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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타고르에 답할 때 "남아시아를 보라!"

[동아시아를 묻다] 서천(西天) : 아힘사와 대동

서방(西方)과 서천(西天)

5월 19일 리커창 총리가 인도 뉴델리를 방문했다. 총리 취임 이래 첫 순방지로 인도를 선택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취임 직후 러시아를 방문했었다. 시진핑-리커창 체제 하 중국의 외교 방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 맞서 유라시아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히말라야 너머의 악수'로 비유된 이번 회동에서 리커창은 중국-인도-미얀마-방글라데시를 잇는 경제회랑을 제창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구상의 발원지가 베이징이 아니라 쿤밍이라는 점이다. 1990년대 말부터 운남성의 학술계는 운남성과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경제회랑을 궁리했다. 이 지역 발 구상이 중앙 정부 정책으로 수렴된 것이다.

운남성 성도인 쿤밍에 인도, 미얀마, 방글라데시 대표단이 모여 '쿤밍 선언(昆明倡议)'을 발표한 것은 1999년이다. 이후 매년 회의를 개최하며 구체적인 구상을 가다듬었다. 파키스탄, 네팔, 부탄 등 더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을뿐더러, 나라마다 다양한 정당 대표들이 함께 집결하고 있음도 이례적이다.

마침 5월 말이면 쿤밍과 미얀마를 잇는 석유 및 천연가스 수송관도 완공된다. 중국의 서남 개발과 남아시아 경제회랑이 접목되고 있는 것이다. 신장이 중앙아시아와 교류하는 허브라면, 동북 3성은 동북아 국가와 협력하는 거점이고, 운남은 남아시아와 합작하는 터전이라 하겠다. 중국 안의 소중국, 지방 정부들의 행보를 주시해야 하는 까닭이다.

물류만이 아니다. 문류(文流)도 트이고 있다. 2010년 발족한 '서천중토(西天中土)' 프로젝트가 발군이다. 유럽, 미국을 거치지 않고 양국의 지식과 문화, 예술의 직접 교류를 도모한다. 서구를 매개하지 않는 아시아 내부의 대화를 강화해간다는 것이다. 학술 회의와 전시회도 개최하고, 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저서 번역도 추진되고 있다. 즉 '서방'(西方)에 가려졌던 '서천'(西天)의 (재)발견을 통하여 인식의 세계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본디 한나라 때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인도는 동방의 정신 세계와 생활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각자 독립과 혁명으로 내달렸던 지난 100년이 낯설었던 것이다. 인도의 탈식민과 중국의 탈혁명의 여로가 '서천중토'로 합류해간 것이라 하겠다. 20세기의 '개화(開化)'를 지나 2000년의 역사와 해후하는 '심화'(深化)의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ARC의 부활

그 '심화'의 단서로 '아시아관계회의(Asian Relations Conference, ARC)'의 부활을 꼽고 싶다. 2009년 재개되어 작년(2012년)에 세 번째 회의를 열었다. 원조는 1947년이었다. 인도의 네루가 주도한 전후 아시아 구상의 단초였다. 그 ARC가 반세기를 지나 복원된 것이다.

어째서인가.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세계 질서의 지각 변동이 ARC의 귀환을 낳았다. 회의 주제도 부합한다. 2009년에는 '부상하는 중국'이었고, 2010년에는 '인도와 GCC 국가', 즉 걸프 연안의 아랍 국가들을 논했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차례로 토론한 셈이다.

1947년에도 그러했다. 네루는 서아시아와 동아시아를 잇는 가교로 인도를 강조했다. 식민 통치로 분리되고 고립되었던 아시아의 재회에 인도가 일조하겠다는 다짐의 표명이다. 인도는 일찍이 이슬람을 비롯한 서아시아 문명을 수용했고, 동아시아의 수많은 학자들과 승려들은 깨달음을 구해 인도를 찾았다.

탈식민 인도의 향도는 그 동/서 아시아와의 긴밀한 교류를 복원하는 데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 가시적 성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시안게임이다. 기존의 극동경기대회(Far Eastern Games)와 서아시아 대회(Western Asiatic Games)를 통합한 것이 현재의 아시안게임이다. 1951년 뉴델리에서 네루의 개막사로 출범하여, 2014년 인천 대회를 앞두고 있다.

작년 ARC의 화두는 '남아시아의 전환'이었다. 선언적 차원을 넘어서 실질적인 지역 통합을 모색한다. 인도와 스리랑카는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고, 파키스탄은 앙숙 인도를 최혜국으로 대우했다.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을 아우른 역내 교역도 부쩍 활발하다. SAEU(South Asian Economic Union) 창설도 시야에 두고 있다.

문화 교류도 못지않다. 특히 남아시아 대학(South Asia University)의 창립이 돋보인다. 2010년 8월부터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6개 과목에 200명 학생으로 출발은 단출하다. 허나 남아시아 통합의 문화적 초석이 되리라는 포부만큼은 당차고 커다랗다.

▲ 1947년 4월 2일, ARC 폐막식에서 연설하는 마하트마 간디. ⓒ이병한

아힘사(ahimsa)와 대동(大同)

원조 ARC는 1947년 3월 23일부터 열흘간 열렸다. 개막 장소는 푸라나 킬라(Purana Qila, Old Fort). 1538년, 무굴 제국기에 건설된 웅장한 고성이다. 행사장에는 아시아 전도가 내걸리고, 참가국들의 깃발이 휘날렸다. 각국 대표들의 퍼레이드에 일만 관객은 열렬한 박수로 환대했다.

축제의 정점은 4월 2일 폐막식이었다. 개막식의 두 배에 달하는 2만 명이 참석했다. 특히 인도의 정신적 스승 간디가 직접 연설했음이 각별하다. 그는 ARC가 아시아가 유럽을, 동방이 서구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 곧 아힘사(ahimsa, 비폭력)로 가는 방편이 되어야 함을 힘주어 역설했다. 사랑과 평화의 고대적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지혜를 빌려온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호치민의 전갈도 울려 퍼졌다. 비록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직접 참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그 곳에 함께 있다며, 아시아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했다. "어두운 밤은 지났다. 새벽을 향해 전진하자"는 하노이의 외침에 뉴델리는 환호와 갈채로 화답했다.

ARC는 고무적인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949년 중국 난징에서 재차 만나기를 약속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 사이에 전개할 사업 구상들도 야심찼다. 아시아 백과사전을 편찬하기로 했고, 인도와 중국은 대학 교류도 모색했다. 아시아 문명의 양대 축이 솔선수범하여 아시아 르네상스를 일군다는 취지였다.

네루의 정치적 기획의 뿌리에는 타고르의 구상이 있었다. 일찍이 타고르는 서구의 대학과는 결이 다른 동방 대학을 설립하여 진정한 보편성(university)을 도모하기를 꿈꾸었다. 몸소 실천도 했다. 노벨 문학상(1913년) 상금을 밑천 삼아 1921년 설립한 'Visva Bharati(중국에서는 '인도국제대학')'가 그것이다. '인도와 세계의 교감'을 뜻하는 벵갈어라고 한다.

1924년, 타고르는 량치차오와 후스 등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불교 및 인도 문화 연구자 탕윈샨(谭云山, 1898~1983년)을 만난다. 탕의 해박한 지식에 타고르는 깊이 감동했고, Visva Bharati의 교수로 탕을 초빙했다. 탕윈샨은 1937년 창설된 'Cheena Bhavana(중국학원)' 원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1968년 은퇴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56년 저우언라이 총리는 직접 이 학교를 방문해 '현대의 현장법사'라며 탕의 노고를 치하했다. 명실상부 '중인 대동(中印大同)'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담은 여기서 그친다. 정작 ARC는 두 번째 회합도 갖지 못한 채 유산되었다. 1949년 2차 회의가 예정되었던 난징은 더 이상 중국의 수도가 아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냉전이 아시아를 뜨겁게 휘감기 시작했다. 뉴델리를 감쌌던 아시아 열기는 급속히 식어갔다. 아시아는 다시 이념의 동과 서로 갈라졌다.

돌아보면 비단 이념 대결 탓만은 아니었다. 국가 재건이 지역 건설을 압도했다. 탈식민은 정치의 독립이자 경제의 자립을 의미했다. 식민 경제를 대체하는 민족 경제가 으뜸 과제였다. '주체'의 유별난 강조는 한 차례는 겪어야 할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다만 그 지나침이야말로 식민의 후유증이었다.

결국 아시아는 국가별로 각개약진하거나, 미국 혹은 소련으로 기울었다. 인도는 꿋꿋하게 비동맹 노선을 견지했지만 아시아의 분열을 저지할 역량은 부족했다. 오히려 일국 사회주의에 가까운 자립 경제를 고수하면서. 남아시아 이웃들과도 소원했다.

그리하여 21세기에 부활한 ARC의 기치가 독립(Independence)이 아니라 상부상조(Interdependence)로 바뀌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이웃 간 협동과 연대야말로 독립과 자립의 튼튼한 기초이자 토대임을 자각한 것이다. 아울러 인도는 (재차) 동방을 주시하고 있다. 이른바 동방 정책(look east)을 20년째 펼치고 있다. 이에 동아시아도 눈길을 마주할 필요가 있겠다. 서쪽 하늘 너머 남방까지 지긋하게 내다볼 일이다.

Look South

기실 ARC는 한국과도 무연치 않다. 한국의 대표는 백낙준이었다. 그는 폐막식 연설에서 "지금은 비록 미소 점령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불구인 상태이지만, 곧 통일 국가가 되어 완전한 독립을 실현할 것"임을 약속했다. 또 "통일 한국이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희망도 피력했다. 그와 동행한 고황경은 네루에게 조선의 전통 인형을 선물하기도 했다.

헌데 그 뒷얘기가 실로 간단치 않다. 본디 한국의 수석 대표는 백낙준이 아니었다. 북의 김일성도, 남의 이승만도 아니었다. 여운형이었다. 몽양이 광복 이후 최초의 아시아 회의에 한국 대표로 초청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출국 당일 새벽 그의 집에 폭탄 테러가 일었다. 여운형의 뉴델리행은 취소되고, 백낙준이 연설을 대신한 것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 몽양이 암살되는 곡절까지 감안한다면, 그의 뉴델리행 무산은 도래하는 냉/열전의 전조처럼 다가온다.

남북 분단은 한국이 남아시아와도 뜸해지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중립 노선과 비동맹 운동 등 인도의 행보와는 도통 무관했던 것이다. 아니 저강도의 적대감이 주조였다고도 할법하다. 인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한데다, 한국 전쟁에서 유엔 결의안에 반대하는 등 독자 노선을 견지했던 탓이다.

1973년 인도와의 수교조차도 닉슨 쇼크 이후 제3세계를 둘러싼 북조선과의 치열한 외교 경쟁의 소산이었을 따름이다. 결국 냉전기 한국에서 인도를 포함한 남아시아는 사실상 부재했던 셈이다. 인도는 불교의 탄생지로, 종교와 철학에서나 관심을 두는 무시간성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동병상련으로 타고르와 간디에 관심을 기울였던 식민지 조선보다도 후퇴한 꼴이다.

여파는 오래 지속되었다. 지금껏 독립 인도의 초석을 다진 네루에 대한 연구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래서는 '친디아의 세기'를 맞이하는 기초 공사가 영 부실한 것이다. 그나마 탈냉전과 더불어 '한국인도학회'가 발진했다는 점이 위안이다. 1992년에 학회를 세우고, 다음 해 기관지 <인도연구>를 창간했다.

1995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남아시아 연구소도 설립되었다. 얼추 20년의 역사가 쌓인 셈이다. 동아시아론이 약진하던 시기, 남아시아 연구도 기지개를 켜고 있던 것이다. 이를 몽양의 못다 이룬 뉴델리행을 복원하는 사업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그가 '가지 못한 길'은 한반도에서도, 아시아에서도 더없이 소중하다. 1200년 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잇는 대업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릇 '천축'(天竺)은 멀어도 가까운 나라였다.

지난 20세기의 '예외 상태'를 지나, 물류(物流)와 문류(文流) 양면에서 아시아 네트워크는 끝내 복구 중이다. 허나 돌아온 길만큼이나, 갈 길도 아득하다. ARC의 부활을 그 먼 길의 든든한 동반자로 삼을 일이다. 마침 올해는 인도와의 수교 40주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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