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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돌연한 죽음, 계속되는 끈끈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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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돌연한 죽음, 계속되는 끈끈한 관계

[꽃산행 꽃글] 풍장(風葬) 혹은 화장(花葬)

때는 3월 중순. 오늘의 꽃산행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여기는 진도. 그 중에서 운림산방(雲林山房) 뒷고개 너머 양동 마을. 보드랍던 햇살이 정오를 지날 무렵에는 제법 화끈거리는 기운을 얼굴에 마구 칠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수직의 직사광선이었다. 아무런 매개(媒介)없이 바로 직방으로 내 얼굴에 내려꽂히는 햇살. 태양과 나와의 관계는 이렇게 직접적이다. 조금 따갑기는 하지만 이 또한 신비라면 아주 찬란한 신비이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서울까지는 너무나 먼 길. 이제 점심을 먹고 장비를 점검하고 등산화를 풀었다가 다시 조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 아쉬운 것이 있나 해서 마을 입구에 붙은 동네 어귀를 마지막으로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어디를 가나 익숙한 두둑한 밭두렁이 있고 수로가 있고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다. 그리고 밭 가까이에는 이 밭을 개간했음직한, 그래서 도무지 죽어서도 밭을 떠나서는 살 도리가 없는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밭에는 작년의 심었던 작물이 모두 뽑혀져 나간 흔적만이 요란했다. 올해 무엇이 이 밭을 차지할까. 나로선 도무지 요량이 가질 않았다. 과연 밭은 텅 비어 있는 것일까. 문득 정현종 시인의 '한 숟가락 흙 속에'가 떠올랐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5천만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걸!


입술이 근질근질해지는 이 시의 한 구절대로 "흙 한 숟가락 속에는 수억만 마리의 세균이 우글"거린다는데, 저 넓은 밭에 살고 있는 생명들이란 대체 얼마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도대체 눈치챌 줄 모르는 나에게 심어진 식물이 없는 밭은 텅 비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내게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 나의 눈은 텅 빈 밭을 가로 질러 울타리로, 그 중에서 한 그루 활짝 피어있는 매실나무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 진도 어느 밭 울타리에 핀 매실나무. ⓒ이굴기

울타리라고 하기에는 그냥 허술한 숲풀 더미였다. 그중에는 가시가 날카로운 탱자나무도 있었다. 아마도 철조망 역할을 기대하며 밭 주인이 심어논 것 같았다. 탱자나무는 어릴 적 내 고향 마을에도 여러 그루가 있었다. 노란 열매가 열리면 가시로 따서 맛을 보기도 했었다. 귤하고는 또 다른 아주 시큼한 맛!

매실나무는 그 탱자나무하고 대각으로 맞보는 곳에 활짝 피어 있었다. 제법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만개한 매실나무 아래로 이끌리듯 갔다. 아직 날씨가 활짝 피지 않은 탓에 진도의 야생화들이 제대로 꽃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참에 보란 듯 온몸과 속살을 몽땅 드러내 놓고 있는 매화를 보니 통쾌한 맛이 저절로 일어났다.

'발바닥에 오르는 기막힌 탄력을' 느끼기엔 등산화가 너무 고급이었다. 먼지만 폴폴 일으키며 매실나무 아래로 갔다. 더러 두더지와 개미들이 건설한 푹신한 탄성을 두꺼운 등산화 밑바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연신 톡톡 분지르기에 바빴다. 매실나무는 키가 나보다 엄청 컸다. 매화의 꽃잎에서 번져 나오는 은근한 빛이 햇빛에 거을린 나의 피부로 내려앉았다. 따가운 기운이 은근히 중화되는 것 같았다. 심심하던 매실나무도 아연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나른한 욕정(欲情)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초로의 사내를 맞이하여 한바탕 희롱이라도 하자는 것일까. 어쨌든 모처럼 폭신한 매화 기운에 폭 둘러싸인 기분이란!

나무 아래 가까이에서 안 사실이 있다. 매실나무에게는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덩치는 나보다 엄청 작았지만 키는 나보다 훨씬 큰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가 그저 시선으로나마 닿을 수 있는 곳에서 매화를 희롱하며 즐겁게 놀고 있지 않은가. 꼬리를 씰룩거리며 날개를 붕붕거리며 공중을 꿀렁꿀렁거리며. 하늘을 온통 장악하고 돌아다니는 그것은 여러 마리의 꿀벌들!

나는 내 키만 높이의 매화와 꿀벌들을 겨냥해서 연신 카메라를 눌러댔다. 그 중 한 녀석은 그리 높지 않은 꽃에 들러붙어 꿀을 따고 있었다. 한참을 찍다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만발한 꽃잎 중에서 벌들은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을 찾아 꽃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바쁜 게 보통이다. 그 고운 꽃에도 금방 싫증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벌은 일편단심의 정분을 실천이라도 하는 양 한 꽃잎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퍼뜩 나는 알아차린 것이었다.

벌은 뒷다리와 가운뎃다리로 매화의 꽃잎을 꽉 붙들고 있었다. 앞다리로는 수술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더듬이는 암술과 수술이 밀집된 꽃의 중앙에 꽂아두고 있었다. 말하자면 꿀벌의 얼굴이 꽃잎에 폭 파묻힌 형국이었다. 그리고 매화 꽃잎이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며 벌어지듯 꿀벌의 날개는 몸통을 보호하듯 벌어져 있었다. 보쌈이라도 하듯 금방이라도 매화 한 송이를 떼 매고 붕붕거리며 날아갈 것처럼!

▲ 매화와 꿀벌. ⓒ이굴기

그러다가 나는 퍼뜩 알아차린 것이었다. 지금 꿀벌이 처한 상태를. 꿀벌은 꿀을 따고 있는 게 아니었다. 벌은 꼼짝도 아니 했다. 나의 카메라 소리는 들은 척도 아니 했다. 조용하고 조용했다. 아아! 벌은 꿀을 따다가 꽃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꽃자리가 곧 지독한 치사(致死)의 현장이었다. 이제 녀석은 그토록 탐하던 매화 꽃잎에 죽어서야 꽃잎이 되어 꽃잎처럼 붙어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를 뭐라고 해야 하면 좋을까?

▲ 다리 반쪽을 잃고도 매화에 매달린 꿀벌. ⓒ이굴기

아마 이런 상태로 여러 날이 흐른 것 같았다. 꿀벌과 매화는 묘한 관계이다. 주고받는 게 보통 사이가 아니다. 그 둘 사이에 나 같이 사심 많은 것들은 끼어들 수가 없다. 슬쩍 가만히 있는 꿀벌의 옆구리를 건드려 보았다. 꿀벌의 다리가 속절없이 먼지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부스스 떨어지는 꿀벌의 신체 일부를 바람이 받아 멀리멀리 데리고 갔다. 바람은 마지막 예의인양 매실나무 아래에는 그것을 흩뿌리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풍장(風葬)일 것이다. 이제 꿀벌은 왼쪽은 모두 바람 속에 보내고 오른쪽 다리들만 남았다. 그래도 생시(生時)의 균형을 잃지 않고 굳건히 매화를 붙들고 있었다. 아마 나 같은 무지막지한 손길을 타지 않는다면 서서히 애틋하게 닳아질 것이다.

여전히 꿀벌은 매화를 놓지 않고 있었다. 매화 또한 꿀벌을 떨어내지 않았다. 꿀벌의 돌연한 죽음 이후에도 둘의 끈끈한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햇살이 녹이고 비가 씻어낼 때까지 둘은 이런 관계를 유지할 것 같았다. 바람이 휭 불었다. 매화와 꿀벌이 그네라도 타듯 한 몸으로 휘청거릴 때 꿀벌 한 마리가 다음 꽃을 찾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날아갔다. 이윽고 나도 발길을 돌려 둘의 곁을, 매실나무 아래를 떠났다. 몇 발짝 못 가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머릿속으로 화장(花葬)이란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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