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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커다란 X알?" '지적 허세'에 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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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커다란 X알?" '지적 허세'에 속다!

[프레시안 books] 뱅상 세스페데스의 <남자답지 않을 권리>

이십 년쯤 전이다, 하이텔을 무대로 남성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친-여성주의적인 독설로 악명을 떨치던 무렵, 나를 불편해하던 남성들의 숱한 비아냥거림 가운데 꽤 인상적인 것 하나가 떠오른다.

"그렇게 여자들한테 아부하면 좋아해 준대?"

쉽게 풀자면 "여자 꼬시려고 별 짓 다 한다"는 게다. '혹시나' 싶어 '여친만 생긴다면 페미니스트 코스프레인들 못 할까'라는 생각에 눈을 반짝일 분들이 있다면, 이 비아냥거림은 과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으니 일찌감치 꿈 깨시라고 전하고 싶다. 물론 그런 발언과 활동 덕분에 내게는 꽤 든든한 우정을 오래 이어온 '여성인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그뿐이다. 오히려 내가 그들의 '친구'일 수 있었던 건, 그들에게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남자로서 어떤 여자에게도(심지어 정서적으로 아주 친밀한 '친구'에게조차도) 전혀 '섹시'하지 않았다.

그 쓸쓸함에 관해서는 내 책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삼인 펴냄)에 실린 표제글에 이미 시시콜콜 토로했으니 새삼스레 보탤 말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그다지 부끄러울 것도 없지만 자랑스러울 건 더더욱 없는 개인사적 소회를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 뿌리듯' 다시 떠올린 건, 순전히 제목에 낚여 펼쳐든 <남자답지 않을 권리>(고광식 옮김, 명랑한지성 펴냄)의 책장을 넘기며 저자 뱅상 세스페데스에게 느껴야 했던 짜증 때문이다.

이 책은 첫 구절부터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어디에 있을까? 올바르게 처신하고, 앞뒤 사정을 알고 이야기하고, 여자를 달랠 줄 알고, 아이를 흔들어 재울 줄 아는 진짜 남자 말이다. 싸움을 멈추기 위해 곧잘 싸움에 끼어들고, 결론에 이르기 위해 토론에 곧잘 참여하고, 의미의 다양함과 사랑의 강렬함에 곧잘 빠져드는 밀도 있고 용기 있는 그런 남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 <남자답지 않을 권리>(뱅상 세스페데스 지음, 고광식 옮김, 명랑한지성 펴냄). ⓒ명랑한지성
고도의 반어법인가 싶었다. 내가 알기로 그런 '남자'는 없다. 더러 드물지 않게 그런 '사람'은 있을 테고, 우연히(!) 그들의 성별이 남성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온 한국 사회에서 그런 사람은 단지 그 자체만으로는 '남자'로서 성적 매력을 가지기 어렵다. 혹시 프랑스에서라면 그럴 수 있을지, 아니면 프랑스에서조차도 실은 불가능한 저자만의 몽상일지는 내가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와는 거리가 먼 얘기인 건 분명하다.

그런데 반어법이 아니었다. 온갖 '인간적인 장점'을 늘어놓고 그것이 진짜 '남자다움'의 본질이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도 아니고) 전제다. 한마디로 간추리자면, '인간적인 매력'들이 남자를 남자답게 하고 여자를 여자답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성성의 근원인) 불알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인간 존재는 대체로 여자들"이고 "여자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불알"이라는 대다수 남성은 물론이려니와 최소한의 자의식이라도 있는 여성들이라면 고스란히 동의하기 상당히 불편한 '귀여운' 비약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결론은 (허망하게도) 그러니까 '진짜 남자'가 되어 남성적 매력을 회복하고 남성성의 위기를 넘어서자는 거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겠고, 굳이 동의하지 못할 것도 없는 그냥 '뻔한' 얘기다. 아니 나도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현실이었으면 정말 좋겠다. '근사한 남자'가 되기는 애당초 포기하고 그저 '근사한 인간'이 되자고 작심하고 살아온 삶에 큰 부끄러움이 없으니 말하자면 (내 입으로 말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제법 '괜찮은 인간'의 범위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을 게다. 그런데 그게 바로 (여성을 성적으로 매혹하는) 남성적 매력이 없지 않다는 뜻이라니 세상에 이런 '복음'이 또 있을까. 그게 그저 저자의 사변적 몽상이 아니라 프랑스의 현실이라면 망명이라도 가고 싶을 판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신 승리'에 자족하자는 게 아니라면, 저자의 '백 번 옳으신 말씀'에 들떠 내가 '나야말로 진짜 남자'라고 믿건 말건, 내게 남성적인 매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이 책에서 읽어낸 건, 이미 성별적으로 구조화된 세상을 어떻게 '인간화'할 것인가에 관한 의미 있는 전망의 단초가 아니라, 진지한 독자들에게라면 낯설지 않을 프랑스 철학자들의 악명 높은 '지적 허세'뿐이다. 모르긴 해도, 제목에 낚여버린 나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당혹스러웠을(번역서 출판 관행상, 책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지 못한 채 얄팍한 요약이나 두루뭉술한 리뷰에만 낚여 덜컥 계약을 하고 심지어 번역까지 완료된 상태에서 '낚였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는 일반 독자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저작료와 번역료를 허공에 날리고 출간을 포기하는 용기를 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출판사에는 차마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은 진지한 독자의 서재에서가 아니라 지독한 변비 환자의 화장실에서나 쓸모를 찾을 수 있을 성싶다. '지적 허세'를 소비하기에 그보다 어울리는 상황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남자답기 않을 권리>라는 상당히 유혹적인 제목에서 기대한 내용은, 가령 (폴 아케르만 지음, 이정순·변정수 옮김, 사람의무늬 펴냄)의 말미에 붙였던 '보론'에서 내가 언급했던 다음과 같은 내용을 한층 심화시킬 수 있는 더 예리한 통찰이나 그것을 좀 더 설득력 있게 대중화할 수 있는 더 풍부한 구체적 논거였을 게다.

"남는 것은 악순환이다. 남성 동맹이 강화될수록, 여성들은 여성에게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남성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자신의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 '남성들에게조차 막연하기 짝이 없는' 일자리를 놓고 다투기보다는 점점 더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경제력을 '기득권'으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남성들에게 정서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대다수 남성들의 피해의식을 증폭시키며 남성 동맹을 강화한다. (…) 결국 양성이 화해할 길을 견고하게 가로막고 있는 이 남성 동맹을 해체하거나 최소한 완화할 수 있는 열쇠는, 대다수의 남성과 대다수의 여성이 놓여 있는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있다. (…)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기회가 적어도 지금보다 공평해지는 사회경제적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그야말로 '생물학적 차이'에 기초하는 남성의 '성적 매력'이나 여성의 '성적 매력'이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우연찮게도 이 책 역시 프랑스산 '남성성' 담론을 다루고 있는데, 굳이 내가 '보론'을 붙인 것은 반여성 캠페인이 이미 일상적으로 전면화된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의 내용이 엉뚱한 방향으로 현실을 오도할 위험이 다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시차를 두고 번역 출간된 두 프랑스산 '남성성' 담론은, 물론 책의 성격도 저자의 포지션도 꽤 다르고 문제에 접근하는 스타일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한 가지 의미심장한 공통 배경을 드러내고 있다. 다름 아닌 '68혁명', 또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한 세대를 휩쓴 '페미니즘의 물결'이다. 여전히 프랑스 사회의 속내를 전혀 알 길이 없는 나로서는, '페미니즘의 조류 속에 양성 사이의 관계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남성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불가피해졌다는 식의 진단이 프랑스에서는 있을 수 있을 법한 '사실'인지, 아니면 한국 사회에서 반여성 캠페인이 일상화되는 과정이 그러했듯이 남성들의 '엄살'에 지나지 않는 허구적 전제일 뿐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폴 아케르만 지음, 이정순·변정수 옮김, 사람의무늬 펴냄). ⓒ사람의무늬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성다움'이란(또는 그 짝으로서의 '여성다움'이라 해도), 누가 어떤 목적에서 무슨 변설을 늘어놓는지와 무관하게,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즉 '진짜 남자' 따위는 없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남자답다고 여기는(혹은 느끼는) 것이 '남자다운' 것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조건과 문화적 배경을 간과하고서 '무엇이 남자다운 것인가'를 설명해낸다는 건 불가능하거나 공허하거나(<남자답지 않을 권리>)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좀 에둘러 설명하자면 이렇다. 가령 <남자답지 않을 권리>라는 제목에서 내가 기대했던 내용, 또는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자답다'(또는 '여자답다')는 언설의 내용을 구성하는 핵심은, 결국 '성(별) 역할(gender role)'에 깊이 닿아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설명하려는 '남성다움'(또는 심지어 '진짜 남자'라 해도)은 섹슈얼리티(sexuality), 말 그대로 수컷-인간으로서 암컷-인간(이든 수컷-인간이든)을 매혹할 수 있는 속성인 듯하다. 현실적으로 '성(별) 역할'이 섹슈얼리티의 핵심적인 영역을 구성해내는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는 섹슈얼리티를 억압하고 식민화하는 '젠더'의 질서를 어떻게 해체하느냐이지 실체조차 아리송한 섹슈얼리티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이 아닐 터이다. 어쩌면 '남자가 여자에게 설명하다'(L'homme explique aux femmes)라는 원서의 제목을 문면 상 정반대의 뜻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남자답지 않을 권리'로 바꿔놓은 것도, 이러한 괴리에 대한 출판사의 고민이 반영된 결과일 터이다.

설령 프랑스에서 페미니스트의 활약으로 사회경제적 조건에 (근본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 사실이고, '68혁명'의 세례를 받은 '성 해방'의 역사적 경험이 무시할 수 없는 문화적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정황을 의심할 수 없다 해도, 그래서 그것을 전제로 펼쳐지는 통찰이 아무리 예리하고 심지어 전향적이라 한들, 그건 그저 지구 반대편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요구되는 '남성성' 담론의 방향은 (이 책의 원서와 번역서 제목이 달라진 방향이 시사하듯) 그 의제를 단호하게 폐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글(의 '보론')이 공식 출간되는 책에 실릴 글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2010년대 한국, 여성과 남성은 왜 화해할 수 없는가'라는 점잖은(?) 제목 대신 내가 그 글을 통해 하려던 말을 이렇게 요약했을 것 같다. '멍청아! 문제는 '젠더'가 아니라 '계급'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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