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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왜 '안기부 불법도청' 공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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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은 왜 '안기부 불법도청' 공개했을까?

[분석] 노무현-박근혜, 이렇게 달랐다

2005년 8월 8일,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 섰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X파일' 사건 때문이었다.

1997년 9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삼성전자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나눈 사적 대화를 녹음한 파일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건이다. 녹음 파일에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이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를 비롯해 정치권 및 검찰 고위직에 불법 정치자금과 떡값을 전달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정관계 인사들을 돈으로 주물럭거리는 '삼성공화국'의 실체에 세상이 경악했다.

이 사건의 파장은 두 갈래로 번졌다. 대화 내용에 담긴 정권-재벌-언론의 '3각 커넥션'이 첫 번째다. 진보진영이 이 문제에 집중했다. 얼마 전 이 문제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당시 의원이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한 것도 그래서였다. 두 번째는 이 녹음파일이 수집된 과정에 안기부의 불법도청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국가 정보기관이 불법적으로 도감청한 사실이 공개됐으니 이 역시 파장이 간단치 않았다. 첫 번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보수언론과 당시 한나라당이 '물타기' 용으로 이 문제에 집중했다.

전자는 'X파일'에 연루된 홍석현 주미대사가 7월 26일 사의를 표명함으로써 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사건의 실체는 특검 수사를 통해 규명하자는 쪽으로 수렴돼갔다. 그러나 '안기부 도청' 사건은 대단히 복잡미묘하게 발전해갔다. 안기부의 불법 도청이 김영삼 정부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부에서도 자행됐다는 걸 국가정보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스스로 밝혔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발표 사흘 뒤,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가진 건 그래서였다. 기자들의 관심은 노 대통령의 지시로 국정원이 DJ 정부의 도청 사실을 공개한 배경에 있었다. 사건의 본질을 덮으려는 거 아니냐는 음모론적 비판까지 나온 터였다. 청와대 참모들도 "사실을 그대로 공개할 경우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사람들 중에 곤란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노 대통령을 만류했다.

노 대통령은 '덮고 가자'는 주변의 설득에 이렇게 응대했다. "곤란한 사람 있고 없고 간에 지금 내가 덮으라 했다가 뒤에 덮으라고 한 사실이 발각되는 날, 누가 나를 지켜 줄 것이냐.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비서실장이, 비서실장의 지시를 받고 국정원장이, 국정원장이 그다음 누구에게 지시해서 덮으라고 줄줄이 지시를 하게 될 텐데, 그 지시를 받는 사람이 수십 명이 될 텐데 그것을 어떻게 누가 감당을 하나.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노 대통령의 설명은 이어졌다. "나는 대통령이지만, 내가 모르는 진실을 그냥 파헤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터져나와버린 진실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그리고 부닥친 진실을 내가 비켜갈 수도 없다. 적어도 내가 부닥친 이상 최선을 다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 그것밖에 없다. 지금 내가 그 의무를 위반하고 사실을 덮어버린다고 하면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를 위해서 일한 참모들이 다음 정권에서 또 불려 다녀야 되지 않나? 이 악순환을 어디선가 끊어야 된다."

정권-재벌-언론의 커넥션을 덮으려는 의도 아니냐는 의심엔 이렇게 설명했다. "도청문제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고 본질적인 문제다. 도청은 정경유착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그 인권침해가 국가권력에 의해서 국민에 대해서 가해지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이고 그러므로 이 문제야말로 정말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이 없도록 조치해야 된다. 국가권력에 의한, 그것도 조직적인 국민에 대한 범죄행위,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다. 정경유착보다 가볍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더 무겁게 본다."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틀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갑작스레 입원했다. 언론은 '병상 정치'라고 썼다. 노 대통령에 대한 DJ의 극도로 불편한 심기가 표출된 장면이다. 그럼에도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 신건 전 원장이 결국 검찰에 구속됐다.

2005년 박근혜, 뭐라고 했었나?

안철수 의원은 최근의 국정원 사태와 관련해 "통치권자의 선의가 통할 때만 통제가 가능한 조직으로 방치했다"고 했다. '민주정부' 시절의 국정원 개혁 실패를 지적하며 한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개혁이 실패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한, 그것도 국민에 대해서 가해지는 범죄행위"를 얼마나 무겁게 여겼는지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도 자기와 무관한 YS-DJ 정부 때 일어난 일을, DJ와의 정치적 갈등을 무릅쓰고 공개해버렸다. 말 그대로 '선한 의도'였다.

'선의'를 가진 정부마저 실패했던 국정원 개혁이다. 왜 그럴까? 노무현 정부 초기 청와대 국정원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국정원이 더 이상 권력기관으로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근본적인 시스템을 만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해외 및 대북 정보 기능과 국내 보안 기능을 분리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문 교수를 비롯한 안보부서 위원들이 이를 반대해 결국 '통합형 국정원'이 유지됐다. 문 교수는 최근 "노 대통령이 옳았다. 그때 분리형으로 갔어야 했다"고 했다.

ⓒ연합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에 '셀프 개혁'을 주문해 논란이다. 청와대 주변에선 'X파일' 사건 당시 박 대통령이 얼마나 국정원 개혁을 강조했는지 알리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에게서 확인되는 국정원 개혁의 '선의'를 박 대통령에게서 발견할만한 단초는 없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였다. 그때 한나라당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국면을 '안기부 도청' 사건으로 초점 이동시키려 무지 애를 썼다. 박근혜 대표가 앞장 서 청와대를 향해 여러 번 말을 했다. "어두운 과거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 "국정원이 국가를 위해서만 일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고 했다. 한나라당과 국회가 주도해 법을 바꿔놓겠다는 취지의 발언도 여러 번 했다. 지금처럼 정부와 국정원이 알아서 개혁안을 내보란 말은 한 번도 없었다.

한마디로 정부와 국정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2002년 3월 이후(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도청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려면 국민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 상황에 대입하면, 원세훈 국정원의 국내정치 관여와 대선 개입, 남재준 국정원장의 '셀프 기밀 해제' 등이 분명한 사실인데도,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는커녕 버젓이 국정원에 개혁을 주도해보라고 백지위임한 것이다. 자가당착이다.

문정인 교수의 지적대로 국내 정보 수집에 광적인 집착을 가진 국정원이 알아서 국내파트를 해체할 리 없다.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새누리당에선 '종북 척결'을 이유로 국내 파트의 존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간다. 국정원 개혁에 관해 야당 대표 시절 했던 자신의 발언을 버젓이 뒤집은 박 대통령이라면, 통치권자의 '선의'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노 전 대통령의 표현에 빗대면 "터져나와버린 진실을, 부닥친 진실을" 덮고 가겠다는 거다. 국정원 개혁, 물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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