유 없이 그에게 총을 겨눈다. 위기의 순간, 갑자기 영화의 프레임이 약간 끊긴다. 채 0.5초가 안되는 짧은 시간이 갑자기 증발하고 뒤따르는 프레임에서 여자는 의식을 잃고 총을 떨군다. 킬러는 가볍게 위기를 탈출한다. '어? 아니 뭐지?' 그러나 이 초능력은 한참 동안 다시 사용되지 않고, 주인공 역시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갑갑함에 가까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주인공이 악의 본거지에 다다르는 절정의 순간에 다다라서야 앞서 단 한 번 등장했던 프레임 조작이 이 킬러의 초능력임이 밝혀진다.
▲ 짐 자무시 감독의 <리미츠 오브 컨트롤> |
그는 어떻게 경비가 삼엄한 악의 본거지를 돌파해 그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것인가? 영화는 킬러가 악당의 건물을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악의 우두머리가 있는 방에 도달한 그를 비춘다.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이 그의 초능력이다. 킬러는 건물 바깥과 중심의 두 쇼트를 바로 이어버림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악의 중심에 도달한 것이다. 킬러는 거기서 타락한 악의 우두머리를 살해한 뒤 다시 무사히 탈출한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한 호흡 쯤 정적이 흐르면, 그는 어느새 이미 들판을 달리는 자동차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두 쇼트의 연결 역시 아무 설명도 없다. 무심한 도약이다.
▲ <월터 머치와의 대화>(마이클 온다치 지음, 이태선 옮김, 비즈앤비즈 펴냄). ⓒ비즈앤비즈 |
감독이란 직책이 뻔히 있는 마당에 너무 호들갑을 떤 게 아니냐고 묻는 분들께 <월터 머치와의 대화 : 영화 편집의 예술과 기술>(마이클 온다치 지음, 이태선 옮김, 비즈앤비즈 펴냄) 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박현주 옮김, 그책 펴냄)의 작가이자 통찰력 있는 인터뷰어인 마이클 온다치가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편집한 이 시대 최고의 영화 편집자 월터 머치를 인터뷰한 이 책을 읽고 나면, 영화 편집이 직업인으로서의 무한한 성실함에 더해 초능력에 가까운 공감각적 지각 능력과 예술가의 감수성을 동시에 갖추어야만 이뤄낼 수 있는 작업이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리고 편집 작업이 영화에서 얼마나 커다란 위상을 차지하는지 확인하고 나면 영화를 보는 시야 역시 어느새 넓어져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는 월터 머치가 오손 웰스를 빌어 다음과 같이 보증한다.
월터 머치(이하 M) : (…) 웰스는 <카이에 뒤 시네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비전과 스타일에서 편집은 그저 한 측면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영화는 예술이 아니며, 설령 예술이라 해도 하루에 고작 1분 동안 그럴까 말까 한다. 그 1분은 아주 중요하지만 그런 순간이 발생하는 건 극히 드물다. 영화에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편집할 때이다. 영상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영상이 중요하기는 해도 한낱 이미지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영상이 얼마 동안 지속되느냐, 그리고 각 영상 다음에 어떤 영상이 따라붙느냐다. 영화의 화술은 모두 편집실에서 결정된다."
월터 머치는 이러한 편집의 기본 개념, 즉 각각의 영상이 얼마 동안 지속되어야 할까라는 문제는 절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고, 하나의 행동이 끝나면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는 식의 기계적인 조립으로는 제대로 풀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월터 머치가 영화의 각 쇼트를 대하는 기조는 이미 시인의 그것이다.
M : 모든 숏에는 끝낼 지점이 오직 하나뿐입니다. 영화를 편집하는 것도 시를 쓰면서 각 행을 어디서 끝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느 단어에서 끊을 것인가? 그 끝 지점은 해당 문장의 문법과는 거의 관계가 없어요. 그 행이 의미상으로나 운율적으로 가장 잘 익은 지점을 찾는 게 관건이죠. 시인은 시행을 나누면서 각 행의 마지막 단어를 종이 여백에 노출시킴으로써 행의 마지막 단어를 강조합니다. 만약 거기다가 두 단어를 덧붙인다면 그 단어는 행 속에 파묻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중요성도 감소될 겁니다. 숏의 끝 지점은 마지막 프레임을 더욱 강조하고, 우리는 그걸 이용하는 거죠.
▲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 |
그리고 그가 실제로 쇼트를 이어붙이는 방식은 마치 피아니스트를 방불케 한다. 음악이 건반을 누르도록 만드는 특정한 한 순간.
M : 저는 끝 프레임을 정하기 전에 숏을 유심히 검토합니다. 숏이 계속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어느 지점에서 몸을 움찔하게 돼요. 눈을 깜빡이듯 거의 무의식중에 움찔하는 거죠. 그렇게 움찔하는 지점이 바로 숏을 끊을 지점인 겁니다.
(…) 숏이란 하나의 생각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한 생각이 기력이 다하는 때가 바로 컷할 지점인 거죠. 다음 숏으로 넘어갈 추진력이 가장 강한 순간에 컷을 하는 겁니다. 이 작업을 할 때 중요한 점은, 최소한 두 번을 연달아 (컷이 끝나는 순간을 체크)해 보고 두 번 다 움찔하는 지점이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 다 정확히 같은 프레임에서 끊었다면, 제가 그 지점에 대해 유기적으로 맞는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죠.
1초마다 24개의 표적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총으로 그중 하나를 맞혀야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이는 곧 이것이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라는 겁니다. 순수하게 생각과 감정, 리듬과 음악성에 관계된 일이죠.
O(마이클 온다치) : 그래서 가령 처음 해봤을 때는 17번째 프레임에서 움찔하고 그 다음은 19번째 프레임에서 움찔했다면-
M : 그러면 컷을 하지 않는 거죠. (…) 그 숏에 대해 제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자문해 봅니다.
시인이자 피아니스트인 그는 때로 푸가를 직조하며
소설(<잉글리시 페이션트>)에는 손에 붕대를 감은 카라바지오가 사발에서 물을 마시는 개를 보고 3년 전 고문당한 기억을 떠올리는 대목이 있다. 그 기억은 현실적이지 않고 꿈처럼 어렴풋이 나타난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쓴 각본에서 그 장면은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대사와 함께 4쪽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제 그 장면은 독일군 심문자가 붙잡힌 첩자 카라바지오의 입을 열게 하려고 애쓰는 장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소 15번의 테이크를 찍었고 (…) 밍겔라 감독은 이것을 월터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월터는 이탈리아 작가 쿠르치오 말라파르테가 '나치의 성격'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나치가 약함의 증거를 가장 싫어했다는 사실을 읽은 월터는 이것을 응용했다. 이 아이디어는 소설에도, 각본에도, 몇 백 분에 달하는 촬영 분량에도 없었다.
카라바지오(월렘 데포)는 면도칼을 보기도 전에 "날 해치지 마요"라고 한 번 말한다. 월터는 심문자가 이 말을 듣고 멈칫하는 반응을 보이는 시간을 더 길게 늘였다. 심문자가 협박을 하기는 했지만, 이는 원래 별 뜻 없는 빈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카라바지오가 해치지 말라고 하자 독일군 심문자는 잠시 멈칫하면서 얼굴에 혐오스러운 기색이 번뜩인다. 심문이 계속된다. 월터는 또 다른 테이크에서 데포가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이 대사를 하는 장면을 찾아냈다. 그는 이 대사를 몇 초 뒤 다시 삽입함으로써 데포가 두려움을 반복해서 표현하도록 만들었다.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정적이 흐른다. 실제 촬영에서 데포는 이 대사를 반복한 적이 없으며 이는 각본에도 없는 부분이었다.
그 푸가는 '음악 형식'으로도 드러나고,
M : (<대부 1>에서 잘린 말 머리가 나오는 신에 대해) 원래 로타가 작곡한 음악은 왈츠 곡이었는데, 그 사건의 공포에 반어적인 방식으로 쓰였죠. 감미로운 회전목마 반주 음악이었어요. 좀 더 충격적인 음악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말 머리 장면에서 니노가 작곡한 음악은 A(주제)-B(변주)-A식 구성이었습니다. 저는 음악을 복제한 다음 주제부를 통째로 복사본에 삽입하여 중첩시켰습니다. 그래서 음악은 A에서 시작하지만, 다음은 A+B가 동시에 연주되고 그 다음은 B+A가 되죠. 시작할 때는 같은 곡이었지만, 월츠(등장인물)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듯 두 음악이 서로 부대끼면서 거슬리는 소리를 냈어요. 광기가 점차 고조되다가 (…) 이불을 들추는 순간 말 머리가 있는 거죠.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 1>. |
때로 음악이 빛에게 딸림음을 내어주어 그 둘이 화음을 이루는 순간도 마주한다.
M : 영상과 소리의 화학작용 (…) <지옥의 묵시록>의 사운드 작업 때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한 버전의 '발키리의 기행'을 영화에 썼는데 데카 레코드사에서 저작권 허락을 거부했어요. 솔티가 지휘한 버전과 박자가 대강 맞는 라인스도르프의 레코딩을 변환하여 영화에 입혀서 틀어봤는데 10초 만에 영 아니라는 걸 알겠더군요. 파란 바다의 신맛 같은 느낌이 솔티의 금관악기 소리와(는)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냈어요. 하지만 라인스도르프 레코딩에는 그런 금관악기의 맛이 없었습니다. 부드러운 베개 같은 느낌이었고 그 결과 바다의 파란빛이 죽어 보였죠. 바다 색깔이 이전같이 보이지 않았어요.
연주가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형태를 장담할 수 없는 빛과 음악과 시간의 덩어리.
O : (…) 당신은 전달받은 촬영분을 교묘하게 편집함으로써 3차원의 수준에서 또 다른 종류의 안무를 짠 거죠.
M : (…) 제가 영화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바도 그런 겁니다. 소리, 영상, 연기, 의상, 미술, 촬영 등 모든 요소가 다 함께 복잡하면서도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만드는 거죠. (…) 만일 영화에서 내리는 결정이 모두 사전에 구체적인 말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면 영화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성찰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렇듯 빛과 소리와 시간이 서로 엮이고 풀리기를 반복하며 구축한 아름다운 구조물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월터 머치는 정말로 바흐나 젤렌카가 푸가에 대해 말했을 법한 이야기를 한다. 즉, 모른다. 영화는 제작 단계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연주 또는 상영이 끝난 뒤에도 푸가의 '개념'은 끝없이 나아가며, 감상자는 어느새 각 푸가 주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끝없이 솟아올라간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김으로써 우주의 어떤 지점을 바라보는 것이다. 푸가 또는 쇼트는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로켓 또는 은하철도이며, 관객들은 결국에는 우주로 향하는(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도할 우주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월터 머치는 그저 로켓을 더 튼튼하고 정확하게 만들 뿐이다.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
월터 머치에게 영화는 객관적으로 증명해 내기에는 너무 복잡한 화학 반응이다. 그는 영화당 평균 천 개에 가까운 쇼트를 만들어 붙이고 거기에 마치 조명처럼 사운드의 윤곽을 입히면서도 그 효과의 종착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늘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보는 것은 영원한 과정이다. 너무나도 많은 우연들과 예기치 않은 발견들,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들, 수면에 던져진 돌처럼 앞뒤로 이어진 쇼트들에 마음의 물결을 일으키는 눈 깜빡할 정도의 짧은 순간들….
그런데 월터 머치는 관객들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건 바로 그 모호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화 안의 복잡한 서사 및 편집 구조에는 객관적인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빈 공간이 발생하는데, 각각의 관객이 그 빈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비로소 그 영화는 관객의 일부가 된다. '이 영화는 나를 위한 영화'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쇼트건 인물이건 이야기건 간에 쓸모없는 건 죄다 날려버리는 냉정한 영화 제작진이 마치 성소처럼 남겨둔 빈 방. 1인실. 여기에 누군가가 들어와 각자의 문을 잠그면, 그때 영화는 완성된다.
O : 책이나 그림에서도 모호한 성질을 살려야 할 필요가 있는데, 영화는 그런 모호함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말하셨지요. 하지만 (사운드) 믹싱 때는 그 모호함을 '완전하게' 만드는 거군요.
M : 압니다. 모순이죠. 영화가 완성되고 나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면 그 모순은 유익합니다. 영화가 완성된 뒤에도 또 다른 단계가 남아 있기 때문이죠. 관객의 감상이라는 단계가 그것입니다. 관객도 영화 창조의 공모자예요. 만일 영화에 남아 있던 모호함을 최종 믹싱 단계에서 모두 없애버린다면 그건 영화에 해를 끼치는 일이죠. 또 하나의 모순은 그런 한편으로 모든 문제를 기필코 풀리라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화는 모호해야 하니까 이것은 미제로 남겨두겠어' 하는 태도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영화라는 유기체에 출혈이 생길 겁니다. (…) (영화 제작의) 각 단계마다 미제를 남겨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열심히 작업하면서 중요한 문제 하나는 미제로 남기겠다는 은밀한 희망을 품어야 하죠. 하지만 영화가 완성되기까지는 그 문제의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영화는 그 작품 안에서는 답을 구할 수 없는, 작품 자체가 제기하는 문제로 정의되고, 그 문제는 관객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 거죠.
모호함을 '정확히' 추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마이클 온다치와 월터 머치는 정답을 지시하는 대신에 그 구역을 둘러싸고 벽을 구축한다. 온다치와 월터는 영화가 추구하는 지점에 대해 끊임없는 비유와 영감을 쏟아낸다. 개념들 사이를 도약하는 시, 음악들, 수학과 자연과학, 주역, 그림, 꿈, 소설들과 온갖 산문들….
<월터 머치와의 대담>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의 대신에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이 어째서 그렇게 인상 깊을 수 있었는지, 또 그 순간과 닮은 다른 종류의 예술 작품이 어떻게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말함으로써 보다 즐겁고 풍요로운 독서를 보장한다. 그리고 이 천재 편집자가 툭툭 던지는 기발한 발상 앞에서 웃음과 감탄이 동시에 새어나올 때면, 이 즐거운 영화 책이 여느 무거운 영화 이론서 못지않게 많은 것들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영화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을 꼽아달라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 사람은 나는 처음 보았다.
"에디슨, 베토벤 그리고 플로베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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