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 방북은 지금까지 대북 공조 체제를 유지해온 미국과 한국에 사전 통고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예민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만큼 일본 정부는 '애매함'의 태도로 일관하기도 했다. 처음에 아베 신조(安部晋三) 총리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 장관은 그의 방문이 공식적인 방문인지, 개인적인 방문인지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방의 참여 직은 우리의 청와대 수석에 버금가는 막중한 공직이며, 이이지마 본인도 방문 결과가 공식적으로 관방 장관과 총리에게 보고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북한에서 북일 국교 정상화 협상 대표인 송일호(宋日昊) 대사, '국가 원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金永南) 그리고 '대일 창구'인 조선노동당비서 김영일(金永日) 등 거물급 정책 결정자들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북한에서는 고립국면의 타개를 위해서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개하고 나섰다. 그 상황이 되고서야, 아베 총리는 참의원의 백진훈(白真勲, 하쿠 신쿤) 의원의 질의에 이이지마의 방북이 납치 문제와 북일 관계의 진전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고이즈미처럼 방북할 수도 있음을 밝혔다. 물론 한미일 대북 공조 체제 때문에 일본 정부는 아직 한발 빼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지만, 이이지마의 방북은 향후 일본 정치의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이이지마 이사오 내각관방 참여(參與). ⓒ서남재단 |
고이즈미의 방북도 처음에는 납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고 외교적, 국내 정치적 리더십을 강화하려는 적극적 목표를 가졌다. 미국의 의중을 앞서 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나 당시 아베 관방부 장관 등의 정치화 전략으로 북한 압박의 경색된 분위기가 굳어지고 이 목표는 실종되어 버렸다. 납치 문제로 인한 반북 압박 여론은 고착되었고 이는 다시 우익 정치의 대중적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현재 일본은 종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문제, 독도 문제로 한국과 관계가 좋지 않고, 센가쿠열도(댜오위다오) 문제와 야스쿠니 문제로 중국과도 갈등 관계다. 나아가 헌법 문제, 무라야마 담화, 후텐마 미군 기지 문제로 미국과도 관계가 좋지 않다. 유명한 저널리스트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総一朗)는 아베의 방북과 납치 문제 해결이 일본의 교착된 외교 국면을 타개할 호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익화와 반북 정치의 선두에 서있는 아베 총리가 현재의 북일 관계를 전향적으로 타개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이지마의 방북을 올 7월 참의원 선거를 위한 선거용 카드라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전 레바논 대사 아마키 나오토(天木直人)는 우익 전략 궤도를 달리는 반북 정권이 북일 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할 리는 만무하며, 참의원 선거를 위한 정치적 이벤트 정도로 방북 카드를 활용할 것으로 분석한다.
현재 아베 정권은 7월 참의원 선거를 전후해 우호적 개헌 조건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참의원 선거 후 소위 96조 개헌을 이루어 과반수 개헌 의결 정족수로 바꾸고, 추후에 집단적 자위권과 국가주의적 경향을 용인하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기류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 국회의 반대 기류는 물론이고, 편법적 개헌 시도에 대한 시민의 저항도 거세지고 있다.
도쿄 대학의 구치 요이치(樋口陽一) 명예교수, 와세다 대학의 미즈시마 아사호(水島朝穂) 교수, 게이오 대학의 고바야시 세츠(小林節) 교수 등 유명한 법학자들이 주도한 '96조(를 지키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 9조 개헌과 집단 자위권 회복의 이론가이던 게이오 대학의 고바야시 세츠 교수조차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의 편법적 개헌 술책이 도리어 개헌파들 내부조차 동요시키고 있다. 이 불안정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북한 카드'를 가동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이지마의 방북은 실질적인 북일 관계의 개선보다는 선거에서 인기를 얻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퍼포먼스로 끝날 수도 있다.
한편, 이이지마의 방북은 고이즈미 이래 전개되어온 일본 외교 정치의 새로운 단면인 '인물 고갈' 현상을 잘 보여준다. 1990년대 후반까지 북일 관계 개선은 사회당 계열의 실질적 도움을 받아, 자민당 보수 본류의 거물 정치가들이 주도해왔다. 가네마루 신(金丸信), 노나카 히로무(野中広務) 등과 같은 중량급 정치가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외교 라인도 소위 아시아파라 알려진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의 또 다른 주류 계보가 중심이 되었다. 이 때 대북 정책은 포용과 타협, 양보 등 유연한 정치 외교 구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 북일 외교는 고이즈미 때 대대적으로 전환되었다. 초기 포용의 면모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배제와 강제의 요소가 중심이 된 공격적 대북 외교가 나타난 것이다.
아베와 같은 반북 우익 정치가가 정치 상황을 주도하고, 외무성도 자기 주장과 공세적 성향을 강화했다. 이 상황에서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등 일부 외무성 관료의 상대적 조정 능력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정치력 공백 현상이 발생했다. 이 정치력의 공백을 메운 이가 '정무 비서'로서 존재감을 키워온 이이지마였다.
이이지마는 트럭 운전사의 아들이라는 지극히 평민적인 출신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고이즈미의 정무 비서로서 스스로의 정치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일본의 라스푸틴(Rasputin)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은밀한 조정역과 자문역을 해왔다. 사상적으로는 아베와 우익적인 지향성이 일치하며, 이것이 고이즈미와 결별한 이후 아베의 심복으로 재기용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04년 방북은 공식적 외교 채널을 우회해 이이지마가 허종만(許宗萬) 조총련 의장과의 개인 네트워크를 통해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방북도 정식 외교 루트보다는 이 개인 네트워크가 가동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번 방북은 아베, 스가, 이이지마 등 세 사람만에 의해 비밀스럽게 추진되었다.
북일 외교 정치에 비서 출신 정무직이 전면에 나서는 '비서 정치'의 면모가 발생했다. 한편 정치가들의 커다란 결단이나 정국 구상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아가 유연한 외교 라인도 작동할 수 없다. 소위 '보통 국가'라면 가져야할 외교 구상과 전략,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협상 제도가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은폐된 책략들과 비밀스러운 비공식적 네트워크의 존재감이 과잉되는 것이 구조적으로 허약한 오늘날 일본 정치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화요일 동시 게재합니다. 송주명 한신대학교 교수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89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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